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티크M Critique M 2023 Vol.6 - 마녀들이 돌아왔다
김정희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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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시기에 죽임을 당했던 20만 명의 여성과 몇몇의 남성. 중세 유럽에서 많은 마녀사냥이 있어왔다고 알고 있었지만 되려 르네상스 시대에 그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종교와 종교가 부딪혔던 종교 개혁의 시대에는 상대를 이도교로 정의하고 매몰차게 공격했을 것이다. 더불어 지혜롭고 당찬 여성의 등장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도덕성과 성적 수치의 프레임을 씌운 채 그렇게 마녀를 만들어 냈다.

  마녀의 역사와 함께 투쟁해 온 소수자 혹은 약자의 목소리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마녀의 역사를 르몽드의 지원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 6호는 마녀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고 절반은 주된 이슈인 '마녀'를 다루고 절반은 사회 문화, 예술에 관한 것을 담았다. 중세의 마녀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녀 그리고 마녀 사냥에 대해 얘기한다. 지금의 시대에도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유효하며 대중의 편협한 이성과 광기로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기도 하다.

  현대의 마녀는 판타지 장르의 콘텐츠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는 여성이 되어 있다. 때로는 강한 여성의 상징으로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런 캐릭터들에 대한 호감과는 달리 마녀는 여전히 그렇게까지 좋은 의미로만 받아들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마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은 남성들이었고 그들을 부역한 여성들이었다. 그냥 당시 기득권이라고 얘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농경사회의 시작은 서서히 분업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남성이 생산을 여성이 재생산의 역할을 맡았다. 이 분업화는 산업혁명으로 가속화되었다. 여성은 점점 고립되었다. 그리고 고착화되었다. 일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남자와 여자를 나누를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잘할 수 없을 거라는 전제로 구분 짓거나 남성이 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여성의 것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여자 남자는 그리 다르지 않았기에 잔다르크와 같은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강인한 여성의 등장은 남성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영역을 뺏길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강인한 여성에게는 여성성을 잃었다는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용도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할 수 있는 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프레임은 한 마을의 지혜로운 노파에게 더 많이 적용되었다.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나이 든 여성은 남성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폐경을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여성성이 존재하지 않다는 이유로 종종 마녀화 되었다. 많은 자료에서 마녀가 노파인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시대 강한 여성을 이상향으로 삼는 여성들은 스스로 마녀라고 얘기한다. 긴 역사를 보면 마녀라는 단어 자체가 '투쟁'과 이어져 있다. 그녀들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되려 역차별이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젠더 갈등이 심화되는 지금의 시대, 성소수자나 페미니스트 등을 향한 비난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마녀와 마녀 사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연대보다는 야만의 역사가 인간에게는 더 익숙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본능이고 생존에 필요한 행위였을 거다. 동시에 연대라는 이름의 강요 또한 존재한다. 왕권 시대를 지나 바로 독재와 군부 정권으로 이어진 우리의 역사는 동일한 생각을 강요받아 왔다. 민주화를 향한 저항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지만 그 역사의 잔재는 여기저기 남아있고 또 누군가의 밈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국가의 존립이라는 미명아래 개인을 파괴하는 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되려 그 다수는 소수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둑을 무너트릴 수 있는 작은 구멍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박멸해야 한다까지 얘기하는 그들의 말속에는 증오마저 느껴진다. 근데 그 국가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국가인 걸까.

  인간이 생각하는 다수의 생각은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소수 집단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 자체가 지구의 종의 나무의 이파리 수준 밖에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가장 고등한 동물이고 지구를 마음대로 해도 될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 작은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대체 누가 더 강한 걸까?

  두려움은 생존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막연히 두려워하다 보면 그것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는다. 마치 처음 보는 음식 쳐다보기도 싫은 어린아이와 같다. 맛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맛을 봄으로써 더 많은 음식을 접할 수 있고 놓칠 수도 있었던 맛있는 음식도 찾을 수 있다. 상대를 알아가려는 작은 노력이 세상을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도 조금 덜어줄 것이다.

  마녀가 더 이상 마녀라고 불리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조금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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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3.8 202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브누아 브레빌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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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8월호는 표지로 장식하고 있는 FC 바르셀로나의 역사와 그들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자본주의에 대해 얘기하고 나머지 두 개의 큰 이슈로는 국제 사회의 현실주의 이론과 보수화 되어가는 국제 정세를 이야기해 본다. 마지막으로 국내 이슈로 학생과 교사의 인권에 대한 기사로 마무리한다.

