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 레이디 셜록 시리즈 1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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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을 읽어봤을 책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 존재는 알고 있는 세계적인 탐정이 바로 '셜록 홈스' 다. '셜록 홈스가 여성이었다면?'이라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많은 부분 '셜록 홈스'의 내용을 따라간다. 단편인 줄 알았는데 시리즈 물이며 셜록 홈스의 에피소드를 모두 이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여성의 대우와 활동이 억제되어 있던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인 셜록 홈스가 사건을 맡고 해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이 책은 리드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는 셜록 홈스의 '주홍색 연구'를 그대로 가져왔다. 셜록과 왓슨이 만나 처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작품답게 사건보다는 배경과 인물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당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더 군다니 빅토리아 시대이고, 주인공이 여성이었고 그 당시에는 좀처럼 할 수 없었던 사회 활동을 하게 된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셜록 홈스는 가상의 인물이며, 그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사람은 '샬롯 홈스'이다. 어려서부터 특별했던 아이는 결혼보다는 사회생활을 원했고, 그것을 위해 아버지와 약속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샬롯은 어떤 이와 성관계를 맺어 혼사를 입에 올리지 못할 사람이 되려 했고, 결국엔 집을 떠나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이 머물 곳은 많지 않았고 돈을 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망으로 떨어지면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던 샬롯에게 왓슨이 나타난다.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꽤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샬롯에게 투자를 하기로 한 왓슨은 여흥으로 시작했지만 샬롯과 함께 당시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최근에 등장하는 많은 추리소설들은 심리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부분이 많아서 굉장히 전문적이며 디테일하다. 그런 면에서 오랜 시절이 흐른 이 소설에서 그런 긴박감을 느끼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사건은 정지된 상태였고 비밀을 풀어가는 단서를 모우는 단계에서도 어떤 극적인 장면이나 위험이 출몰하지 않았다. 단조로운 단서 하나하나에 감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원래의 셜록 홈스에서도 오류가 여럿 있다고 했고 첫 권은 습작의 느낌도 많았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최근의 과학수사 추리물에 익숙해서 전개가 조금 느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단순 추리물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는데,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그 시대의 여성 차별과 그것에 대항하는 샬롯의 모습에서 공감을 받고자 하는 흔적이 많았다. 좋은 가문과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었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려면 전문 교육 기관을 졸업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 당당히 반기를 들은 샬롯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닥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은 아직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결국 사건 해결로 돈을 벌게 되지만 그 모든 것들에 어느 남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여성상 또한 독립적으로 달성할 수 없었음 얘기한다.


  익숙한 존재들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신선함이 있었고, 추리물이라고 하기엔 아직은 추리에 본격적이지 않다. 샬롯이 셜록이 되려면 꽤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고, 느닷없이 여탐정 셜록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말을 귀 기울지 않는 시절에 지성의 최고봉에 있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며 독자와 신뢰를 얻는 작업을 하는 듯했다. 그 이야기는 고전에 닮아 있었기 때문에 첫 페이지부터 사건이 터지길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긴 독자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충분한 상황 설명을 마친 첫 번째 이야기였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부터는 보다 본격적이게 전개가 될 것 같다. 사건도 해결해야 하며 여성인 것도 숨겨야 한다. 어쩌면 원래의 셜록보다 더 어려움이 많고 더 흥미진진할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남장을 한 셜록을 기대했지만 당당하게 여성의 옷을 입고 추리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예상이 빗나가는 신선함은 있었다.


샬롯이 앞으로 어떻게 지성체로 인정받을지가 더 궁금한 추리소설이면서도 인문학적인 작품이다. 등장하는 여성들이 툭툭 던지는 말속에 존재하는 뼈를 찾아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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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을 그리면서 배운 101가지 101가지 시리즈
이종범 지음 / 동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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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들은 글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쓴다면 웹툰 작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법에 대한 책을 많이 쓴다. 조금 더 나아가면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매디방, 클립 스튜디오 같은 전용 앱의 사용법에 대한 책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웹툰을 그리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글을 쓰는 마음가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페이지에 한 문장씩 영단어 노트처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글과 그림을 통해 생각을 만들어내는 이 책은 동녘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나에게 익숙지 않은 작가의 이름은 야구 선수를 떠올렸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첫 문장으로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없는 만화를 그려보는 것이다'


