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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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2년 베테랑 기자가 10년을 공들여 만든 경찰 소설이다. 굉장히 공포스럽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앉고 책을 읽었지만 잔인한 부분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700페이지나 되지만 읽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일상적인 모습에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긴장감이 있었다. 하나의 미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천재적인 형사의 모습이 아닌 그 앞에서 나약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한 경찰이라는 조직의 갈등과 고뇌를 서술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이기 이전에 조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쇼와 64년(1989년) 한 소녀가 유괴되어 끝내 시체로 발견되는 미제 사건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건은 해결되지 못하고 공소시효는 1년을 남긴 상태로 작품은 시작한다. 64 사건에 참여했던 미카미는 형사부에서 경시부로 발령이 나서 홍보담당관의 보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형사에 대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고 능력과 긍지가 높은 사람이었지만 형사부와 경시부를 넘나든 불청객으로 양쪽 모두에게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딸은 가출을 한 상태다. 그는 딸아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조직에 도움을 요청하고 조직에 빚을 진 그는 성격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64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빌미로 경찰청은 형사부의 부장 자리에 중앙의 캐리어들을 내릴 계획이었다. 중앙과 빠른 소통이 지금의 시대에 빠른 대응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경시청의 세력을 넓히려는 계획이기도 했다. 이에 형사부는 집단적 항명을 하며 경시부 인원의 죄를 언론에 흘렸다. 경찰청장의 방문과 함께 구조 조정을 노리는 경시부와 형사부의 상징인 형사부장을 캐리어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형사부의 충돌은 살인 사건을 떠나 이 작품의 가장 큰 갈등이다.


  두 번째 갈등은 언론과 경찰 간의 정보의 갈등이다. 약점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경찰과 경찰 권력을 공격하는 언론들. 사실 정의로워 보이지만 결국 이익의 절충점을 찾아가는 갈등이다. 언론과 경찰의 갈등은 가벼워 보이지만 꽤 격렬하면서도 긴장감 넘친다.


  미카미의 심적 변화를 쫓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형사는 범죄를 증오하지 않는다. 단지 사냥감을 쫓는 본능만 있을 뿐이다. 그런 미카미의 형사 체질은 어느새 모든 조직은 중요하고 그들이 모여서 조직을 굴러감을 깨닫게 된다. 형사부에도 경시부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홍보담당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직무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캐리어가 몇 명이 쳐들어오든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경찰로서 해야 할 실무는 항상 우리의 손안에 있다. 본청에 경찰은 없다. 육체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관념에만 얽매여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잊었을 때, '진짜' 경찰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으로는 어느 사건도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카미의 생각은 말끔하게 정리가 된다. 형사로서의 미카미. 형사부가 단체로 보이콧을 하려고 하자. 현의 주민을 인질로 농성을 하는 것이냐고 격렬히 저장하던 미카미의 모습이 낯설지 만은 않다. 경찰의 국민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자신을 돌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폭력조직일 뿐이라는 문장에서 지금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가출한 딸에 대해서 누구보다 걱정하는 아내를 위해 자신이 했던 일이 '죽음의 조건'을 감추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미카미는 아내가 어디서라도 살아 있길 바라며 '생존의 조건'을 찾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죽지 않는 조건을 찾는 '절망' 보다 어떻게 하면 살아가고 있을지를 찾는 '희망'을 기대는 것이 답을 찾기에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책이 주제로 삼은 '유괴 사건'의 부모가 되는 사람을 연장선에 놓으려는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12년의 기자생활, 10년을 다듬은 문장. 쉼 없이 넘어가는 책장에 희열이나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잔잔한 마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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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김종대 지음 / 가디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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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인 중에 누구를 가장 존경하나요?라는 질문에 조건 반사하듯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을 얘기할 것이다. 거북선과 명량해전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얘기다. 조금 더 나아가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순신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저자 또한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얘기하면서 이순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연구하고 책을 만들고 있었다.


  40여 년 동안 머릿속에서 이순신에 빠져 살았던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의 그동안의 공부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이 책은 가디언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 보았다.