  세계적인 이슈를 다룬 이 책은 르몽드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우선 가장 흥미로울 FC 바르셀로나에 대해 알아보자. 바르셀로나는 축구팬이 아니라로 알만큼 대단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한때 간판이었던 리오넬 메시를 차치하고서라도 바르셀로나는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컵을 여러 번 들어 올린 경험이 있는 축구의 명가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다. 그렇다 이 도시는 조지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의 도시가 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독재에 맞서는 곳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마지막 항쟁과 같았던 카탈루냐의 정신은 어느새 FC 바르셀로나에 녹아들었고 프랑코의 지원을 받았던 또 하나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명예직에 가까웠던 FC 바르셀로나의 회장과 이사직은 스스로의 자금을 털어 넣어 운영하던 곳이었지만 운영비는 늘고 재정이 늘어났다. 처음 광고는 유니세프로 후원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으로 정신을 이어갔지만 돈벌이에 대한 유혹에 대한 저항은 그리 오리 가지 못했다. 구단은 중계권료와 주식 등을 매각할 정도로 불안한 재정 상태를 보이고 있고 어느 틈에 그 정신은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버리고 있다. 구단 그 이상의 구단이었단 바르샤의 운명이 궁금하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뤘지만 그 성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미국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승리에 힘입어 미국의 기업들은 세계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좌파의 사민주의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좌파는 우파 정책을 참고하며 정책을 펼쳤지만 자본주의의 질서에 충실한 우파보다 더 민주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정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한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는 대거 등장하는 극우에 손을 들어주었다. 극우는 정통 우파와 다르다. 공약을 남발하고 사실을 조작한다. 부역 언론을 병풍처럼 두르는 이들은 집권을 위해서는 뭐든 한다. 이에 유권자는 더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다. 우파가 극우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좌파가 더 나은 혜안을 제시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이뤄질까. 

  국제 정치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는 '현실주의'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야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경쟁의 원칙을 따른다. 특히 강제국이라면 더욱 그렇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의 하나였지만 핵무기의 등장으로 세계 어디에 있어서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 우선 전쟁을 멈추게 한 상태이기는 하다. 서구에서는 이 '현실주의'를 부정하지만 대표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 번도 현실주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미국은 독재자들과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했다. 

  권력에 대한 무한 욕구는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본능과 같다. 국제체제 자체가 치열한 경쟁의 동기를 부여한다. 모든 국가는 철창에 갇힌 포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강대국은 의지할 보호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안보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생존과 같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독재와 다르게 작동할 것이라고 믿고 독재 국가만이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평화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국가는 자국의 생존을 추구하는 자기 방어를 원칙으로 한다. 모든 국가에게 세계의 정치 체제의 성격은 중요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또한 체제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선봉에 미국이 서 있지만 다들 동조하며 따른다는 것에는 생존의 법칙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늘 '세계의 경찰'과 '아메리칸 퍼스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다른 세계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중국과 러시아가 어김없이 파고든다. 그렇다고 세계에 눈을 돌리면 자국의 경제와 국민의 복지에 대한 불만이 쏟아진다. 미국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단 하나다. '이것이 미국의 문제인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싸움인가? 트럼프는 대선 승리 후 "나는 미국의 대통령이지 세계의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현재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단히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해외 파병이 미국 대선에 영향을 준 적은 없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싸움은 단순한 "영토 분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간 미국이 참전하며 겪었던 희생은 군수 기업의 기부금으로 배를 채운 의원들과 그 기업들에게 돌아갔다. 우크라이나 지원 파병 반대 여론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대선까지 지속된다면 전쟁을 대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자세가 당락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재미난 기사가 많았지만 서이초 사건을 정리하는 기사로 서평을 함께 마무리할까 한다.

  '사랑의 매'라는 단어로 체벌이 당연한 시절에 살았던 우리에게 선생에게 대들고 폭력까지 휘두르는 일은 놀랄 일이다. 촌지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는 안도는 어느새 도를 넘어선 부모 갑질로 바뀌어 있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직접 연락할 수 없으며 우편으로 상담을 요청한 뒤 학교에서 지정한 날에만 상담이 가능한 프랑스 제도가 비추어 보면 그 화살은 학부모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교사의 인권을 위해 교육부와 교사 노조는 무슨 일을 했을까? 사건이 터지고 나서 '학생 인권 조례'가 문제라며 이번엔 교사와 학생을 갈라치 기하는 정부를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된다. 교사의 인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교사의 자질이 문제라면 선정과 교육하는 방법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닐까. 이건 교사라는 입장을 넘어 노동자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가 아닌가.

  2021년 ADHD 환자는 2020년에 비해 18.9%가 증가했다. 2017년에 비해서는 44.4%가 증가했다. 유전적, 환경적으로 발생하는 이 질병은 유전적인 이유를 대기엔 너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제대로 된 치료가 되지 않은 채 교실로 내몰린 학생은 교실 전체에 방해를 주고 교사를 지치게 만들게 된다. 이 질병이 왜 한국에서만 이토록 많이 발생하는지 우리 사회는 그 원인을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교사를 탓하기 전에 체벌을 부활시키자고 말하기 전에 이 나라의 아이들이 얼마나 아픈지 밝히고 보살펴야 하지 않을까?

