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았어 지금 시작해 - 천만 명의 인생을 자극한 소유흑향의 1525 청춘사용법
노경원(소유흑향) 지음 / 시드페이퍼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소유흑향은 변화를 약속한다

뒤표지에 적힌 ‘이 책을 덮는 순간이 당신의 터닝포인트다!’라는 슬로건에 부합하게도 이 책은 당신의 ‘변화’, 특히나 단절적인 과거와의 결별을 약속한다. ‘변화’, 변화란 A가 B나 C 혹은 n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원상태 A에 비해 긍정적일수도 있으며 부정적일수도 있다. 이렇게 변화에는 보통 긍정적 변화나 부정적 변화라는 가치 판단이 따라붙는다.

 

일단은 이 책이 A에서 B로의 변화를 약속한다고 가정하자. 이 변화는 ‘긍정적’일 것이라는 게 책을 구매한 일반 독자들의 전제다. 그렇다면 독자의 상태 A는 무엇이고 저자의 상태로서 독자들에게 도래할 B는 무엇일까?

 

미안하다. 사실 이렇게 난해한 리뷰를 전개할 필요가 없다. 위에서 상정한 변화 ‘A에서 B’란, 공부 못함에서 공부 잘함이라는 단순도식에 가깝다(그렇다고 공부에 대한 이야기만 담겨있는 책은 아니다. 그냥 그것이 가장 큰 떡밥이라는 것. 오해하지 마시길). A에서 C, B에서 A, D에서 G 등이 아니라 A에서 B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이 책에 담긴 낱말 하나하나는 자신의 ‘안일한 생활태도’를 때리는 벼락이 되어 그것을 발칵 뒤집어버릴 것이다. 고로 이 책은 그가 원하는 변화를 위한 충실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동일한 가치 합리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좋은 책’일 것이라는.

 

소유흑향은 노력의 아이콘이다

이 책이 암묵적으로 공략하는 독자군은 입시라는 계급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10대와 자기계발에 매진해야하는 20대 정도다(물론 확장될 여지는 있다). 그녀는 ‘노력이 곧 성공을 부른다.’는 명제를 충실히 시연하는 양질의 역할모델인데, 책의 곳곳에 스며든 노력의 성과로 보아 그녀를 ‘노력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손색없겠다. 즉 독자는 ‘천부적 재능’보다는 ‘실력파’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겠다.

 

그녀의 과거는 속칭 ‘밑바닥’이었는데, 그렇기에 또한 그녀는 ‘변화’와 ‘가능성’을 말하기 위한 최고의 자리에 서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소유흑향’을 많은 이가 알게 된 때는 14점이었던 외국어 영역 점수를 1년 만에 91점으로 끌어올린 그녀의 공부법이 네이버 메인 화면에 소개되고부터이다. 그녀는 학원이나 과외는커녕 고3임에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오로지 노력과 의지 하나만으로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에 입학한 기특한 친구로서 우리에게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교육 현실의 고착화된 대학서열체계를 참조하여 그녀의 ‘숙명여대’라는 학력에 대해 주목해보아야 한다. SKY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지잡대’에 비하면 몹시 훌륭한 학력인데, 이는 최상위권을 바라는 소수의 상위권 학생보다 중위권에 포진한 다수의 학생들에게 ‘본보기’로서 어필하는 바가 크기에 책의 흥행 가능성도 열려있다. 그들에게 SKY 혹은 그와 대등한 학벌은 ‘넘사벽’으로 치부되기에 ‘해봄직한’, ‘노력하면 될 것도 같은’ 숙명여대라는 적당한 과실은 소유흑향을 다수의 독자가 역할모델로 삼도록 꼬득이는데 이바지한다. 즉 그녀는 막연한 부러움, 그로인한 질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당신도 노력만 하면 내 자리에 설 수 있다’고 일러주는 사람이다.

 

소유흑향은 24시간은 만원이다

니체는 “집어넣을 것을 많이 갖고 있으면 하루는 백 개의 주머니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소유흑향도 주머니를 상당히 많이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24시간은 분명 나의 24시간과 달라 보인다. 그녀의 24시간은 만원인데 비해 나의 24시간은 고요하다.

 

그녀의 대학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다보면 그녀가 얼마나 시간활용에 뛰어난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대학시절, 그녀는 학비와 생활비를 자기 손으로 벌었으며 심지어 여행 자금을 마련해 10개국을 여행했다. 또한 언론정보학부라는 전공과 함께 복수전공으로 일본학을, 부전공으로는 영문학을 이수하면서도 성적우수장학금을 놓친 적 없는 탁월함을 보인다. 이쯤되면 그녀에게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고 책 날개에 나와있다). 이러한 소유흑향과 같은 엄친딸 앞에서는 ‘88만원 세대 담론’도 무장해제 되고 만다.

