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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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문명으로 시작하여 중세 유렵을 거쳐 나아가는 주인공 소마의 약 80여 년 정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은 아이의 삶에서 노년의 삶까지 인생의 굴곡을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서 삶 그 자체에 돌아보고 질문한다. 


  쏘아진 화살처럼 옆에서 보면 굴곡진 인생이지만 위에서 보면 곧은 우리 삶을 생각해볼 수 있었던 이 작품은 웨일 북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아프리카 어느 작은 마을이라고 보일 듯한 한 마을에서 소마는 제사장으로 보이는 아버지를 두고 있다. 성인식을 보이는 듯한 의식으로 소마의 아버지는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 한다. 소마는 누구보다 빠르게 활과 화살을 어머니에게 받아가지만 어머니는 마냥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아버지는 넓은 들판으로 활을 쏘곤 소마에게 화살을 찾아서 돌아오라 한다. 소마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버지는 올곧은 화살과 올곧은 여행자는 삶의 여정에서 길을 잃더라도 자신을 믿고 곧게 나아가면 결국엔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이라 했다.


  1장은 소설 전체가 던지는 질문과 답이 모두 들어있다. 지대넓얕을 지필 했던 저자답게 단순한 흥미보다는 철학적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1장에서는 알 수 없는 어느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대한 선택을 종용받지만 소마는 스스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런 뒤 돌아온 마을은 모두 불탔고 소마는 유럽의 어느 집에서 사무엘이 되었다.


  1장과 2장의 장면 전환이 너무 심하게 되어서 사무엘로 불리는 아이가 소마일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의 충격으로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린 것과 이미 삶에 대한 큰 답을 얻은 듯한 해탈한 행동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소마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고네'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인물들 때문에 채찍에 독이 발린 지도 모른 채 고네의 형벌을 자신이 집행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주고 연모하는 마음을 품었던 '고네'의 죽음은 사무엘을 소마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영웅이 되었다.


  대부분의 소설이라면 이 정도에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소마에게 다시 몰락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진정한 삶, 진행한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한 쏘아진 화살은 잠깐 헤매지만 결국 제 길을 찾고 가고자 하는 종착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소마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게 한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물어보는 아버지의 환영은 스토리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은 삶에 후회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첫 장에 묘사한 신의 모습. 보는 자, 듣는 자, 말하는 자, 냄새 맡는 자, 느끼는 자. 인간의 오감을 극으로 체득한 자가 신이 되지만 모두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하면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부도 권력도 삶에 흘러가는 가운데 만나는 하나의 풍경이었고, 결국 오롯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굉장히 넓은 폭을 가진 이야기. 철학적인 질문을 종종 던지기도 하고 스토리 내내 이쯤이면 되었냐는 내면의 질문과 조금 더 살아보겠다는 의지. 이 삶이 네가 원하는 삶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는 길을 헤매고 있으니 포기하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소마는 아버지의 말처럼 곧은 화살이었고 헤매었지만 여정은 결국 마무리되었다.


  인생은 희노애락으로 가득 해지만 결국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삶이다. 삶의 지속력은 결국 내면의 내가 던지는 유혹과 질문에 계속 답하는 것이다. 내 삶을 지속하는 나의 의지. 내 삶에 대한 질문의 소중함. "인생의 여정에 두고 온 것은 없는가?"를 질문하며 다시 찾으러 나설 것인지도 본인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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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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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자식은 아비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태티서가 들은 이 예언은 제우스도 포세이돈도 태티서에게 구애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보다 능가하는 신이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얘기와 같았다. 제우스는 아비보다 훨씬 능가해도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인간에게 태티스를 중매했다. 그는 왕이었고 제우스의 손자 <펠레우스>였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전사>라는 예언을 받게 된다.


  브로맨스를 넘어 퀴어에 가까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는 이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전사라는 예언을 받은 아킬레우스와 모든 것이 모자라 보였던 파트로클로스. 그들의 인연은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을 괴롭히는 귀족을 밀쳐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질러 추방당해 펠리우스의 나라로 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왕자는 동무를 지정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동경의 눈길을 받던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동무로 정하게 된다. 그들은 함께 지내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늘 함께 였다. 둘은 정반대의 성격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었고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그리스가 모두 죽임을 당해 갈 때도 전장에 나서지 않았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접한 뒤로 광전사처럼 전장을 누볐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후 둘의 관계에 사랑이 있었다는 해석이 있었고 파트로클로스는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작가는 그 점을 파고들어 대학살의 주체였던 아킬레우스에게 서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왜 예언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처절하게 벗어나고자 했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그들이 운명에 가까워져 가면서도 도망치려 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케이론에게 배움을 받을 때의 모습은 천진난만했고 태티스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정사를 치른 후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의 감정의 선의 묘사도 좋았다. 전장에서 죽음에 대해 경험해버린 아킬레우스가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비해 케이론에게 배운 의술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파트로클로스의 미묘한 교차점.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진 파트로클로스와 그의 죽음에 광분한 아킬레우스. 처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브로맨스에서 나올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도 생경한 마음도 들었다.