  여러 글들이 있었지만 세 가지 이슈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어서 좋았다.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게 또 시야를 넓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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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 드 부아르 12호 Maniere de voir 2023 - SF, 내일의 메시아 마니에르 드 부아르 Maniere de voir 12
에블린 피에예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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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기술의 발전에 '기대 심리'가 강하게 발현한 학문이라고 해도 될 만큼 SF(Science Fiction)은 그 세력을 넓혀 왔다. 현재가 암담할수록 미래는 뭔가 달라야 했기에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 현재를 비판해 왔다. 그 역할은 SF의 것이었다. 최근 세계가 <아바타>, <듄>을 비롯해 여러 SF 작품들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심리는 <포스트 휴머니즘>에 강한 드라이브를 거는 느낌이다.

  SF의 매력은 다가올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은 만화가 되고 만화는 다시 영화가 되고 그렇게 어느새 현실이 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은 인간의 상상을 증명해 내고 있다. 우주로 향했고 금성과 화성 그리고 달에 속속들이 착륙을 하고 있다. 비록 연구시설이지만 우주정거장도 가지게 되었다. 냉동인간, 마인드 스캐닝 등도 기술이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AI와 로봇의 미래는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SF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쓰여왔지만 지금은 멀지 않은 미래 혹은 현실을 담는 느낌이 강해졌다.

  SF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두고 철학하는 학문과도 같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과학적 논리를 결합시켜야 한다. 모든 SF작가가 열정적인 진보주의자이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장르를 한다는 것 자체가 포기를 모르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SF는 혁명이며, 종교와 다른 종류의 '메시아'를 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미래는 달라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열망은 이 유행에 큰 원동력이다.

  이런 상상력을 결합한 문학적 장르는 사실 하나 더 있다. 바로 '판타지'다. 단순히 과학적이다는 이유만으로 SF와 판타지를 나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포스트 휴먼은 불을 부리고 천둥을 부를지도 모른다. 지금의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SF는 Speculative Fiction이라고 불리는 게 맞다. 사변소설은 비리얼리즘을 나타내는 용어로 써였고 SF뿐 아니라 판타지, 호러, 대체역사, 위어드 픽션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SF는 또 현실이 되어 버리니 용어가 주는 모호함은 여전하다.

  SF의 하위 장르로는 사이버펑크, 시간 여행, 대체 역사, 밀리터리 SF, 초인물, 아포칼립스, 스페이스 오페라 그리고 사회 과학 등이 있다. 더 쪼개는 경우도 많지만 SF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대분류는 대체로 이렇다. 사회적으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AI와 노화의 종말이다. AI는 점점 발달하고 있고 언제 '특이점'을 넘어설지가 관건인 듯하다. 그리고 냉동인간과 안드로이드로 대두되는 트랜스휴머니즘 또한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SF에서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새로운 종'이 아닐까 싶다. 생물학적 진화 속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진화 노력으로 인해 어느새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생식하지 않더라도 번식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번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영생을 얻는다면 생식 기능이 퇴화해 버릴지도 모른다. 마인드 스캐닝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복제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호모데우스'라고 해야 할까. '호모 클로니우스'라고 해야 할까 (웃음) 인간은 지금도 복제하는 인간 아닌가.

  SF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인간다움'이다. 무엇이 인간다움인가? '번식' 가능하다? 그 능력을 잃는다면 인간이 아닌가? '공감'을 할 수 있어서?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는 인간이 아닌가?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진다. 그런 답을 찾는 짧은 글이 인상 깊다. 인간은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고 로봇은 '존재를 계측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인간의 마음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사랑, 증오, 절망, 뿌듯함 모두 상대적이다. 계측할 수 없다. 그것이 어설픈 무언가라고 할지라도 그 어설픔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우주론, 아바타에서 SF가 주는 메시지, 현대판 귀족 메리토크라트에 대한 이야기 모두 흥미로운 주제다. SF를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여러 방면의 접근이 신선했다. 더불어 정치적인 지형과 사회의 가치의 변화까지 끌고 가는 건 문학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 같았다. 

  인간은 사물과 무엇이 다른가? 얼마나 다른가? 그런 과학의 가장 밑바닥에서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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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7 - 전쟁과 평화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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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성군의 반열에 들어선 담덕은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게 되었다. 덕치를 중심으로 백성을 살피고 국가를 강건하게 만들 준비가 되었다. 7권은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간접으로 느낄 수 있다. 이제 절정에 다다르니 이야기의 전개의 속도가 붙고 긴장감이 고조되어 간다. 가장 재밌게 읽은 7권이었다.