  이순신의 업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실로 인간의 이야기가 싶은 부분이 많이 있다.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등용과 하옥의 롤러코스트뿐만 아니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전투를 매번 승리를 이끌었다. 이순신의 리더십, 장수들의 팔로워십 그리고 많은 수하들의 단결력, 믿음, 사랑 그것에 운이라는 것까지 더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왕과 여러 동료들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이름을 떨친 제갈공명과 넬슨 제독에 비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영광스러워야 할까 라는 질문도 해볼 만하다.


  40년 이순신을 쫓았던 저자의 이순신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완벽해 보이는 사람인데 조금 더 미화된 느낌을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문관을 하지 않고 무관을 한 것은 집안에 쓰인 죄 때문에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 씨의 혜안이었다는 책도 있다. 그리고 충신이 아니었던 원균을 이해했을 거란 대목에서도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신념 이외의 것을 이해하는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 상황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임진왜란이 그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욕망의 분출이라는 부분도 살짝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일본을 통일한 후 남아도는 사무라이와 귀족 세력의 먹잇감이 필요했기 때문에 관심사를 국외로 돌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의견을 얘기해도 사실 이순신이 미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은 없다.


  이 책은 위인전으로 고 보기에는 저자의 사심과 평가가 많이 가미되었고 리더십 자기 계발서라고 하기엔 너무 역사서 같다. 저자의 평가를 참고 삼아 역사를 읽어 나간다면 꽤 좋은 위인전이 될 듯하고 마지막에 갈무리한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얘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리더십 자기 계발서라고 해도 좋은 내용들이었다.


  사실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지는 않았다. 벌써 이순신에 대한 책을 2권 이상 읽은 상태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빠르게 읽어 나갔고 새로운 부분 저자의 감상평 정도를 즐기는 수준의 독서를 하였다. 저자는 이순신으로부터 공직자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한다. 어느 누가 이순신 같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어설프게 따라 하다가 부작용만 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마음가짐, 약한 자를 두루 살필 줄 아는 자세, 공을 나눠주고 책임은 본인이 지는 원칙. 이런 것은 어떤 위치에 있는 리더라도 분명 배울만한 점이다.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의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무능력하고 질투가 많았던 왕인 선조. 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받고 휘청였다. 정책과 비전이 사라진 인수위. 잡음이 끊이지 않는 장관 후보자들. 시끄러운 양당 정치 그리고 둘로 나뉜 듯 더 심해진 지역 갈등. 지금의 모습이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지 않나 걱정스럽다. 지금의 시대에도 이순신이 등장할까? 아니면 그때의 의병들처럼 국민 개개인들이 또 힘겹게 이겨내야 할까. 왜 이득은 기득권이 챙기면서 나라는 국민들만 고생해야 하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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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마 - 장애의 세계와 사회적응
어빙 고프만 지음, 윤선길 외 옮김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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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양성과 존재의 인정을 말하고 있는 현시점에도 수많은 차별과 편견 존재한다. 몇 해 전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행이 일어났다. 성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군인을 죽음에 몰고 가기도 했고,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장애인들의 목소리에도 싸늘한 눈길을 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더 사소하고 개인적이 게는 성격이나 외모 때문에 공격을 받기도 하고 이혼이나 병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모두 말하지 못할 비밀을 안고 살아가고 그것은 하나의 낙인처럼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넓은 의미로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


  정상인이란 무엇일까? 무리의 '다수'가 정상이라고 간주한다면 무리에서 핍박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인, 장애인, 일탈자, 이방인 등 수많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책에서는 그들 모두 Stigma(낙인)을 가지고 산다고 얘기한다. Stigma는 신의 흔적을 얘기하는 성흔과 신체적 이상을 얘기하는 중의적인 단어이지만 최근에는 신체적 이상에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Stigma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면서도 강렬하다.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고 더 깊이 있는 책을 읽고 싶어 집어 들었지만 만만치 않았다. 역자 또한 저자의 독특한 문체에 애를 먹었다고 하니 눈으로 훑어가는 첫 번째 독서에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많지 않았다. 단지 책은 강렬했고 심상치 않았다. 단순한 차별 금지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사회 구성원을 '정상인'과 '일탈자' 혹은 '정상인'과 '낙인자'로 분류하며 이런 사회 구성은 당연한 것이고 서로 바뀌어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단지,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혜택이 많기 때문에 낙인자는 정상인으로 행동하는 법을 잘 알고 있고 정상이 되었을 때에도 쉽게 적응하지만 낙인자가 된 정상인은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지 알기 때문에 적응이 무척 힘들 수 있다는 얘기도 함께 하고 있다.