  죽어서까지 대학살의 장본인 아킬레우스로 남겨지지 않길 바랬던 파트로클로스는 사람들에게 그의 다른 면도 기억해 주길 바랐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명예였다. 최고의 전사는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작가도 그런 파트로클로스에게 탄복했는지 아킬레우스에게 이렇게 긴 서사를 만들어 주었다. 일리아스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위키백과만 보더라도 그의 능력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다. 작가는 분명 파트로클로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다.


  두 사람은 상호보완 관계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마음일 수도 있다. 후반부에 들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 <바람의 검심>의 켄신과 토모에가 생각났다. 한 사람은 검이었고 한 사람은 검집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검이었다면 파트로클로스는 검에게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검집이었던 것이다. 켄신이 살생을 위한 칼부림에서 대의를 위한 칼부림으로 바꾼 것도 대의를 이룬 후 속죄의 삶을 살아간 것도 모두 검집의 역할을 했던 토모에의 역할이었다. 이 책에서 토모에는 파트로클로스였다.


  아킬레우스의 위대함을 얘기할 것 같았던 작품이었지만 감동은 파트로클로스에게 받게 된다. 두 인물은 방황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달랐다. 어린 시절에는 특유의 밝음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이끌었다면 트로이 전쟁에서는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광기를 안았다. 남자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두 인물이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모습에서 오는 감동이 너무 컸다. 저자는 아킬레우스 같이 능력 위주로 인간만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파트로클로스 같은 인간도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역시 <키르케>와 마찬가지로 단편의 조각으로 긴 서사를 만들어준 작가의 노력에 감탄을 받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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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 금욕과 관능의 미술사 해시태그 아트북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고봉만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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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은 인류가 그것을 인지하기 전부터 존재해 왔을 것이다. 빛이 닿지 않은 모든 것은 검정이었다. 인류가 태동부터 검정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밤이 되면 어둠이 내려앉았고 하늘은 까만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행여나 찾아낸 동굴 속에도 검정은 늘 존재해 왔다. 검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검정의 의미와 미술사에서의 검정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소개하는 이 책은 미술문화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검정은 구하기 쉬운 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동굴의 벽화는 검정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검정은 모든 색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원초적인 색이어서 그랬을까 인류가 세월을 거듭할수록 그 의미는 다양해져 갔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색은 검정과 하양에서 비롯된다'라고 주장한 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검정은 색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이런 추대와 추앙은 사회적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정은 죽음, 불행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금욕을 상징하기도 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권력, 고급스러움 때로는 관능의 의미까지 가지게 되었다. 검정은 단조로워 보이는 색이지만 다채로운 의미를 가졌다. 모든 색을 뒤섞을수록 검정에 가까워지듯..


  책은 검정에 관해 꼭 봐 두어야 하는 18편의 작품과 의외의 작품 19편을 소개한다. 눈에 확 들어오는 작품도 있는가 하면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작품도 있었다. 검정의 의미의 변화와 작품에서의 의미를 읽다 보면 전시회를 한 바퀴 돈듯한 뿌듯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페이지는 두텁고 꽤 좋은 질감의 종이를 사용하였고 인쇄된 그림은 나에게 만족스러움을 주었다.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모두 탄소로 이뤄져 있다. 그럼에도 하나는 검정 하나는 투명하다. 과학적으로 보면 전자의 결합 상태 때문이지만 검정과 하양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빛을 합하면 하양이 된다. 모든 색을 합하면 검정이 된다. 너무 단조로운 무채색이라는 평을 듣지만 그 속의 다채로움이 있다. 검정으로 표현은 다채로운 작품을 이 책을 통해서 감상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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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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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요즘 유행하는 번 아웃에서 벗어나 자신을 가다듬는 힐링 도서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렇다고 맹렬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에세이처럼 읽어달라고 했지만 에세이보다는 인문학에 가까웠고 철학적이었고 사회 문제를 다룬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동을 멈추고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책은 필로우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현대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종용되는 것은 아마 <시간관리법>이 아닐까 싶다. 스케쥴링에 대해서 과하다고 싶을 정도로 압박을 받는다. 노력하지 않는 삶에 대한 죄의식으로 가득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소위 힐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또한 더 빡빡한 삶을 위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을 얘기한다.


  이 책은 도입부부터 <공백 없는 삶>은 현대 사회의 필수 요소 같지만 그것이 삶을 진부하고 기운 없게 만드는지를 말한다. 매일 쓰는 일기도 큰일이 생기면 며칠을 비워 두듯 삶의 공백은 스스로에게도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다 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다.