  재밌는 글을 적어보려 여가 시간마다 꾸준히 읽고 쓰고 있지만 나의 작품에 대한 첫 문장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질책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글쓰기 책은 글을 써 본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라는 어느 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재미없고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끝을 맺어 보았을 때 비로소 레벨업을 하는 것이다. 경험치 게이지가 아무리 채워져도 100%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능력도 증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한 문장 한 문장씩 경험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해 준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툭툭 던지는 대사처럼 받아들이는 쪽의 생각을 물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중에는 작품을 만들면서 필요한 스킬도 있었고 힘든 일에 대한 푸념도 있다. 그럼에도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만화에 대한 그런 감정이 있는 사람이야 말로 만화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창작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 번씩 무심코 열어 아무 페이지나 읽어보면 많은 위로가 될 것 같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지금 바로 시작해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도 없다. 부단히 고민하고 그리다 보면 어느새 성장해 있지 않을까.


  나도 하나를 마무리하면 일정을 다시 조절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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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속지 않고 숫자 읽는 법 - 뉴스의 오류를 간파하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톰 치버스.데이비드 치버스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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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은 우주의 진리를 풀어나가는 하나의 도구로 어렵지만 그만큼의 신뢰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수포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도 숫자에서 오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회사에서는 '정량적'인 것을 좋아한다. 숫자는 객관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모두 옳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화 시대. 많은 미디어는 엄청난 양의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 진리인 마냥 얘기한다. 하나 같이 연구를 인용하기도 하고 당당하게 숫자를 제시한다. 그들은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누군가 던져 준 미끼를 덥석 물어 베끼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한 것은 '출판 편향'은 가지고 있다.


  출판 편향은 한 가지의 주제에 대해 여러 자료가 있지만 자극적이거나 흥미로운 주제만을 다루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구 자료 또한 편향성을 가진다. 식당에 애국가가 나오면 한식을 먹을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보다 흥미롭고 두 연구가 동시에 연구자료를 내놓더라도 한쪽만 출판될 가능성은 얼마든 지 있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것이라면 웃어 넘기기 힘든 문제가 된다.


  숫자는 연구를 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표본의 크기를 지운 상태의 데이터로 사람들을 자극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적 지표만 가지고 엄청나게 크게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더 심하게는 표본을 모우는 시간과 방법을 바꿔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심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연구는 해당 결과가 나오는 순간 표본 수집을 그만 둠으로써 주관적인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많은 교란 변수들이 있는 변수를 가지고 상관성을 비교한다. 마치 초콜릿 소비가 많은 나라가 학력이 우수하다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한다. 잘 사는 나라는 학력 수준도 높고 부의 수준도 높아서 초콜릿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뿐인데 말이다. 바다에서 썰물 때만 표본을 수집하여 지구의 수면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만들어진 결과로 예측 모델을 만들어서 진리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모여진 표본에서 몰려있는 부분만을 골라내 마치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 일이 생긴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만들어진 표본은 수 천 가지의 이유가 모여서 생긴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팩트풀니스'가 생각이 났다. 세상에는 진실이 아닌데, 진실인 것처럼 통하는 것이 많다. 1차적인 책임은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연구자와 교묘하게 숫자를 처리하고 때로는 편향 출판을 하는 언론사에게 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일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결국 최종 소비자인 우리의 몫으로 돌아온다.


