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바다가 되어
고상만 지음 / 크루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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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를 쇼를 하다가 착지 지점에 있는 새끼 돌고래를 보고 자신의 몸을 뒤틀어 새끼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바꾼 어미 돌고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이담북스의 지원으로 읽어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동물 인권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고 우리나라도 2013년 '제돌이'를 시작으로 '태산이', '복순이', '금등이', '대포'를 제주에 방류하였다. 작가는 뉴스로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단숨에 쓰였지만 10년을 퇴고하며 세상과 만날 준비를 했다고 했다. 슬프지만 너무 아름다웠던 이야기는 토톨님의 너무 예쁜 삽화가 그 감동을 더했다.


엄마의 희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 11살 종안과 돌고래 아토의 이야기.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종안의 아빠와 엄마의 얘기에서 대책 없이 당하고 말았다. (첫 장부터 이러시면 곤란하잖아요) 종안이의 엄마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종안을 낳으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런 엄마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종안은 심장병을 물려받았다. 가장 소중한 두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아빠의 심정에 울컥했다.



뛰지도 못하고 늘 집에만 있는 종안을 위해서 아빠는 동물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돌고래 쇼를 한다길래 너무 신이 난 종안은 아빠를 이끌고 갔다. 기대하지 않은 이벤트에 당첨되어 돌고래와 사진을 찍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때 누가 얘기하는지도 모를 소리를 듣게 된다. 종안은 그 뒤로 돌고래를 한 번만 더 보자고 아빠를 조르지만 동물원을 가고 와서 병원에서 꼬박 이틀을 누워 있던 종안을 생각하면 아빠로서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종안은 아토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주 슬픈 아토의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된다. 종안은 아토가 바다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소원이라며 아빠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말하지 못한다고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 보면 인간은 인간마저도 포로로 잡아와 철장 속에 가두고 구경을 했다. 때로는 서로 싸우게 하고 그 싸움을 즐겼다. 동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동물원에 가두었다. 동물들이 우리 속에서 하는 귀여워 보이는 행동들은 애교가 아니라 자폐 증상이다. 십수 년을 독방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껏 인간을 우월종으로 생각해 온 인간의 모습이다. 영장류 아래 있는 사람족 아래, 사람 속에 속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 있다면 인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원시 부족들에게도 동물과 같은 취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공원의 '태지'라는 늙은 고래는 결국 방류 결정을 하지 않았다. 살아갈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죽기 직전에 병원에 벗어나 고향에 가보고 싶은 인간의 마음처럼 생명이 조금 짧아지더라도 바다에 가보고 싶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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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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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그런 얘기는 늘 듣던 말이었다. 하지만 늘 경제 발전에 그늘 아래 있었고 기술이 발전하면 해결될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안일함이었던 것 같다.


  최근 다시 환경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외치는 분위기다. 선진국들은 내연기관을 내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업들은 ESG를 외치며 화석 연료 산업에서 탈피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후의 대변화를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또 한 번 진화해서 적응해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한 답들 중 하나를 이 책이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수정하지 않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속 가능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이 책은 다다서재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최근에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사회주의'에 대한 얘기들이다. 냉전체제를 눈으로 보아온 입장에서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퍼뜩 생각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만큼 비호감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서 '사회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그만큼 자본주의의 횡포가 심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책은 크게 두 가지를 얘기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자본주의가 왜 지속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이 부분의 내용은 대부분 공감했다. 경제 대공황을 이겨낸 케인스 경제학은 지금의 환경 문제도 같은 해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와 발전이라는 강박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것은 달콤한 유혹이다. 엄청난 투자는 경제의 성장과 동시에 획기적인 기술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환경의 재앙에서 지켜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낙관적인 전망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기술의 발전이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몇몇의 기술자들에게 맡겨두어야 할 것인가? 


