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폭풍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2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랑스 작가. 유대인이었기에 겪었을 핍박과 결국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생애는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작가는 원고가 든 가방을 출판사에 맡겼고 그녀의 딸들은 그것을 지켜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작품은 빛을 보게 된다.

  전쟁 속에 마주하는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레모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전란에 대한 얘기다. 프랑스 파리로 들여 닥치기 직전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전쟁이라는 것의 위기감과 함께 그 속의 사람의 심리를 묘사한다. 그렇게 많은 세월의 간극을 두고 있지 않은 양차 세계대전은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이와 처음 전쟁을 겪은 이의 반응 차이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파리에 살고 있는 부르주아들의 피난 모습은 어떨까?

  그냥 소설을 대하듯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읽어도 스토리 라인을 잡을 수 없었다. 잔인하고 참혹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물론 다른 경험들이 포개져 그럴 수 있겠지만 작품은 그렇게까지 부산스럽지 않은 피난 준비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귀족들, 뻔뻔하고 의리 없는 부자들의 모습이 웃기게 다가올 수 있지만 되려 그들의 모습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굉장히 부산스러울 것 같은 곳의 모습은 절제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비춘다. 마치 한 편의 르포를 보는 듯하다.

  문자로 구성된 이야기지만 '영상미'가 좋다고 리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그들의 상황과 심리가 머릿속에 팍 하고 나타날 정도랄까.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어느 한쪽을 비추고 내레이션 한 뒤 바로 다른 쪽을 비춘다. 그리고 곧바로 내레이션이 따라붙는 기분이 든다. 작품은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닌 그 하나로 뭉쳐진 이야기다.

  피난길에서도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 기밀문서를 흘리며 허겁지겁 도망가는 정치인들. 휴전이라는 단어에 바로 적군과 놀아나는 여성들. 그 속에서 영웅을 찾아내기 바쁘겠지. 위선과 파렴치함이 남겨진 풍경들이 있다. 죽는 순간까지 체통을 잃지 않으려는 부자와 결국은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의 모습도 있다. 누군가는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 헤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그 전쟁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고 몇몇에게 다시 돌려준다. 그것은 불공평함이 아닌 슬픔이다. 행운으로 표현하기에는 전쟁은 너무 참혹하다. 

  전쟁의 어떤 판단도 없이 전쟁 그 자체를 묘사하는 작품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강이 이렇게 들떠 있는 듯한 통통 튀는 사람이었던가?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분명 읽은 듯한 책은 꽤나 진중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책을 찾아보니 '비강'이었다. '델핀 드 비강'. 처음부터 오해하고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책 제목뿐이었기에 갑작스레 다가온 그녀의 에세이는 시종 되게 물음표를 달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해하고 있었으니 더 멘붕이다.

  작가가 49세에 쓴 자신의 에세이인 이 책은 소담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 책을 보고 있자니 오해하고 있던 이미지와 사뭇 달라서 잠깐 놀랬다. (지금은 꽤 어울린다) 19세의 혜성처럼 나타나 어린 시절에 이미 부와 명예를 가졌던 그녀에게는 꽤나 독특한 취미가 있었다. 그런 취미들이 작품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스타일을 이해하기에는 꽤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굉장히 격렬하고 위험해 보이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인 듯한 그녀는 그동안 구설수에 올랐던 여러 얘기들을 한다. 세간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은 취미 같지만 그녀의 당돌함 때문인지 시종 일관되게 흥분되어 있는 듯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도박이나 스피드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그리고 해보고 싶은 일들에 대한 거침없는 열정도 그랬다. 그녀의 사랑도 그랬으리라 예상해 본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 여성들이 환호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포커페이스처럼 도박에서 잃어도 동요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모든 일에 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중심에 서 있는 사람과도 빠르게 친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듯한 그녀다. 

  그런 분위기는 샤르르트와의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뭔가 진중해진다는 느낌이랄까. 소중한 것을 아끼는 듯한 기분이랄까. 아무리 활기 넘치는 사람이라도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룰 때에는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독서에는 완벽히 작가로 돌아와 있다. 천방지축 같았던 작가가 보여주는 작가로서의 멋스러움이 한 챕터에 담겨 있다. 마치 나 작가 맞다니까라고 얘기하는 것 같인 기분이다.

  사실 작가의 작품 세계에 동화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에세이가 확 다가오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두 개의 챕터에서 그녀의 글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러니까 작가를 동경해 에세이를 읽는 게 아니라 에세이를 읽다 보니 작품이 궁금해진 경우랄까.