  이해관계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면 논조가 확 바뀌는 이유는 같은 일을 해석하는 자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의 시대에 결국 자신의 책임으로 남겨지게 되는 게 조금은 씁쓸하다. 숫자가 왜곡되거나 왜곡되게 보이게 하는 22가지의 오류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며 익히면 세상을 조금 더 사실적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세상에 믿을 게 없는 건지, 선택적 믿음이 필요한 건지 참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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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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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너무 좋아 무의식적으로 장바구니에 담고, 그렇게 구매를 해버린 기억이 남은 책이다. 책장 속에 한동안을 보내다가 눈에 띄어 꺼내어 읽어본다. 사물의 뒷모습이라니 참 멋진 말과 시선인 것 같다.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면이 분명 있을 것이다.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작은 잎'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며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 세상은 자신의 인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내 눈에 닿은 그것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12개의 얼굴을 가진 어느 관음보살상처럼 여러 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래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행위는 참 중요한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엄청난 통찰력을 얘기하는 책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적어 둔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렇네'라며 시큰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구나'라고 돌 트이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런 글과 함께 담긴 담백한 삽화는 보는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코로나 시대에 집안에 틀여 박혀 쓰는 말은 스무 단어나 될까 싶다. 반대로 시끌벅적한 바깥세상에서도 쓰는 말은 스무 단어보다 많을까? 무의미한 대화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획일화된 대화만 하고 있진 않은지 고민해 본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그럼, 이만'. 사실 그렇게 다양한 단어를 써가며 논쟁할 일도 사색을 나눌 일도 없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문장에는 항상 주어가 존재한다. 생략을 하든 하지 않든 말이다. 주어는 동사를 하는 주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바람이 분다'와 '봄이 온다'에서 주어인 '바람'과 '봄'은 정말 스스로 불고 스스로 오는 것일까. 태양이 있고 지구가 회전하고 기체의 대류가 발생하고 그런 온갖 것들이 행위를 만든 거라면 주어의 의지대로 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성립하는 걸까. '나는 공부한다'는 순수하게 내가 공부하는 것일까. 무언가에 의해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말장난 같지만 그것이 우리가 쓰는 말의 뒷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물론 말꼬리 물기를 하면 결국 모든 의지의 주체는 '빅뱅'이 되겠지만, 주어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가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느샌가 자신의 일 외에 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사용자 편의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격리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TV는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 많은 부분을 알아서 해주고 쉽다. 하지만 고장이 났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고작 전문가를 부르는 일이다. 사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그저 부품 모듈만 교체해 줄 뿐이다. 사실 이런 관계는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사물 혹은 사건의 겉에만 관심이 있고 그 내부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장 난 것이 우리 자신이거나 우리가 속한 집단일 때 혹은 그 집단을 움직이는 제도일 때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의 개인적 사색을 담은 책이다. 속지가 빳빳해서 펼쳐보기 힘든 점이 있지만 마치 도화지를 사용한 화가의 느낌처럼 글을 담았다. 그래서 두꺼운 종이가 마음에 들었다. 무심코 지나쳐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스친 많은 것들과 나 자신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모습을 보려는 노력은 나에 다르게 보는 능력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게 해 줄 것 같다.


  빠르게 걷는 것만이 미덕인 시대에 잠깐 서서 쳐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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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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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시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사와 인간에 대한 시가 이 속에 담겨 있다. 가볍게 읽어야 하는 마음은 어느새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 준다.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근대사 많은 분들의 희생 속에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갇혀 있다. 제주 4.3을 고발하는 '한라산'을 집필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던 이산하 시인의 작품을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만나본다.


  불 같이 활활 타올랐던 역사의 사건들이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재의 위에 서 있다는 표현과 이 나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우리는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라는 표현은 참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독재의 칼날에 몸이 베였다면 자본의 칼날에 정신이 베여버렸다. 입으로 진보를 외치지만 다리는 자본의 카펫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제주도 4.3 추모식에서 가수 이효리 씨가 '한라산'을 낭송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제주 4.3으로 금기시되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새로운 유배지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고 했다.


  악의 제도 아래서 평범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들에 통해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기도 했다. 히틀러 아래 그저 일만 열심히 한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생겨난 악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광주 5.18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시신을 보고 홍어라며 비웃고 좋아하는 사람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아이들이 살이 오른 꽃게로 다시 태어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게서 키보드에 올려진 손가락에서 나오는 잔인한 폭력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을 보여 준다며 거울을 걸어 둔 어느 동물원의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범인은 객석에도 집안에도 있지만 가장 찾기 힘든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완전한 모습에서 완벽하게 부서지는 물방울에게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민했다. 대선 한 달 전, 그를 위해 법정에서 진술할 변호사나 문인은 없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많은 변호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이산하 작가는 준비한 200페이지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찢어버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적어냈다. 군부에 대한 도발적 저항이자 침묵하는 동시대에 항의였다.


  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고 그 모습만 변할 뿐 여전히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악마의 모습이 내 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작가가 얘기한 자본에 정신이 베어져 버려서이기 때문일까. 삶이 어려워질수록 악은 더 활개 치게 될까. 


  나는 지금 어떤 탈을 쓰고 있는 걸까. 인생이 페르소나라지만 나를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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