 

소유흑향은 여전히 희망을 전한다

이 책은 여타의 자기계발서적과 똑같이 ‘할 수 있다!’라는 신념에 찬 선언을 독려한다. 또한 노력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편협한 성장 담론과 교육 제도에 순응하는 주체를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소유흑향의 태도는 은밀히 독자들에게 전수되는데, 이것 자체가 소유흑향 자신에게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유흑향’이라는 본보기 추종자들은 본보기와 자기를 더욱 닮게 만들기 위해 자기의 현재를 비하하고 책망하고 부정해야 하는 숙명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목적 추구의 성공을 위해, 노력이라는 고된 노동과 쾌락을 결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는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가 기입된 노력인데, 그들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고된 노력이 보상 받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 재앙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실패자 발생이라는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한 그녀의 전략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성공’에서 ‘소소한 선물’로 낮추는 수사학을 통해 독자들의 강고한 기대심리에 대한 선제적인 완화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무의식은 ‘노력의 아이콘’인 그녀도 무언가를 의식하기에 단호하게 모든 독자의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가 곁눈질로 의식할 수밖에 없던 것은 비정상적인 교육구조와 무한경쟁체제, 불확실한 경제구조, 88만원 세대 담론, 신자유주의 경제 따위의 현실원칙이다. 그녀 또한 이러한 게임 규칙 아래에서의 무분별한 열정의 소진은 자발적 착취로 귀결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만약 이러한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면 독자에게 위와 같은 바보스러운 열정을 조장하여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자기파괴서’”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쯤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기대를 감소시키는 수사학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계발서’라는 한계로 인해 이 책은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일단 ‘자기계발서’가 아니기에. 니체는 희망을 비난한다: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 희망보다 ‘노력만큼이나 노력을 인정해주는 체제도 중요하다’는 진술이 절실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녀는 결론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갈 것’을 주문하지만, 관건은 이게 어느 정도, 얼마만큼의 사람에게 허용되느냐이다.

 

소유흑향은 자기계발을 좋아한다

소유흑향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미래를 위해 현재를 열렬히 희생시키는 타임-킬의 화신일수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90년대에 인기를 끌던 ‘성공학’ 내지는 ‘처세술’ 같은 자기계발서의 뿌리들과는 다른 것을 강조하는 동시대적인 자기계발서를 내놓았는데, 그녀의 책은 예전처럼 ‘성공’을 위해 마냥 욕구를 억누르라는 청교도적 윤리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도 능률이 뛰어나라’고 주문한다.

 

이는 정반대로의 변화일까? 그렇지 않다. 자기계발은 여전히 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담론으로 이용된다. 서동진의 말처럼 “‘자기계발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이 등장한 현상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이 지배를 행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도 성과를 내기 위해 안달하는(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발화될 지라도) 자기계발적 주체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주인 없는 노예’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유흑향이 아니다

물론 이 글은 어쭙잖은 나의 ‘매도의 수사학’을 과시하기 위해 작성된 글이 아니다.

위에 보이는 끄적임들은 당연히 오늘 이 시간에 필요한 질문을 검출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나는 의심이 간다. 소유흑향과 같은 달성 가능해 보이는 본보기를 내세워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열정을 강조하는 방식은 최신식으로 1020을 착취하는 자본의 기술이 아닐까?

 

물론 소유흑향은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를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면 그녀의 ‘미친 열정’에도 불구하고 SKY라는 철옹성에 입성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사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그녀 또한 현실원칙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미친 경쟁의 나락에서 불확실한 하루를 시간표에 맞춰 보내는 학생들에게 소유흑향은 이정표이자 의지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나마 그들이 지옥에서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극히 같은 처지에 있던 소유흑향이라는 특별한 열정을 지닌 개인의 활약이 심어주는 미신적인 위안에 의해서.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분명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의 ‘활약’없이도 견딜만한, 살만한, 풍족한 상태가 더 낫지 않은가?

 

그런데 그러한 변화의 추구는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 아도르노는 "사람은 단지 사기에 당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기만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지금 안주하는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 세상이 너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변할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따르면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자, 우리의 눈앞에 꼬이고 꼬여서 풀 엄두조차 안 나는 실몽당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꼬임의 상태가 ‘일반적’이라며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이는 분명 보수의 입장이다. 이 순응주의적 권력자들을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저 실몽당이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만 한다(오래 걸리고 힘든 일일지라도). 이것이 진보다. 꼬인 매듭을 풀어헤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풀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매듭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전보다는 덜 꼬인, 조금은 나은 상태도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지향으로 우리는 ‘피나는 노력 끝에도 드물게 주어지는 성공’ 없이도 용기와 자신감, 존엄성을 지닐 수 있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체계의 필요성을 주장하여야 한다. 이는 자칫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공평하게 고통을 배분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극복의 대상임이 자명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지향하는 바를 뚜렷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과 열정을 다해야 한다. 또 다른 노력과 열정의 소진 장소가 바로 여기인 것이다.

 

이 나라의 학생들이 소유흑향처럼 기적적인 활약으로 ‘성공’에 가닿는다면 정치계는 정말 아무 일도 안 해도 되고 정치는 필요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소유흑향’은 드물며 정치-없음으로 인한 짐의 무게는 고스란히 개개인들의 삶에 부과되어 버린다. 근데 자기계발서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인 개인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것 같다. 지금의 상태가 유지될수록 자기계발서들은 유리한 것이다. 즉 자기계발서는 정치를 배제한다.

 

A - ?

다시 변화에 대해. A에서 B로의 변화, 이 폐쇄회로. 그런데 꼭 B의 자리에 우리 손으로 B를 기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그간 너무 쉽게 현재 B가 차지한 자리를 B에 내주지 않았는가? A라는 시작은 같다. B의 자리를 대체할 우리만의 그 무엇을 찾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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