  낙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장애나 흉터 등의 신체적인 혐오에서 오는 낙인. 의지박약, 잔혹함, 중독, 동성애, 실직, 자살 등의 개인의 기질에서 나타나는 낙인. 마지막으로 인종, 민족, 종교에 대한 종족 낙인이 있다. 특정 낙인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관련하여 비슷한 학습경험과 유사한 자아개념의 변화를 겪는다. 다른 말로 유사한 모럴 커리어(moral Career)를 경험하게 된다. 모럴 커리어는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을 의미하며 타인의 반응에 의해 형성되는 역할과 기대를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낙인을 가진 사람은 정상인의 관점을 배우고 통합하며 특정 낙인을 지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학습하게 된다.


  낙인에서 중요한 부분은 '가시성'과 '돌출성'이다. 회의를 한다고 가정하자. 회의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장애인은 가시성이 높다. 누가 봐도 장애가 있다. 하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구분하기 힘들다. 하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면 말을 더듬는 사람은 도드라진다. 돌출성이 높은 것이다. 이로 인해서 낙오에는 '불명예자'와 '잠재불명예자'로 분류할 수 있다.


  잠재불명예자들은 최대한 정상인처럼 행동하려 노력하는 이런바 '패싱(passing)'을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불임이나 무정자증 혹은 내적 질병, 인공 항문 더 나아가서 범죄자, 약물 중독 등이 그렇다. 불명예자들은 이미 낙인자 표시가 나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수용' 혹은 '은폐'이다. '수용'은 그들과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회적 정체성 가운데 마땅히 표해야 하고 마땅히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존중과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꽤 정확하다. 은폐는 낙인을 최대한 숨기는 것이다. 맹인이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 다리가 없는 사람이 의족을 착용하는 것이 그렇다.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는 낙인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인과 낙인자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슬퍼하거나 분개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정상인이 정말로 낙인자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낙인자는 경멸, 냉대 등의 적절치 못한 것에 괘념치 말고 동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정상인들을 재교육시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하나 비교하며 외모는 다르지만 그 외모 밑에는 낙인자도 완전한 인격체임을 조용히 그리고 우아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낙인자도 전적으로 사회로부터 파생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정상인과 낙인자는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것들일 뿐이다. 부유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듯 그렇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에 엄청 힘든 상태인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듯 정상인들은 낙인자들에게 그렇게 배려를 나눠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야말로 사회심리학 교재 같은 책이었다. 장애 혹은 온갖 콤플렉스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숨기려는 인간의 모습을 감정을 제거한 채 건조하고 학문적으로 대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노력들을 알 수 있었다. 낙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낙인을 남긴 우리의 시선의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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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행복론 - 97세 경제학 교수가 물질의 시대에 던지는 질문
리처드 이스털린 지음, 안세민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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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인한 국가들의 경기 부양책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코인과 주식 그리고 부동산은 급등했다.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벼락 거지'라는 호칭이 붙어졌다. 시중에는 돈을 버는 방법을 늘리는 N잡이라는 것과 재테크에 대한 도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행복이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돈이 많아지길 원했다.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까? 소득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의 주인공인 리처드 이스털린이 들려주는 '행복 경제학'에 관한 얘기는 윌북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지금의 경제학이 19세기 의학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민한 어느 경제학자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수치에만 집중하는 경제학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 고전 경제학을 빼면 분배의 경제학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많이 버는 것 만이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렸다. 자본 독재 시대에 기업은 있어도 인간은 사라졌다. 벌지 못하는 자는 미천하다는 사회진화론적인 생각이 만연하고 있다.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은 '행복 경제학'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경제학이라니 꽤나 호감이 가고 멋진 학문 같다. 행복이라는 정량적이지 않을 것 같은 개념을 측정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GDP와 같은 거시적인 숫자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의 변화를 측정하는 꽤나 미시적인 경제학이 틀림없다. 경제학이라고 하기엔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부분도 있다. 어쩌면 '통섭'이 필요한 학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비교' 다. 아래를 보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옛말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의 행복은 상대적인 부분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소득이 아무리 많이 늘어도 주위 사람들과 비슷하거나 적으면 오히려 불행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면 행복할 수 없다. 소득이 늘어도 재테크를 하는 돈이 늘어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100만 원을 벌고 주위 사람들이 200만 원을 버는 상황보다 내가 50만 원을 벌고 주위 사람들이 25만 원을 버는 상황을 사람들은 더 선호한다.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존재한다. 첫 번째는 '건강'이다. 건강은 남들과 비교하지는 않는다. 그저 과거의 나와 비교할 뿐이다.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기준에 대한 행복과 불행이 있을 뿐이지 남들과 크게 비교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특징은 대부분 남들의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나만의 행복 기준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경제학자들은 인간에 행복에 대해 배우지는 않았다. 경제학에 개인의 행복을 얘기하면 이단아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행복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GDP가 국민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은 중국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북유럽의 울트라 복지 국가들의 행복도가 높은 것은 복지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지는 삶에 대한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잘 살아야만 복지가 가능한 건 아니다. 코스타리카와 같은 나라에서도 복지 국가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


