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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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시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사와 인간에 대한 시가 이 속에 담겨 있다. 가볍게 읽어야 하는 마음은 어느새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 준다.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근대사 많은 분들의 희생 속에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갇혀 있다. 제주 4.3을 고발하는 '한라산'을 집필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던 이산하 시인의 작품을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만나본다.


  불 같이 활활 타올랐던 역사의 사건들이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재의 위에 서 있다는 표현과 이 나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우리는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라는 표현은 참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독재의 칼날에 몸이 베였다면 자본의 칼날에 정신이 베여버렸다. 입으로 진보를 외치지만 다리는 자본의 카펫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제주도 4.3 추모식에서 가수 이효리 씨가 '한라산'을 낭송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제주 4.3으로 금기시되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새로운 유배지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고 했다.


  악의 제도 아래서 평범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들에 통해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기도 했다. 히틀러 아래 그저 일만 열심히 한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생겨난 악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광주 5.18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시신을 보고 홍어라며 비웃고 좋아하는 사람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아이들이 살이 오른 꽃게로 다시 태어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게서 키보드에 올려진 손가락에서 나오는 잔인한 폭력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을 보여 준다며 거울을 걸어 둔 어느 동물원의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범인은 객석에도 집안에도 있지만 가장 찾기 힘든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완전한 모습에서 완벽하게 부서지는 물방울에게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민했다. 대선 한 달 전, 그를 위해 법정에서 진술할 변호사나 문인은 없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많은 변호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이산하 작가는 준비한 200페이지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찢어버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적어냈다. 군부에 대한 도발적 저항이자 침묵하는 동시대에 항의였다.


  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고 그 모습만 변할 뿐 여전히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악마의 모습이 내 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작가가 얘기한 자본에 정신이 베어져 버려서이기 때문일까. 삶이 어려워질수록 악은 더 활개 치게 될까. 


  나는 지금 어떤 탈을 쓰고 있는 걸까. 인생이 페르소나라지만 나를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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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스타트업 - 1인 스타트업 ‘해주세요’ 조현영 대표의 창업 성공 스토리
조현영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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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엔 생산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춘 창업이 주를 이루었고 그것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의 환경에 맞는 기업이었다.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소프트파워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창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더불어 소량을 OEM으로 생산해주는 업체도 생겨난다. 지난해 우리를 덮친 코로나19는 이런 환경을 더욱더 급격하게 바꿔주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의 기회가 열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내 1등 심부름 앱 '해주세요'의 조현영 대표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겪었던 일화와 그간의 노하우를 적은 이 책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획일화된 조직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온다. 이 중에는 창업을 하려는 사람도 있고 SNS를 통한 수익 창출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다. 콘텐츠와 아이디어만 있다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신생 IT 스타트업의 90%가 3년 안에 폐업한다. 결국 1% 남짓의 기업들이 유니콘으로 거듭난다. 무협지 속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공을 얻는 행운은 없다. 그저 미친 듯이 파고들 뿐이다. 이것은 당연한 정답이면서도 달갑지 않은 답일 수도 있다.


  어느 책인지 기억나질 않지만 명예와 부를 얻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적당히 버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운이 따라와서 어느 정도의 부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퀀텀 업을 하려면 결국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을 잡고 끌고 가는 것도 결국 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일주일 내내 16시간에 가까운 일을 해내는 1인 스타트업 대표의 얘기일 뿐 아니라 일할 시간이 모자라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일런 머스크의 얘기이기도 하다.


  스타트업은 '잘될 거 같아'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망한다. 첫 창업은 노하우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하더라도 망한다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지속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리뉴얼하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빌 게이츠처럼 특출 난 재능도 자본도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LG에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는 자신이 스타트업을 하고 싶다고 사업하는 친구에게 가서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보여달라고 했다. 본인은 엄청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해서 친구에게 보여줬는데, 친구는 대뜸 '이렇게 하면 망해'라는 대답을 남겼다고 한다. 정말 사업을 진지하게 하고 싶다면 사업계획서는 100장이 모자를 수 있다고 지금 가져온 사업 계획서로는 시작하면 결국 망한다는 얘기였다.