  자존감 넘치는 글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다. 기운 빠지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보다 작품 속의 주인공의 운명이 더 궁금하다고 얘기하는 그녀는 역시 세계가 사랑하는 작가가 맞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니에르 드 부아르 13호 Maniere de voir 2023 - 언어는 권력이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 Maniere de voir 13
필리프 데캉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글은 1443년 만들어지고 1446년 반포되었다. 언어학자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다. 하지만 많은 양반들은 한글을 천한 것으로 여겼다. 진즉에 있어야 할 우리말 대사전은 일제 강점기가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그 사이 새로운 것들은 모두 외국어를 한글로 대체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글이 우수하다며 국뽕이 차 있으면서도 우리말의 폭을 넓힐 생각은 도무지 없는 듯하다.

  언어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지 언어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이 글들은 르몽드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지난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우리말을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설픈 영어로 굳이 연설을 했다. 통역도 있었는데 왜? 이것이야 말로 지금 한글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방송에는 보여주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반은 영어를 쓰고 있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한글은 조사뿐이다.  젊은이들이 한글 파괴한다고 하지만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글을 아예 없애버릴 생각인 것 같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최대의 발명품이다.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지식은 쌓였다. 강대국의 언어는 작은 나라의 언어를 소멸시켰다. 그 방법이 강압적일 수도 자연적일 수도 있다. 언어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쓰는 이들이 사라지면 함께 사리지게 되는 것이다. 제국은 늘 바벨탑을 짓는 모습을 상상한다. 제국 내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를 써야 한다. 그것이 민족이다.

  아자 가트의 <민족>을 읽어보면 민족을 가르거나 융합하는데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라는 언어권에 따라 분리주의를 요청할 수 있다. 각 나라가 자신의 언어를 지키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용적인 면만을 내세우는 것은 결국 속국으로 흡수되는 길이다. 부산을 영어 상용화 도시로 만들겠다는 박형준 부산 시장의 공약에 헛웃음이 나온다. 여긴 미국이 아니다.

  언어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AI가 될 수 있다. 물론 방대한 데이터가 쌓여 언어끼리 직접 번역, 통역해 준다면 말이다. 지금은 영어를 거쳐 작업되기에 완벽하지 못하다. 그런 때가 오면 소수 민족의 언어가 견디기 훨씬 수월할 것이며 실용적인 면으로 압박하는 일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단지, 상대가 나의 언어로 말을 걸어올 때와 상대가 내가 말한 말을 알아들을 때와 같은 짜릿함은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자신의 언어로 생활할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그리고 언어에는 문화가 녹아 있다. 그리고 상대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전부 영어, 영어, 영어에 미쳐있다. 다른 언어학과들이 폐과를 할 정도로 영어에만 매진한다. 정말 실용적인 일일까? K-문화가 세계에 퍼져 나갈 때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모른다면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경제의 숫자 놀음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언어와 문화 같은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힘을 길러야 한다. 언어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3.11 202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브누아 브레빌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르몽드 11월호는 파시즘이 고개를 드는 세계 정치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및 세계정세를 살펴볼 수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언론은 이에 반응하지 않는다.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동조의 목소리만 큰 것은 그들이 기득권이기 때문일까, 대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이 사라졌음일까, 권력에 굴복했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관심일까. 극우는 권력을 이용해 어느새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며 정상인들을 극좌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훼손된 다양성과 미국 권력의 약화와 신흥국의 약진 그리고 한국의 위태로움에 대해 설명하는 르몽드 11월호는 르몽드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르몽드는 세계를 주시하긴 하지만 많은 프랑스에 관련한 지면이 많다. 프랑스 잡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글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키워드와 문장은 우리나라 기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세계는 지금 급격하게 보수화 되어가고 있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힘은 어느새 국가 단위로 번져버린 것 같다. 언론과 정치인이 언급하는 이방인은 '난민' 정도다. 이민에 대해서는 이보다 차별적일 수 없다. 

  집단 지성이라는 상징을 가진 단어 'Wiki'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의도와 목적으로 운영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그리고 권력 저항의 '위키리크스'가 그렇다. 하지만 얼마 전 등장한 김행 장관 후보자의 위키트리는 한국에서의 Wiki를 기이하고, 저속하고, 선정적이고, 인신공격하는 것으로 비틀어 버렸다. 전혀 Wiki적이지 않은 것으로 지극히 상업적으로 운영하여 큰돈을 벌었다. Wiki라는 이름이 혐오 장사에 쓰인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파시즘 하면 히틀러가 바로 생각난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꽤나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시즘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고 영웅주의와 같은 형태로 미화되고 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하나의 정치적 형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어떻게 보면 질서를 미끼로 강력하게 압박하는 경찰 권력도 상대를 지정해 놓고 마구잡이로 상대를 털어대는 검찰도 모두 파시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는 어느새 '폭력에 대한 변명'을 자연스레 이해하고 그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파시즘은 어느새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망각이라는 것 자체도 권력이다. 모순되지만 겪지 않은 사람만이 휘두르는 권력이다. 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만이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잊지 말아 달라는 호소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문제다. 노란 리본은 벌써 몇 년째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고 얼마 전 일주기를 맞은 이태원의 영혼들도 잊히지 않길 기원해 본다. 망각이 권력이라면 기억은 권리다.