  행복이라는 온도가 느껴지는 단어를 경제학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시 한번 변해야 하는 시기임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성장을 노리는 경제학에는 기업에만 집중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낙수효과'는 없다는 것을.. 지난 코로나 시대에 제공되었던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은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었다. 집이나 직장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면 세금이 50%가 넘어도 다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월세나 대출이자 그리고 구직자로 살아가며 낭비하는 돈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이다. 기득권들이 반대를 심하게 할 것 같지만...


  이쯤에서 사회주의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동유럽 국가들 중에는 자본주의 때보다 사회주의일 때 더 많이 행복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국민의 삶을 체제가 보장해줬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은 지극히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 체제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독재나 공산주의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실직하고 쓸모 없어진다는 느낌은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보다는 덜 할 것이다.


  북유럽의 울트라 복지 국가들을 혹자는 민주사회주의 체제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다른 이는 복지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생산성이 낮아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의 분배를 독재의 횡포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사회 환원을 하는 억만장자들은 자신의 부가 사회로부터 왔음을 안다. 부가 남들보다 자신에게 많이 왔다고 믿는다. 그들은 안다. 사회가 지탱되지 않으면 자신의 부도 쓸모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분배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라는 사회 공산체제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체제는 철저하게 거부해야 하고, 행여 그들의 체제를 인정하면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해 동안 GDP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너나없이 경제가 엉망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양극화가 가져온 사회적 비교에 의한 '행복 상실' 때문은 아니었을까. 


  패러다임의 변화는 변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강력한 부를 쥐고 있는 기득권층과 세상이 조금만 변해도 굶어 죽을 것 같은 사회 약자들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야간의 주간화, 평일의 주말화, 가정의 초토화'를 업무 지침으로 내린 김기춘의 행동에서 기득권 악랄함을 다시금 느낀다. 