  장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나무꾼은 수 백 년 된 고목을 쓸데없는 나무라고 하며 지나치지만 나무의 입장에서는 우스운 상황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산성이라는 잣대를 여기저기에 대보며 판단한다. 하지만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하는 생산이라는 것이 1%는 될지 미지수다. 적자생존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것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관심 경제>로 수익을 올리는 기업이 생겼다. 페이스북(메타),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으로 대표되는 SNS들은 사람의 시간을 묶어 둔다.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는 허울 좋은 얘기를 하지만 인간을 네트워크에서 단절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한번 내보인 호기심은 데이터로 저장되고 더 자극적인 내용이 눈앞에 나타난다. 개인은 그렇게 점점 더 획일화되어 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강조하는 <퍼스널 브랜딩>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자신의 강점을 더욱 날카롭게 하기 위한 퍼스널 브랜딩은 개인의 다원성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것을 필터링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관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퍼스널 브랜딩은 경험의 폭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공간에서 낯섦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떤 계기로 나의 관심사가 조금 틀어졌다는 얘기다. 평소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것들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과거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했던 시절의 인간보다 생존에 취약하며 직관에 약한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루함이 필요하다. 명상과 템플스테이 같은 것은 무료함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될 것 같다.


  인간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태계의 다원성을 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다원성도 잃어가고 있다. 세계화는 각 민족의 고유문화를 말살하고 있다. 최근 BTS와 한국 드라마가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문화의 획일화라고 볼 수 있다. <퍼스널 브랜딩>은 개인의 획일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가 되는 동시에 마케팅 타깃이 될 수 있는 좋은 표본인 것이다.


  다원성을 잃어간다는 것은 멸종으로 가는 길이다. 생태계의 멸종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 생물이 겪었던 역사다. 6번째 멸종의 대상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할 다원성도 잃어가고 있다. 지금 당장 위험이 닥친다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는 물리적으로 엮인 공동체다. 디지털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디지털 디톡스>라는 강제성을 띄며 고가의 상품도 있다. 지금 손에 죈 핸드폰을 내려두고 옆 사람과 얼굴을 보면 대화를 나누고 햇볕을 쬐고 새소리를 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식당에 가면 편하게 밥을 먹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유튜브를 보여주는 부모들을 심심찮게 본다. 하지만 그것을 만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는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쥐어주지 않는다. 숙제도 백과사전을 뒤져서 하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공원이라도 있으면 아파트라도 지어 집 값이라도 내려라고 말하지만 굉장히 좋은 녹지 시설은 부촌들과 함께 있다.


  공백 없는 삶을 사느라 좁은 길을 바쁘게 살아왔다. 가끔은 하던 것을 놓고 고개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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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잊어도 좋겠다 - 나태주 인생 이야기
나태주 지음 / &(앤드)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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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시로 만나 온 나태주 시인의 에세이다. 어떤 말을 적혀 있을까 내내 궁금했다. 작품은 시종일관 잔잔했고 어리 시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시골에서 살았던 나에게도 추억을 상기시켰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태주 시인의 따뜻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엮어낸 이 에세이는 넥서스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태주 시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이 닿은 부분부터 중학교 입학까지를 적어내고 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던 유년의 모습이었지만 정겨움이 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아주 훌륭하신 외할머니가 계셨고 선생님도 잘 만나신 듯했다. 책에서 풍기는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가난한 시절 다들 살아내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외할머니는 사랑으로 나태주 시인을 보살폈다. 사랑을 받은 아이는 감성이 풍성해지는 걸까? 사랑으로 키워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아가고 있는 시점에 외할머님의 위대함을 느낀다.


  어릴 적 버스도 제대로 다니지 않던 시골에서 살았던 덕분에 아주 좋은 기억이 많다.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학원 다니기 바쁜 요즘에 애들에 비하면 나는 분명 풍성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한국 전쟁을 거쳐 온 분의 이야기에서 익숙함을 느낀다. 책 속에 표현하는 시골의 모습이 뇌리에 지나친다. 그리고 기분이 좋다.


  바쁘게 살아가고 대도시에 살며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이 요즘의 상식이라 생각이 들지만 나는 시골 생활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문명의 이기는 조금 덜 미쳤지만 자연과 함께 지내온 시간이 지금에도 그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찔레순을 따먹고 떡갈나무 잎으로 시냇물을 퍼먹던 시절의 이야기를 책 속에 만난다니 참 새삼스럽다. 시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죄'가 되는 듯 살아가는 현실에 그 시절 '시골의 삶'처럼 느긋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내용은 나태주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지만 너무 편안하고 행복한 글이었다. 내가 시골 생활을 해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멈추는 것이 쉽지 않은 여유 없는 삶에 찾아든 추억 같은 책이었다. 자서전 같지도 않고 작은 것을 크게 부풀려 얘기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 잔잔함만이 존재하는 서정적인 에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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