  최근에 유행하는 플라스틱 저감 운동처럼 소소한 환경 참여가 유행이다. 그 취지는 아름답지만 그것마저도 자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에코백은 디자인별로 다양하게 출시된다. 재활용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도 한다. 이것을 소위 '그린 위시'라고 말한다. 환경을 위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신의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준다. 환경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이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재활용이나 친환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더 적게 만들고 더 적게 사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본주의의 습성은 탄소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덜 만들게 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으면 바로 죽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약탈의 경제체제이다.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통칭 글로벌 사우스)에서 노동을 약탈했고 지구로부터 자원을 수탈했다. 이런 외부 사회에서 약탈할 수 있는 양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경제를 발전하기 위해서 더 효율적으로 생산해야 했다. 효율적 생산은 일자리를 축소시켰다. 일자리를 축소시키지 않으려면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생산성의 함정이다. 필요하지 않더라도 만들어야 하고 소비되어야 한다. '사용가치'가 없는 물건에도 '가치'를 붙여 소비한다. 생산과 소비가 멈추면 경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의 성장을 상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을까? 반대로 자본주의는 부의 불평등을 가져다주었다. 현재 지구 상의 자본은 10%의 인류가 90%의 부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내뿜는 탄소는 전체의 50%를 넘고 있다. 전체적 부가 늘어나면 낙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는 부의 편중만 가중시켰다. 세계에게 가장 큰 GDP를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 마저도 노숙자와 걸인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은 어떤 과학자도 예측하지 못하며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인스학파의 그 달콤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자본주의에 취해 있다. 현재의 정책으로는 환경파괴를 멈출 수 없으며 탈성장 수준의 멈춤이 필요하다. 이미 재앙을 막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다면 시도해보자. 자본주의로는 '탈성장'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부의 총량의 성장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행복할 정도로의 분배에 초점을 맞춘다면 탈성장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사이토 고헤이는 그 대안으로 마르크스가 말년에 만든 <공, common>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희소성 있게 만들려고 한다. 수력 발전 대신에 석탄을 이용하였으며 마시는 물마저도 상표를 붙여 팔게 되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일터로 가게 되었고 혼자서는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상대에게서 약탈하고 약탈해서 만든 것을 약탈당한 사람에게 되판다. 부의 편중은 그런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common>이라는 개념은 필요하다.


  'common'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를 가리킨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해서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common은 미국형 신자유주의와 소련형 국유화 모두와 대치하는 '제3의 길'을 여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원은 공공재로 묶어 자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최근의 생각들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 개념이 참 좋았다. 기존의 업자들의 거센 반말이 예상되긴 하지만 인간에게 최소한의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 좋았다.


  그 외 대부분의 페이지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책과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많았다. 그만큼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가 깊기도 했고 그것을 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독자에 따라서 지겨운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조금 더 호기심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연대와 사회 운동이었다. 자본주의에 강하게 엮인 정치세력들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자본이 정치를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럽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의 혁명으로 도시 정책을 만든 나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정치가가 아닌 시민에 의한 법률 제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선진 시민의식이라는 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3.5%의 기적>을 얘기하며 희망을 심어주었다. 3.5%의 시민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우물쭈물하던 사람들도 연대하게 되고 결국 사회를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후에 대해서도 아직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시작하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다. 이것을 말미에 적어 둔 것은 나 같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낙관적이지는 않아'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희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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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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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작품을 꺼내 들었다. 너무 쉼 없는 독서를 해서인지 익숙한 글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 정말 좋았었지'라는 기억만 남은 채 책장 한 구석에 꼽혀 있던 이 책에 손이 갔다. 좋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읽는 책은 새로 만난 책들과는 사뭇 다른 감각이 있다.


연애 소설 같은 제목에 전개 또한 그런 식이 었지만 급작스런 반전에 소름을 돋게 해 버린 작품이었다. 왜 이런 느낌을 처음 느껴 본 것 같을까. 분명 읽었던 작품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였는데 작가는 문장으로 나의 마음을 풀게 만들고 마지막에 방심한 나의 마음에 슬픔의 비수를 꼽아버린다.


주인공인 유미코는 어딘가 달관한 모양새로 세상을 피해 최대한 게으르게 살아갈 요량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주 감정적이었던 엄마와 완벽해 보였던 이모가 있었다. 이모의 아들인 쇼이치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모는 그녀를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했지만 어째서인지 지키지 못했다.


그런 유미코에 쇼이치가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펼쳐진다. 마녀 학교를 나온 엄마와 이모였고 엄마는 마법을 이용해서 영혼을 불러 조언을 들으면서 사업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불려 나온 영혼에 의해 그날 그녀의 엄마는 죽음을 맞이했다. 쇼이치는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지키려고 유미코를 방문한다. 유미코의 엄마가 죽음으로써 내린 저주를 풀어주라고 한 것이었다.


쇼이치와 유미코는 엄마와 이모의 흔적을 좇아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의 기억을 다시 맞추어 갔다. 그러면서도 쇼이치에게 기대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흔한 설정이었지만 아픔이 가득한 장소를 찾아가는 그들을 모습을 계속 지켜보게 된다. 이런 설정에서 나도 모르게 경계를 풀었는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아픔이 풀어지고 아빠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유미코는 이상함을 느낀다. 아빠의 무덤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었다. 모든 풍경이 끼워 맞춘 듯 완벽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채 버렸다.