  스타트업, 유니콘의 영광 뒤에는 뼈를 갈아 넣는 노력이 없을 수가 없다. 저자는 그런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있다. 아이디어가 좋다면 쓰고, 아이템에 확신이 있다면 잃지 않으려 존버 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자본과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에 직원을 늘려간다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대기업의 오너는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야 하지만 스타트업의 대표는 '타노스'가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전문 분야를 가진 두 사람이 시너지를 내며 공동 창업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 시작하는 스타트업의 대표라면 일당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항상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스타트업이 스타트를 잘해서 성장하기 시작하면 결국 '업'의 문제가 된다. 자신의 아이템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과감한 투자를 할 수도 있고 더 큰 꿈을 위해 합병을 할 수도 있다. 마크 저크버그는 페이스북을 1조에 팔라는 야후의 제안에 일절 고민도 없이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사업이 그보다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업을 냉정하게 바라보려면 항상 객관적인 시각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이 책은 많은 경영서나 창업 도서에 비해 특출 나게 다른 점은 없다. 그만큼 창업을 하고 기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에는 비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자신의 아이템을 대하는 태도나 미래를 생각하는 자세 등에 대해서는 수긍가는 면도 있다. 투자를 받으면 금세 팔아버리는 대표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작해야 하는 창업 앞에서 높은 학력, 좋은 직장은 큰 의미를 주질 못한다. 자신이 가졌던 기득권에서 빨리 탈피하고 바닥부터 좋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마음. 조금은 비참한 현실에서 굳건할 수 있는 의지. 자신의 아이템에 대한 신뢰 등을 가진다면 창업이라는 것에 한 발짝 내딛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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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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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대선 중에 유시민 작가가 '인간이 비참함을 견디는 방법'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이재명 후보에게 권한 책이다. 제목답게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는 딱 하루다. 수용소에서 눈을 뜨서 잠들기 전까지 만 하루의 이야기. 러시아판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작품이다.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 체제는 막무가내식으로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그곳은 세상 어디보다 비참한 곳이다. 그 속에서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평범한 농노 수감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지내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수용소의 하루를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그려내고 있다. 하루를 200페이지 정도에 녹여내니 얼마나 섬세한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수용소라는 정치적인 환경에서 저마다의 생존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약탈의 환경에 놓여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하루가 된다. 어려운 일을 피하거나 조금 더 많은 배식을 위한 업무량을 조절하기 위해 뇌물을 바친다. 배식을 한 그릇 더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평소보다 많은 건더기에 작은 행복을 얻기도 한다. 담배 한 모금 얻어 피우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에는 자유라는 것을 갈망했다. 하루하루를 살아냄으로써 비로소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거다. 왜 들어왔는지도 출소 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수용소의 삶보다 나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자유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엔 그 갈망이 사치가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내년에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것은 간수가 정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마음은 훨씬 편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104반에 속해 있다. 반이라는 것은 비참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반장은 작은 공동체의 리더였고 책임과 권한을 한 몸에 가진 조금은 멋있는 사람이었다. '반'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섞여 노역을 하는 일은 인간다운 면모를 느끼면서도 사회의 부조리도 알 수 있다. 단지 추가 배식을 위해 노역을 하는 수감자들 그래도 그들 사이에는 뭔가 끈끈함이 있다. 수감자들의 노역의 대가를 가져가는 수용소. 이것은 당시 스탈린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독재와 권력의 개가 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면모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수감자와 다름없고 그들의 '비참함'을 견디는 방법은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다. 그 속에서도 이반 데니소비치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너무 잘 터득한 나머지 여러 사건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너무 편히 읽힌다. 더 나아가서 그냥 고된 노역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저자는 아주 평범하게 풀어낸 글로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수감자의 모습 속에서 독재의 아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노역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기 전 늦어버린 복귀 시간에 뿔이 난 수감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느리게 걸어서 간수들의 쉼도 방해는 모습에서 비참함에 놓은 인간의 저항이란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느꼈다. 광복 이후로 급격하게 기울어진 기득권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자본은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고, 부자는 훌륭하다는 얼토당토않은 가정이 성립하기도 한다. 