  노동에 의한 소득은 소중한 것이지만, 부가 상위 1%에 흡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강제적 분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세혈관에 피가 돌지 않으면 결국 핏줄은 터져 버린다. 약자가 되고 싶지 않음 마음은 알겠지만 분배를 거부한다고 내가 약자가 아닌 게 아니다. 사회의 부가 고르게 퍼지면 자본은 더 빠르게 돌고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지 않을까. 복지와 분배는 죽어가는 자본주의를 살릴 심폐 소생술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기업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에 집중하는 경제학자와 정책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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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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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른 기술 발전 속에서 철학과 윤리는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색보다는 당장 잘 살기 위해서 익히는 기술들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IT와 경제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인간관계와 리더십의 문제는 늘 중요한 관심사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마이클 샌들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신선한 질문이었고 꽤 오랜 시간 회자되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에 매칭 시키기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렴풋이 알게 된 정의가 현실에서 좌절되는 모습에 실망만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질문으로 그럼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서 조금은 더 포용성 있고 조금은 더 유연한 사고를 바라고 있는 이 책은 세계사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책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옳은 일'에 대한 정의로부터 파고들며 의문을 제시한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라고 묻는다. 인간은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은 옳은 판단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평범했던 모습에 대해서 미개하다니 잔인하다니 평가를 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비윤리적인 사람들이었을까?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진을 보여 주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나이 든 흡연자들은 그때가 좋았었지라고 반응할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실내에서 담배를 필 수 있느냐고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여전히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옳다는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옳다는 것은 어떻게 익히게 될까? 당연하게도 우리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처럼 우리보다 한 두 대 앞선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옳음을 익힌다. 그것도 아주 강압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는 중에 혁명적인 집단이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다수의 의견이 됨으로써 옳음의 기준은 옮겨 간다. 이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지금 옳다고 하는 나의 행동이 시간이 지난 뒤에 악인의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달은 이런 윤리적 변화와 함께 맞물려 간다. 특히 바이오산업은 더 밀접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연구하는 일은 항상 윤리적인 문제 앞에 놓여 있다. 유전자 재조합에 의한 개량된 인간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지금도 논쟁 중인 줄기세포를 이용한 장기 이식은 어디까지 생명이라는 문제 앞에 놓여 있다. 낙태를 여성 인권을 위해서 옹호할 수 있던 것이 인공 자궁에서 잉태하는 태아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식탁 위의 가짜 고기들은 진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하게 할 수도 있다. SNS에서 증발되지 않는 기록을 남기는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비난 앞에 놓일지도 모를 일이다.


  옳고 그름의 잣대는 사회적 구조나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노예 제도는 비인간적인 제도였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정신병으로 치부되었던 성소수자들 또한 이제는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구조는 지금의 형태가 옳은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최고이고 사회주의는 공산당이나 하던 거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을 만들어내고 있고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부를 가지는 형태를 만들었다. CEO의 역할이 중요하기는 일반 사원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를 받을 만큼의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더 많이 버는 사람에 대해 더 강한 세금 정책이 있어야 함에도 사회 구조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부의 양극화는 또 다른 곳으로 번진다. 최대의 이윤을 쫓아가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늘어나는 임금 대비 충분한 이윤이 나질 않는 부분에서는 급격한 비용 상승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육과 보건이다. 지금의 교육은 예전에 비해서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투입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은 농경을 시작한 이래 더 나은 뇌를 가진 적이 없다. 그저 기록/검색하는 방법이 개선되고 서로의 지식을 나누는 방법이 발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학업 성취도가 월등히 늘어난 것도 아니다. 장난감 가격이 반 값이 되는 동안 학비는 2배를 훨씬 넘어 버렸다. 의료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약은 만들지 않는다.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창궐하는 질병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치료비가 상승하는 만큼 병원장과 의사들의 급료는 올랐지만 의료 환경은 그렇게 많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 책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어떤 답을 주려고 쓰인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하고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의견에도 개개인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가 얘기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이다. 자기 의심과 고민을 하고 상대의 의견을 단칼에 잘라내지 말고 들어 볼 수 있는 아량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화두를 던졌다. 그 속에서 경제 선진국, 복지 후진국 미국의 민낯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생산성은 늘지 않고 비용만 증가하는 보건과 교육에 대해서는 국가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기술과 함께 윤리는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어제는 옳음이 오늘은 그름이 될지도 모른다. 빠르지 못한 변화는 어쩌면 인류에게 재앙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대 세대에게 어리석음에 대한 혹평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윤리에 대해서까지 예측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단지 타인의 옳음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해 봄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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