📖 끔찍한 숙취에서 깨어나는 과정은 거의 천국만큼이나 아름답다. 상태가 최악일 때보다는 빠져나올 때가 좋다. 하늘을 바라보다가 살아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저 먼 구름의 자잘한 틈새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역시 살자, 살아 주자고 나는 끈질기게 생각한다.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해피엔딩일 것 같은 결말에서 일어나는 반전이다. 그런 스포일러는 할 수 없으니 이 정도만 얘기해도 그 감동은 반이 되어버릴지 모르겠다. 글을 통해서 완전히 무장해제되었을 때 느끼는 그 섬뜩함은 책을 읽은 지 12시간이 지나 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도 생생하다.


📖 대충 보면 비참한 인생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좋은 기분으로 있다는 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야.


잔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섬뜩했던 소설.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소설 더 추워지기 전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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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 요시모토 바나나의 즐거운 어른 탐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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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서서 불현듯 스친 한 문장 때문에 덥석 사버린 책이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시간, 단숨에 읽어낼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얘기를 조금은 독특함을 입혀 얘기하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책 제목과 다르게 프롤로그에서는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당신 자신이 되세요"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고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데 알맞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살다 보니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다른 아이들이 어른이라고 사회에서는 성인이라고 불러줬을 뿐이 아니었던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낄 뚜렷한 인격적 성장이나 마음의 독립을 나는 언제 느껴 보았던가.라고 생각해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집을 구하고 가정을 꾸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조금은 독립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아도 여전히 얽혀있는 마음이고 인격은 살아도 살아도 늘 부족함이 있다.


어떻게 어른이 되었더라도 어른이 가장 큰 짐은 '책임감'이 생겼다는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보다 그 크기도 무게도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어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감각'이다. 어린 시절에 체험한 감각이나 가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의 중요함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엉엉 우는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요.

애써서 거기에 없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마음속에 공간이 생겨, 자신을 든든하게 붙잡아 주거든요.


작가의 독특한 철학도 인상 깊었는데 재미가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 것이었다. 대신 재미가 있고 가슴이 설레는 일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배워야 하고 더욱이 자신의 미래에 필요한 공부라면,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스스로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도 학업 성취가 인정되지 않는 <자유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다음 날 학교 가는 걸 너무 기대하고 신나 하는 아이의 반응을 보면서 이게 또 정답은 아닐까 하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


📖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껏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이 미래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보면 오히려 철없음을 느낄만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른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중요하다. 사실 어른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행동이 어른이 되어가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한다.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이 있지만 내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날은 오늘 밖에 없다는 얘기가 있듯 오늘을 한 껏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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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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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드디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우울함이 길지 않은 글임에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 소설과 다자이 오사무는 정말 이 시대의 갈 길을 잃은 청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을까?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요조>의 세 개의 수기로 이뤄진 이 책은 유복한 환경에 있었던 주인공이 왜 그렇게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적어내고 있다.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비관적인 인물이었을까. 엄격한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내면의 자신을 숨기고 살았고 집으로 분리되면서 내면의 외형 화가 이루어진 것인가.


  <불안한 청춘의 통과 의례와도 같은 소설>이라는 카피가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지금의 청춘들은 이런 '페르소나'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일까. 왜 그들은 이 소설에 열광할까. 작가가 금수저를 포기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더 공감이 많이 갔을까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작가의 일생과 작품 속의 <요조>는 같은 듯 다른 존재이다. 그 사실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품 설명에서 알 수 있었다. 작가의 삶을 알고 나서 읽으면 더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도 그중에 하나인 것 같았다.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 <요조> 은 왜 이렇게 비관적이고 자기 경멸이 심할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의 자기 경멸은 왜 생겼을까? 그런 일련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책을 읽어 나가니 난봉꾼에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즉 <인간 실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은 문체 무난한 전개로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싶었다. 그러나 제목에 그야말로 걸맞은 주인공 <요조>였다.


  다자이 오사무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인간 실격>은 그야말로 다자이 오사무의 삶 그 자체였다. 주인공 <요조>가 인간과의 관계를 어려워했던 것은 자신 이외의 것에는 관심도 없고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성격에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런 두려움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귀족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낮추어 평민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은 존경받아야 하는가?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와 같이 스스로를 역경 속에 집어던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왜 다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버리고 나의 죄책감을 벗어던지려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가 나는 그 부분에서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 가장 마지막에 읽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냐면 이 책은 그의 삶이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위의 추천으로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급히 집어 들었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그의 이 전 작품을 충분히 이해한 후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고뇌와 파멸, '어떻게 죽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조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작품을 읽은 후 다시 이 책을 리뷰해야 할 것 같다. 작품 설명은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에게 공감을 논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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