  비참함을 느끼는 하루. 시대는 또 그렇게 흘러가겠지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좋은 시대가 올 때까지 견디는 것 만이 정답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다만 영창을 가지 않기 위해서 간수의 행동을 대하는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지는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비참함을 견뎌내는 것은 그 속에서 행복의 조각을 찾는 것일까. 단지 그것밖에 없을까. 너무 재밌고 너무 편하게 읽어버린 작품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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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윌버의 통합불교 - 영성의 미래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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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성장을 주제로 삼은 이 책의 대상은 모든 종교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그 확장을 거부한다. 하지만 불교만은 법륜이라 하여 그 깨달음이라는 것을 진화시켜 왔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불교에 대해서 통합을 얘기한다. 첫 번째 회전은 붓다라는 인물에 의해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 속에 남아 있다. 두 번째 회전은 '공'의 개념을 도입한 나가르주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째는 아상가와 아수반두라는 배다른 형제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일반적으로 '유 가행파'라고 불린다. 탄트라와 금강승을 네 번째 회전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 법륜이 일어난 지도 벌써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학은 발전했고 양성평등의 개념도 자리를 잡아간다. 이 시점에서 종교를 다시금 하나로 모으는 지혜가 필요하다. 켄 윌버가 제안하는 4세대 불교인 '통합 불교'를 간추린 이 책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무교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교는 불교다. 그것은 유일신이 없다는 것이고, 많은 부분 열려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절에 발을 디디는 것은 교회나 성당에 발을 디디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이 과학과 많이 닮았다는 개인적인 호감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유한한 물질들로 태어나며 하나의 개체가 되고 죽으면 흩어져 새로운 개체가 된다. 불교의 윤회와 닮았다. 최근에 핫한 양자역학은 그 존재가 있는 것이면서도 없는 것이라는 '공'의 개념과 닮아 있다. 그것이 과학적 통찰력은 아니겠지만 과학과 묘하게 이어지는 것이 재밌다.


  사실 얘기하자면 책의 1장은 진지하게 읽었지만 2장부터는 빠른 속도로 눈에 띄는 구절만 정독하였다. 종교라는 느낌보다는 논문 같은 느낌이 강해서 그렇게 쉬이 마음이 가질 않았다. 무릇 깨달음이라고 함은 수수께끼 같은 한 문장을 가지고 수만 가지 느낌을 가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불교의 깨달음은 모두 그런 것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극히 학술적이다. 무언가를 분석하고 쪼개야 하는 것이 서양인들의 기본적인 태도라면 존중하지만 불교를 학문적으로 대하지 않는 나에게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간이라는 것과 영적이라는 것 모두 칼로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책은 부단히 분류하고 있다. 물론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고 그에 알맞은 단어가 필요한 것 또한 맞다. 그런 의미에서 현자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느끼기보다는 불교 그 자체를 현대적인 학문처럼 익힐 필요한 사람에게 맞는 책인 것 같다.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인간의 인식으로 만들어진 종교는 분명 오늘날의 개념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는 있다. 과학적 지식이 전무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의 오해와 여성은 미천하다는 인식들은 오늘날의 인식과는 조금 괴리가 있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많은 정의와 단어들이 쏟아지고 여러 장의 도표가 제시되는 것으로 살짝 힘겨움이 있다. 명상이나 깨달음 나아가 영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꼼꼼히 읽어볼 가치는 있다. 하지만 좋은 문장과 그에 대한 사색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생각과는 다른 내용에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이 책에 원본에 가까운 <내일의 종교>라는 책을 펼쳐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기대하던 것과 다른 내용이라 읽는데 힘들었던 점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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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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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관심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올해 결국 막스 베버까지 도달하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베버는 자신의 강의를 통해서 어떻게 정치에 개입해야 하는지 답을 찾고자 했다. 그 두 번의 강연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유시민 작가의 '자신은 책임질 수 없기에,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일은 꽤 괜찮은 정치 구조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를 알고 싶어 집어 들었지만 막상 머릿속을 헤매었던 쉽지 않았던 책. 한 번 읽고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첫 번째 후기를 남겨 본다.


