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우리의 "세계 내 존재"에서, 사르트르가 표현했듯, "무시당하는 것" "침묵 아래 간과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두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몸은 나의 자아를 이루는 일부이면서도 저 밖 어딘가에 있다. 세계라는 공간의 그 어딘가에 있으면서 자아의 투사를 이루기 위해 "부정되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있으면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내가 앞서 설명했듯, 다른 것, 외부세계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낯설기만 한 몸을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야 비로소 의식한다(이를테면 과학 공부를 통해 몸의 기능을 알게 되면서 말이다). 혹은 몸이 우리에게 부담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는다. 왜 흔히 고통 때문에 "껍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말을 쓰지 않던가. 건강할 때는 의식하지 않던 몸이 조금만 아프면 거추장스럽고 빠져나가고 싶기만 한 것이다. 그만큼 몸은 적대적인 것인 동시에 내 것이다. 벗어던지고만 싶은 껍데기는 여전히 우리의 일부, 즉 나라는 ‘자아‘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몸으로 세상을 겪는 동안만큼은 몸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높이 뛰어오를 때, 몸은 공기이자 날아오름이다. 스키를 타고 신나게 활강할 때면, 몸은 휘날리는 눈보라이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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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에셰크‘의 위협을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쪽은 내가 ‘수험생 상황‘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리라. 구두 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수험생 쪽에서는 피할 길이 없으며, 시험관은 자비라고는 모른다. 어디 한 번 번역을 해보시오! 횔덜린의 이 시 구절을 해석해보시오. 방정식을 풀어보시오. 할 수 있다면, 하면 그만이다. 할 수 없는 사람은 떨어진다. 끝 모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다. 수험생은 입을 쩍 벌린 심연 위에서 간신히 밧줄에 매달린 채 떨고있을 따름이다. 밧줄이 언제 끊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떨어진 수험생은 자신 앞에 다가오는 게 무엇인지 팔짱 끼고 구경해야만 한다. 부모도 친구도 다 소용없다. 물론 이들은 이해한다고 말한다. 다 알고 있노라고 다독이려 한다. 안다고? 무엇을? 지독한 쓰라림 속에서 ‘에셰크‘를 삭혀야 하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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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쓸쓸히 웃으셨다. 그러고는 잠시 후,
"울고 싶어도, 이젠 눈물이 안 나."
나는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이런 게 행복감이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거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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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살아가야만 한다. 아직 어린애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응석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싸워 나가야만 한다. 아아, 어머니처럼 남들과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아름답고 슬프게 생애를 마감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어머니가 마지막이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죽어 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새끼를 배고 구멍을파는 뱀의 모습을, 나는 다다미 위에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내가 끝내 단념하지 못하는 게 있다. 천박해 보인들 상관없어.
나는 살아남아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련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나의 로맨티시즘과 감상 따위는 점차 사라지고 어쩐지 나 자신이 방심할 수 없는 교활한 생물로 변해 가는 기분이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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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나오지는 괜찮아요. 나오지 같은 악당은 웬만해선 안 죽어도, 죽는 사람은 으레 얌전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죠 나오지는 몽둥이로 패도 안 죽어요."
어머니는 웃으며,
"그럼 가즈코는 일찍 죽으려나?" 하고 나를 놀린다.
"어머, 어째서요? 난 악당보다 한 수 위니까 여든까지는 거든해요."
"그래? 그럼 엄마는 아흔까지는 거뜬하겠어."
"네." 하다 말고 조금 난처해졌다. 악당은 오래 산다. 아름다운 사람은 일찍 죽는다. 어머니는 고우시다. 하지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짓궂어요!"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눈물이 넘쳐흘렀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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