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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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올해 결국 막스 베버까지 도달하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베버는 자신의 강의를 통해서 어떻게 정치에 개입해야 하는지 답을 찾고자 했다. 그 두 번의 강연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유시민 작가의 '자신은 책임질 수 없기에,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이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일은 꽤 괜찮은 정치 구조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를 알고 싶어 집어 들었지만 막상 머릿속을 헤매었던 쉽지 않았던 책. 한 번 읽고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첫 번째 후기를 남겨 본다.


  국가란 역사적으로 그에 선행하는 정치단체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이라는 수단에 근거를 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다.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이 그때그때의 지배자들이 요구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의 내적인 정당성의 근거가 필요하다.


  그 정당성에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관습이다. '영원한 어제의 것'의 권위. 이것은 구식의 가부장과 세습 군주가 행한 '전통적인' 지배다. 두 번째는 천부적 자질(카리스마)의 권위다. 어떤 개인의 계시, 영웅적인 정신 그 밖의 지도자적 특성에 대한 완전히 인격적인 헌신 및 신뢰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투표에 의한 지배자, 위대한 민중 선동가나 정당 지도자가 행사하는 '카리스마적' 지배다. 마지막으로는 '합법성'에 의한 지배다. 법률상의 규정의 타당성과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통해 근거가 부여된 사실상의 '권한'에 의한 지배인데, 이것은 근대의 '공복'과 그와 유사한 모든 권력 소유자가 행사하는 지배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 속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정치를 '위해' 살거나, 정치에 '의해' 살거나 다. 둘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정치를 자신의 삶으로' 삼는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의 소유 그 자체를 즐기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대한 봉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식에서 정신적인 자부심을 느낀다. 정치에 '의해' 사는 사람은 정치를 지속적인 수입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를 '위해' 살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정치가 가져다줄 수 있는 수입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노동력과 사고를 완전히 혹은 거의 수입 획득에 바치지 않고서도 충분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업가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에게는 세 개의 자질이 필요하다. 정열, 책임감, 목측 능력이다. 정열이란 '대의'에 대한 정열적인 헌신을 말한다. 만일 '대의'에 헌신하는 것으로서의 정열이 또한 바로 이 대의에 대한 책임도 행위의 결정적인 인도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러한 정열은 사람을 정치가로 만들지 못한다. 목측 능력은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물과 인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거리 상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정치가에게는 큰 죄 중 하나다. 그것은 정치의 원동력은 오직 정열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정치가는 매일 매 순간 세속적인 허영심과 싸워나가야 한다. 권력 추구가 전적으로 '대의'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잃고서 순전히 개인적인 자기도취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그의 직업의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죄악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 어려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구분이었다. 사제는 <악에는 힘으로 대항하지 말라>라고 얘기하지만 정치가는 <악에는 힘으로 대항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악의 증대에 책임이 있느니라> 얘기한다. 올바르게 행동하고 그 책임은 신에게 돌리는 종교적일 수 있는 '신념윤리'와 달리 정치가는 (예측 가능한)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가 '책임윤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영혼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사람은 이 일을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하지 않는다. 정치는 폭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


  막스 베버보다 더 어려운 역자의 설명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50년도 더 된 강연 속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강연이 오늘에도 회자되는 것은 이 모델은 여전히 현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오늘에도 느낄 수 있다. 그 권력의 칼날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향할지 약한 소시민을 향할지는 정치가의 '윤리'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칼날에 잘려나갈 많은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 의식을 지며 나아갈 수 있는 '신념'이 있는 정치가와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하고', '냉정한' 정치가만 있을 뿐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 '대의'를 가지고 있는 정치가는 있는가? 자신의 '대의'가 정치가의 자질 중 하나인 '목측 능력'에 기반한 것일까? 눈여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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