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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 - 절망의 문턱에서 희망을 찾기까지 엄마들의 여정 ㅣ 푸르메 책꽂이 5
김효진 지음 / 부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벼랑 끝 인생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게 열려 있는가?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저을 질문들이다. 이 사회의 구조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최적화 되어있기는커녕 뿌리 깊은 불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장애는 행복과는 무관하며 고통, 불행, 비정상, 비극, 절망, 심지어는 죄와 동일시된다. 장애인은 분명 ‘일반’ 사회구성원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즉 ‘장애’라는 기표는 ‘차별’을 함의한다. 차별은 만연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솎아내어지고, 쫓겨난다. 차등대우는 장애인의 운명이다. 국가와 시장에서는 그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지만, 이미 사회구성원 전반에게 장애인은 성가신 존재로 인지된 지 오래이고, 정상인들보다는 덜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미미한 제도는 있지만 소극적이며, 의식구조의 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즉 사회구성원 다수는 장애인을 어느 정도씩은 차별한다. 이렇게 누적된 차별에 짓눌린 장애인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스티븐 호킹 박사와 같이 성공한 장애인도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례로 만개의 비참을 가려 보겠다는 우의를 나는 헤아려 줄 수가 없다.
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심 끄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TV에서 나의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스타들은 사랑받는 사람의 전형이다. 또 재수 없긴 하지만 ‘범생이’들은 ‘요즘 공부 열심히 하니?’가 청소년들에 대한 인사로 통하는 사회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러나 무관심을 독차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그 전형이 장애인 집단이다.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 이러한 무관심에 훼방을 놓기 위한 기획은 간헐적으로 제출되는데, 최근에 출간된 <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그러한 기획의 최신 버전이다. 특이한 점은 장애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다운증후군, 시각장애, 자폐장애, 청각장애, 지적장애 등의 장애를 지닌 아이들 엄마 12명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는 잔잔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의 ‘숨은’저자이자 ‘엄마들’의 인터뷰어 김효진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 또한 어릴 적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마흔아홉 해를 지체장애인으로 살았다.
장애, 차별과 사랑 사이에
김효진이 전하기를 "처음 자녀의 장애를 알았을 때 그녀들은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슬픔을 맛보았고, 앞으로의 삶에 온통 먹구름만 가득한듯한 절망을 느꼈으며,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8p) 그녀들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왜 생명 탄생의 축복과 함께,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러한 감정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갖고 있는 지를 살펴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장애인 혹은 장애인의 가족들에게 '좀 안됐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게나!'라는 식의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장애인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 냉소적으로 돌변한다.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복지도 비장애인 유권자들의 지갑이 얇아지는 즉시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장애인들은 끊임없이 비장애인의 눈치를 보며, 혹여나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살아간다.
한 사회가 어느 정도의 ‘평등에 대한 감각’을 지녔는가를 알아보려면 그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대우를 살피는 것이 유용하다. 한국 사회도 그들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줌의 제도를 마련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심각한 ‘악조건’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이 사회는 권리보단 의무에 예민하기에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비장애인들이 제시하는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차별하기 좋은 대상이 된다.
차별에 대한 감각에서 평등에 대한 감각으로
평등에 대한 감각보다는 차별에 대한 감각이 돋보이게 된 아이들에 대한 교사 황주환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수행평가 시간에, 학습 장애가 있어 언제나 전교 꼴찌인 학생을 배려하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날선 고함과 손가락질로 나를 질타했다. ‘왜 그 아이만 특별대우 해주느냐’며 교사에게 퍼붓는 야유로 교실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들의 조롱과 이죽거리던 눈빛을 나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아이들마저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 12명의 엄마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소개하며 이 세상은 ‘독한 세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차별의 반대편에는 사랑이 있는 바, 엄마들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려고 애쓰지만 “내 아이, 나 자신에 대한 일차원적인 사랑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견디고 있”다.(9p)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에 ‘고된 돌봄 노동’은 그녀들이 방전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은 장애인이 전부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렇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차별은 연대의식보다는 경쟁의식이 주입된 사회에서 더 빈번하게 이루어지는데,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야말로 경쟁적인 구별에 취해있다. 얼마 전에 유행한 스마트폰 계급도, 노스페이스 계급도 등은 물론,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 따라서, 집의 시세에 따라서, 학벌에 따라, 심지어 가지고 다니는 가방으로 인해 차별 받고, 특권 의식을 구가하는 사람들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우리가 그 사람들이다. 차별이 일상이 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다양하고 정밀한 분류체계가 특권을 누릴 사람/차별 받을 사람을 나눈다. 이 분류체계는 폐기되기보다는 증식하고 있다.
누림의 시간
12명의 엄마들이 ‘장애아’를 낳은 ‘죄’로 육체적인 고생과 따가운 시선을 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전면화 되어버린 차별에 대한 감각이 완화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만연한 '차별에 대한 감각'이 그저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 당장에 내일에라도 각자가 '의지'만 있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감각은 우리들의 필요에 의해 채택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체제가 구축해놓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존중받으며 살기 위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차별에 대한 감각’이 구성된 것이다. 즉 '차별에 대한 감각'은 '악한' 개인이 선택했다기 보다는 유도되고 길러진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겨눠야 할 과녁은 모세혈관이 아니라 온몸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임이 자명하다.
철학자 이진경은 “장애는 어떤 생명체가 흔히 ‘환경’이라고 불리는, 그가 살아야 할 조건과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재고해야 할 것은 현재의 환경, 그리고 이를 극복할 새로운 ‘환경’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자유롭게 남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 그것도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그러할 수 있는 한국 사회, 그래야만 존엄한 삶을 ‘쟁취’할 수 있는 이 참혹한 서바이벌 세계라는 ‘환경’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또한 그것이 적용된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결투의 시간'은 '누림의 시간'으로, 즉 권리의 확장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하여 부재했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 애써 외면했던 것들, 그래서 바로 알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기억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시간, ‘그들’이 ‘우리’가 되는 시간을 요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