  대륙을 누볐을 우리의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새움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북위의 탁발규는 후연의 공격을 보기 좋게 피했고 되려 후연의 보급을 습격함으로써 역습을 가했다. 40만을 이끌고 중원으로 세력을 넓히려 했고 후연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운 건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전성기를 누볐던 근초고왕을 지나니 인재가 부족했다. 광개토태왕 덕에 목수부지는 했지만 내치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오랜 시간 교류가 있었던 왜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고 고구려에서 도망친 해평과 백제에서 목만치 장군은 왜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목만치를 백제로 불러들이고 왜의 군사지원을 받고자 했던 백제였지만 왜의 왕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앙숙이었던 해평과 목만치에게 정략결혼을 주문했고 둘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왜에서 흩어졌던 세력들은 조금씩 뭉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왜왕은 선진 문물을 얻고자 백제로부터 학자들을 요청했고 반란이 많았던 백제에서 왕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학자들과 함께 왜로 보내라고까지 주문한다. 그야말로 볼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시 기세를 펴기 위해서는 왜의 군사력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고야 만다.

  7권에서는 앞으로 전개될 요동벌판의 전세와 백제와 신라의 정세를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백성들에게 진정한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가 모이면 바로 만주 벌판을 달릴 거다. 벌써부터 8권의 통쾌함이 전달되는 듯하다.

  7권의 주된 내용은 북위와 후연의 전투 그리고 백제와 왜의 교류가 주된 내용이다. 특히 왜에서 이뤄지는 외교 전의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초부거사'의 매력에 빠진다. 

  광개토태왕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7권이다. 8권이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가 된다. 장수왕도 태어났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다. 이제 날아오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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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명령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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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영 작가는 중학교 때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처음 만나 좋은 기억을 가진 작가다. 꽤 치밀하고 즐겁게 읽었던 책인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조금 반가웠다.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작가와 만나게 되었고 최근에는 인기 없을 그리고 민감할 주제를 가지고 돌아와 있었다. 사실 나도 스스로 책을 골랐다면 아마 펴보지 않았을 책이지만 델피노 출판사의 지원으로 이렇게 펴보고 된다.

  역사 소설은 픽션이 어느새 논픽션으로 써여지기도 해서 조심스러움이 있다. 삼국지를 집어삼킨 삼국지연의처럼 역사와 픽션은 가끔 다른 얘길 할 수 있다. 책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민감한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근대사 그리고 끝까지 심판받지 않고 떠난 전두환과 그를 심판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10.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당한 날 이후로 빠르게 재편되었던 힘의 논리. 누군가는 혁명을 얘기하고 누군가는 반역이라고 얘기한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저 군인들의 쿠데타일 뿐이다. 쿠데타를 하라고 배운 적이 없다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한태형 대위와 새로운 권력에 충성하기로 한 장재원 대위 누 전우의 치열한 대립에 우나연이라는 히로인을 투입함으로써 대립을 더 높이려고 시도했다.

  가장 피부에 닿아 있어야 할 이야기가 때론 가장 먼 이야기로 들린다. 어릴 때 라디오에서 진행된 '제5 공화국'이라는 성우들이 진행하던 프로가 있었다. 이럴 테면 오디오 드라마라고 할까. 그 정도의 멀고 구식의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글 또한 꽤 옛날 느낌이 난다. 지금이라면 조금 더 세련되고 더 부드럽게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달달한 이야기도 섞어가면서..

  군인의 이야기로 투박할까라고 생각들 기도 하지만 그때의 이야기는 그때의 느낌으로 쓰이는 것이 크게 나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의 분노를 무력이 아닌 법으로 해결하라던 전 상사의 명령은 이 책의 메시지이면서도 제목이다. 어떻게 보면 12.12 쿠데타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에게 무력은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인공 한태형 대위의 심리적 변화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내용이며 작가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세밀한 정보가 묘사가 돋보이는 책이다.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절. 그 뜨거웠던 세월 속에도 개인마다 뜨거움이 있었고 분명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격동의 세월은 그런 것들의 총집합 아닐까.

  반역자는 스스로의 손으로 해결하겠다던 한태형 대위는 그럼에도 대통령이 적군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신념이기도 하고 전략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일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면 자칫 전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얀마 쿠데타에 미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같은 편을 겨눈 총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며 모든 것은 법으로 판단해야 한다. (최근엔 그 법 집행자들의 신뢰도 낮지만) 그럼에도 잘잘못을 다투며 비판하고 토론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민주국가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 명령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전에 죽었다. 우리 법은 점점 더 진화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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