  국가란 역사적으로 그에 선행하는 정치단체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이라는 수단에 근거를 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다.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이 그때그때의 지배자들이 요구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의 내적인 정당성의 근거가 필요하다.


  그 정당성에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관습이다. '영원한 어제의 것'의 권위. 이것은 구식의 가부장과 세습 군주가 행한 '전통적인' 지배다. 두 번째는 천부적 자질(카리스마)의 권위다. 어떤 개인의 계시, 영웅적인 정신 그 밖의 지도자적 특성에 대한 완전히 인격적인 헌신 및 신뢰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투표에 의한 지배자, 위대한 민중 선동가나 정당 지도자가 행사하는 '카리스마적' 지배다. 마지막으로는 '합법성'에 의한 지배다. 법률상의 규정의 타당성과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통해 근거가 부여된 사실상의 '권한'에 의한 지배인데, 이것은 근대의 '공복'과 그와 유사한 모든 권력 소유자가 행사하는 지배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 속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정치를 '위해' 살거나, 정치에 '의해' 살거나 다. 둘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정치를 자신의 삶으로' 삼는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의 소유 그 자체를 즐기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대한 봉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식에서 정신적인 자부심을 느낀다. 정치에 '의해' 사는 사람은 정치를 지속적인 수입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정치가 가져다줄 수 있는 수입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노동력과 사고를 완전히 혹은 거의 수입 획득에 바치지 않고서도 충분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업가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에게는 세 개의 자질이 필요하다. 정열, 책임감, 목측 능력이다. 정열이란 '대의'에 대한 정열적인 헌신을 말한다. 만일 '대의'에 헌신하는 것으로서의 정열이 또한 바로 이 대의에 대한 책임도 행위의 결정적인 인도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러한 정열은 사람을 정치가로 만들지 못한다. 목측 능력은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물과 인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거리 상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정치가에게는 큰 죄 중 하나다. 그것은 정치의 원동력은 오직 정열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정치가는 매일 매 순간 세속적인 허영심과 싸워나가야 한다. 권력 추구가 전적으로 '대의'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잃고서 순전히 개인적인 자기도취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그의 직업의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죄악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 어려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구분이었다. 사제는 <악에는 힘으로 대항하지 말라>라고 얘기하지만 정치가는 <악에는 힘으로 대항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악의 증대에 책임이 있느니라> 얘기한다. 올바르게 행동하고 그 책임은 신에게 돌리는 종교적일 수 있는 '신념윤리'와 달리 정치가는 (예측 가능한)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가 '책임윤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영혼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사람은 이 일을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하지 않는다. 정치는 폭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


  막스 베버보다 더 어려운 역자의 설명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50년도 더 된 강연 속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강연이 오늘에도 회자되는 것은 이 모델은 여전히 현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오늘에도 느낄 수 있다. 그 권력의 칼날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향할지 약한 소시민을 향할지는 정치가의 '윤리'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칼날에 잘려나갈 많은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 의식을 지며 나아갈 수 있는 '신념'이 있는 정치가와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하고', '냉정한' 정치가만 있을 뿐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 '대의'를 가지고 있는 정치가는 있는가? 자신의 '대의'가 정치가의 자질 중 하나인 '목측 능력'에 기반한 것일까? 눈여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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