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깨달음은 없다
U.G.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훈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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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無我 체험이네요
유식에서 말하는 나다 하는 말라식이라는 자아의식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불교 4단계중 첫단계인 수다원과입니다
붓다가 사기꾼이 아니고
無我는 힌두교나 모든 종교가 받이들일 수 없는 체험입니다
붓다가 가장 염려한 것은 이런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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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幻과 실재 - 스리 란지트 마하라지와의 대담 마하라지 전서 4
스리 란지트 마하라지 지음, 대성 옮김 / 탐구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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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라지 같은 분을 불교에서는 空病에 빠졌다고 합니다
마하라지처럼 삶을 버리고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붓다가 말한 無常과 無我가 아닙니다

여래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상윳따 니까야 꽃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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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2023-03-2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스스로 깨치고 말을 얹는게 좋을듯 합니다. 말로 백날 평가질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gudrl32 2024-05-2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테러는 아닌듯합니다
부처님이 이런식으로 행하라고 가르치지않았을텐데요
 

힌두교를 대표하는 사상이라면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영원한 실재가 있다고 하는 常見

마하라지처럼 이세상이 환이라고 하는 斷見이 있습니다

이런 상견과 단견을 버린 것이 중도이고 이것이

인류 역사의 모든 종교나 사상에서 불교에만 있는

붓다가 말한 無我입니다 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無我은 자칫하면 斷滅論인 허무주의인

斷見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緣起法으로서의 무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마하라지처럼

이세상이 버려야만 하는 이 아닙니다

힌두교나 마하라지처럼 환인 이 세상을 떠난

실재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환과 실재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연기법입니다

마하라지가 이세상은 환이요 이세상을 떠난 실재가 따로 있다고 하듯이

이처럼 연기법을 모르면 상견이나 단견에 빠지게 됩니다

상견과 단견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희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힌두교나 마하라지는 동전의 한면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실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환도 아니요

이 세상을 떠난 실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재에서 환인 이세상이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은 실재의 그림자도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법으로서의 無常이고 無我이지

마하라지처럼 세상이 환이라는 단멸로서의 세상이나

나의 존재성마저 거부하는 단멸로서의 無我가 아닙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나와 세상이 환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지만

불교는 나와 세상이 연기법으로의 환이라면 힌두교는 단멸로서의 환입니다

연기법인 의타기성으로 이루어진 나와 세상이기에

나와 이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와 단멸을 떠난 중도이고

중도인 의타기성의 연기법에서는 환이나 실재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이처럼 실재가 따로 있다는 상견이나

나와 세상이 환이라는 단멸의 단견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붓다나 용수가 가장 경계한 것이 無我나 空을 잘못 받아들여

이 세상을 환이라며 벗어나려 하거나 부정하는 허무주의입니다

화면이 없으면 스크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불교는

상견에서 벗어났기에

기독교의 역사와 작금의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광기에서 벗어났고

단견에서 벗어났기에 세상을 우울하게 사는 우울증과

우울증에 벗어나기 위해 쾌락에 빠저 막행막식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이 세상이 환이라며 실재를 찾는 헛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무아가 단멸의 무아에 이르게 되고 환이라고 세상을 부정하게 됩니다 

무아이기에 세상에 안주하거나 생사를 여의였고

이 세상을 벗어난 실재나 천국을 추구하며 영생을 꿈꾸는 허황된 내가 없게 됩니다

상견은 광기이고 단견은 허무입니다

나와 세상이 인연따라 있고 인연따라 사라지기에 

있다고 집착할 것도 없지만 환이라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연기법에서는 무아이기에 모두가 나인 것입니다

모두이기에 집착할 것도 없지만 모두는 버릴 수도 달리 갈 데가 없습니다

 

집착하는 삶이 중생이라면

마하라지처럼 삶마저 버리면 귀신이 됩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귀신굴이 실재입니다

집착없는 삶이 중도입니다

집착과 단멸을 벗어난 것을 금강경에서 명쾌하게 표현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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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넘어서 -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와의 대담 마하라지 전서 2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지음, 진 던 외 엮음, 대성 옮김 / 탐구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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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은 無我입니다
空이라고도 합니다
마하라지는 현대의 붓다이고
마하라지의 모든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無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자 유일한 장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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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넘어서 -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와의 대담 마하라지 전서 2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지음, 진 던 외 엮음, 대성 옮김 / 탐구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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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존재감이고 이 존재감이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식 없이는 의식을 넘어 설 수 없지만

의식이야 말로 의식을 넘어서는데 최대의 장애물이라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마하르쉬나 마하라지 모두 깨닫음에 이를 때

죽음을 체험 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자아의식의 죽음이 진리에 바치는 공물입니다

현대인의 지나친 자아의식은 세월이 지날수록 괴물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진리가 환영의 공물이 된지 오래입니다

마하라지가 지적한데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사람은 삶의 고통과 내가 죽는 죽음을 맛보는 자입니다

결국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는 자이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 죽어야 다시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자이고 짐을 내려놓는 축복이 됩니다

존재감인 내가 있다는 의식이 붓다가 통찰한 근본무명이고 無明이 사라진 상태가 無我입니다

존재감인 내가있다는 의식이라는 불이 꺼진 상태

이것이 의식 너머에 있는 니르바나인 열반이고 해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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