  이번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하마스가 미사일 테러로 민간인을 사상자가 나왔다는 점에 분명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사법 개혁을 강행하려다가 국내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매주 극렬한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6월에는 정부에 맞서는 군인을 러시아 민간군사조직 바그너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테러가 일어났다. 그 많은 재래식 무기를 첩보의 고수인 이스라엘과 미국이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으려고 함에 위기를 느낀 하마스가 테러를 감행했고 네타냐후는 국내 정세를 진정시켰고 하마스는 이슬람 국가의 단결을 이뤄냈다. 고통받은 건 민간인뿐이다. 슬픈 일이다.

  세계 정세의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부상도 신흥국의 약진도 아니다. 바로 미국의 쇠퇴다. 이제는 냉전시대처럼 이념으로 나뉘어 끈끈하게 모이는 시대가 아니다. 미국이 가하는 제재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나라와 더불어 유럽의 느슨한 반응으로 더 이상 큰 힘을 쓰지 못한다. 이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시대다. 기니에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

  기니에는 많은 자원이 있고 미국이 제재해도 러시아와 중국이 이득을 챙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제 제재도 러시아의 엄청난 천연자연으로 득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세계가 엮인 지금의 시대에 무역제재는 양날의 검이다. 미중 갈등이 있지만 두 나라는 역대 최고의 무역량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권만이 이념에 사로잡혀 행동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이제 더 이상 러시아 침략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러시아로부터 자원을 싸게 구입해야 하는 나라들에게는 그들의 전쟁은 양쪽 다 이유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어설픈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을 노리는 것이겠지만 그것에 대한 확실함은 없다. 되려 러시아의 무기가 북한으로 전달되는 명분만 줬다. 

  국제 사회는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에 엮여 있다. 외교는 어쩌면 외줄 타기처럼 섬세해야 한다. 전략도 기술도 없어 보이는 지금의 정권이 나라를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지 않을까 매일이 조마조마할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을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남들 : 우리는 매일 다시 만난다
앤디 필드 지음, 임승현 옮김 / 필로우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은 숨을 곳이 없을 만큼 촘촘히 연결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고독하다. 모두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홀로 있다. 외로움은 뉴노멀이 되어 가고 철저하게 개인화되어 간다. 적은 정보에 의한 연결에서 공감과 유대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낯선 만남을 가져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낯썸이 가져다주는 것들에 대한 얘기는 필로우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글은 시작한다. 모든 일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리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특별함을 혹은 새로움을 느낄 순 없을까? 

  길을 묻는 일도 택시 기사와 얘기를 나누는 것도 낯썸이다. 미용실에서는 낯선 이에게 온전이 자신을 내맡기기도 한다. 공원에서 영화관에서 그렇게 낯썸이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낯선 것을 방해로 여기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험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인터넷의 보급과 통화 그리고 화상통화는 낯썸에게서 회피하게 해 준다. 자동차 또한 개인적 고립을 하게 해 준다. 그리고 많은 장소들이 사라져 간다. 그 순서는 소수 이용자들이 이용하는 장소들부터 사라진다. 연결마저도 공평하지 못하다.

  소프트웨어에 의해 선택되는 정보를 소비하고 공공의 장소에서는 낯썸에 적개심을 품으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낯썸이 익숙하지 않기에 타인은 점점 더 먼 타자가 되어 간다. 인간 연대의 끈이 더 얇아지고 있는 건 어쩌면 기술의 발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화상으로 만나는 수많은 타자에게서 우리는 낯썸을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연대의 끈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시각과 청각으로 집중된 감각의 피로로 오히려 부작용만 생기지 않을까? 수많은 온라인 모임이 결국 오프라인 모음으로 이어지는 건 오감에 의한 제대로 된 감각의 공유가 있을 때 비로소 연결됨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타자와 연결에서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로봇과의 만남에도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것보다 손을 잡는 행위로 인해 더 빠르게 친밀감을 느낀다. 우리에겐 조금 더 잦은 낯썸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연결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런 행동들이 이제는 용기마저 필요한 행위가 되어 버렸지만 인류가 공동체로서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