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원각경강의
남회근 지음, 송찬문 옮김 / 마하연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도올 김용옥 박사학위가 많고 지식이 많아 오히려 지식에 갇힌 것처럼 이분의 저작들을 보면 학자의 안목일 뿐이네요 오조의 제자 신수를 보는 듯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수행법 강의 남회근 저작선 2
남회근 지음, 신원봉 옮김 / 부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튜부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님의 강의를 듣고 이런 책들을 보며 느낀 것은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는 마구니 소리만 나온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유교 도교 불교 마구 섞어서 안목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한 것 같지만 불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온통 헛소리입니다 이런 것을 외도라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구경과 바가바드 기타 - 불교와 요가의 향기로운 만남
정태혁 지음 / 정신세계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불교는 중도입니다

유물론 같은 허무의 단멸을 斷見이라 하고 

신이나 영혼과 같은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상주론을 常見이라 하여

단견과 상견 양 극단을 초월한 것이 중도입니다

이에 대한 실상이 연기법입니다

 

힌두교의 크리슈나는 상주론을 대표하는 신으로 부처님께서도 외도라고 배격하신 것입니다

중도는 양 극단을 버린 것이지

이처럼 힌두교와 불교를 비비는 것은 개밥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놓고 판매하는 것입니다

개밥이나 꿀꿀이 죽은 개나 돼지가 먹는 것이지 사람이 잘못 먹으면 체하거나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저자분들과 같은 개밥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한국불교를 힌두교로 만들려는 힌두교인들을

불교는 왜 침묵만 하는지 모르겠네요

힌두교와 불교로 개밥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고 자기가 맛있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먹으라고 다그치는  스님들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icmm 2022-10-0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노력을 해오신듯 한데 아직도 중도 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고, 불교, 힌두교, 부처, 크리슈나 라는 허상에 집착하는 분이 있네요. 에고는 자기의 바탕을 잃어갈수록 거부와 발악이 점점 강렬해지고 정교해집니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U.G.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훈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지의 無我체험은
벼락을 맞는 것처럼 특이한 경우이기에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행력이 없는 無我체험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벼락을 맞을 확률은 거의 없기에 벼락맞은 유지는 길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지는 불교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지
불교에 사마타라는 선정수행에 멸진정이 있습니다
유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경지입니다
멸진정은 붓다가 여타의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과 다른 차원입니다
멸진정을 인정하는 것은 힌두교 뿐만 아니고 무슨 종교 교리가 되었든 통채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없고 길도 없다는 것은
유지가 얼마나 힌두교에 매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힌두교를 포맷한 것이 불교이고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無我입니다

 

無我체험에 의해서 유지의 골수에 밖혀있는 힌두교가 포맷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도 없고 길도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힌두교든 기독교든 이처럼 벼락맞기 전에는 無我를 받아들이기도 어렵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지처럼 힌두교및 여타 종교교리가 골수에 박혀 있지 않으면 벼락맞지 않아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無我체험이 이토록 강력하게 다가온 것은 유지의 머리가 그만큼 꽉 차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기독교인은 한번의 벼락으로는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벼락으로도 안될 것 같습니다

 

 

사마타라는 선정수행을 통해 생각이나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無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사를 해결한 것이 無我입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했는데 다른 할 일이 또 남았는지요
이를 일러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란 더이상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이상 무엇을 할 내가 없기에 無我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우 2019-07-1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無我인 그대는 누규?

순수의식 2020-04-29 06:55   좋아요 0 | URL
비꼬는 말투지만 누규?하는 그것입니다
거기는 부처 할애비도 하나님 할애비도
알 수 없는 자리죠
 
그런 깨달음은 없다
U.G.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훈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카라등 인도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영적 스승들이 나왔지만
無我는 힌두교 뿐만 아니고 모든 종교와 그 어떤 사상체계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無我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종교가 되었든 자기 종교를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불교의 無我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것이 불교 이후 힌두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드디어 유지에 의해서 그나마 불교의 진수인 無我 체험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나왔네요


불교의 無我는 영적인 성숙이 없는 사람은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도 無我를 잘못 받아들여 허무주의에 빠져 집단 자살한 실례가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염려하는 것이고 이것을 斷見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허무주의입니다

유지나 이책을 읽는 독자분들에게도 이것이 가장 염려됩니다

유지의 말대로 無我 체험은 핵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힌두교를 비롯해 영생한다는 신을 믿는 종교를 常見이라 하고

란지트 마하라지나 유지 크리슈나 무르티 같은 허무에 빠진 사람을 斷見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세상이 영원하다 것이 常見이고

이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斷見입니다

이 常見과 斷見을 버린 것이 中道이고 그것이 진정한 無我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죽는 체험이 초기 불교의 4단계중 1단계인 수다원과입니다

불교의 초보따지를 떼었다는 것입니다

유지는 불교의 초보딱지를 뗀 것입니다

無我를 맛만 본 것인데

붓다를 사기꾼이라고 하니

斷見에 빠진 반증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깨지는 영생이라는 常見

죽음으로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斷見

이 두 극단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영생은 내가 죽어야 됩니다

나의 죽음이 영생입니다

이것이 常見과 斷見을 버린 中道인

無我입니다

 

나다 내것이다 이런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살면서 죽은 사람이 無我이고 아라한이고 니르바나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영생이라는 믿음을 꿈꾸지만

살면서 죽는 길이 불교입니다

붓다는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입니다

 

불교는 형이상학이 아니고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생사문제는 해결할 수 있고 그 길이 불교입니다

생사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無我입니다

생사문제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 종지부를 찍고

할일을 다 해 마쳤으며 더이상 할 내가 없기에 無我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중한디?  무엇이 중요하냐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