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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있었던 곳
정찬 지음 / 말하는나무 / 2026년 5월
평점 :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도서협찬]
《그들이 있었던 곳》 | 정찬 장편소설 | 말하는 나무
북동 180번지 큰길. 시민과 학생을 향해 시작된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폭력들은 너무 구체적이라 소설로 읽히지 않는다. 공수대원들을 피해 숨어든 학생을 장롱에 숨겨준 할머니의 머리를 가격하고, 양복점에 숨어든 학생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더니 뜨거운 다리미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친 후 도로에 팽개치는 잔악한 만행들. 머리를 가격하고, 반항하면 대검으로 찌르는 이 장면들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의 현실이었다. 그 무서운 총검 앞에서도 시위는 꺼질 듯하다 다시 살아나는 불꽃처럼 게릴라식으로 이어졌다. 자정이 지나도록 공수대원들은 시위대 색출로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고, 이날 공수부대의 작전 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고 한다.
정찬의 장편소설 《그들이 있었던 곳》은 5·18 민주화운동의 모든 것을 시간순으로, 또 다양한 관점별로 잘 포착하고 있다는 게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소설은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강도 높은 폭동 진압 훈련으로 피로에 지쳐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학생 시위대'에 대한 분노를 키워간 계엄군 병사들의 시선부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도예섭 신부, 운전기사들의 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까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났다고 아쉬워하는 병사들이 적잖았다. 그들의 폭력은 허락된 카니발로, 오랫동안 훈련의 고통을 견뎌온 그들로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다." (p.38)
전쟁터와 다름없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대열에서 이탈한 계엄군 강선우와 피범벅이 된 시민군 박태민이 맞닥뜨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어째서인지 박태민의 눈에는 강선우에 대한 경멸이 없다. 여긴 위험하니 돌아가라 속삭이는 그의 말을 강선우는 어쩐지 거역할 수 없다. 국가의 명령에 떠밀려, 혹은 '폭도'라는 프레임에 눈이 멀어 분노에 휩싸였던 병사들 역시 한걸음 물러서서 전체적인 맥락을 바라본다면 결국 또 다른 피해자의 자리에 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소설은 광주가 완전히 외딴섬이 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언론을 통제하고 거짓 뉴스를 퍼 나르게 한 신군부의 유도대로 시민군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신경전과 분열까지 확대해서 들여다본다. 총을 반납해야 한다는 대학생 중심의 수습위원회와 이에 반대하는 항쟁파의 대립 속에서 시민군 박태민은 이렇게 말한다.
"계엄군이 들이닥친 오월 십팔일부터 해방광주가 이룩된 이십일일까지 우리는 이상한 세계에 있었습니다. 이상하다는 것은, 계엄군과 광주 시민 어느 한쪽은 반드시 짐승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 계엄군이 인간이었다면 우리는 짐승이었습니다. 계엄군 역시 우리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 광주 시민들을 악착같이 짐승으로 생각하려 했겠지요." (p.168)
박태민은 무기를 반납하는 것이 피 흘리며 죽어간 광주 시민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등불을 스스로 끄는 일이라고 외친다. 예전 같았으면 이 말이 조금 과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죽어버린 미래의 전두환을 본 나로서는 박태민의 말이 옳다는 쪽으로 기운다. 저 때 모두 무장 해제하고 투항했다면 5·18은 북한을 배경으로 한 폭도들의 만행으로 역사 속에 영영 묻혔을지도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를 총과 칼로 이루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문은 묵직하게 남는다. 도시가 고립되고 생필품이 부족한 속에서도 경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던 광주 시민의 인내와 질서 의식은 여러 번 강조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다.
우리는 흔히 5·18 하면 그저 광장과 도청만 떠올리지만, 책을 통해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총격전과 작은 전투들을 마주하며 그 시대의 악몽이 생각보다 더 끔찍했음을 실감한다. 5월 26일 밤 10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치겠다는 분만 남으라"는 방송이 흐르고 전차와 헬기를 앞세운 엄청난 규모의 계엄군 병력이 광주를 향해 죄어온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계엄이란 상황을 이용해 군 장악을 꾀하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살인했다.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계엄’의 어두운 면을 배웠다. 그럼에도 어째서 우리는 지난 12·3 계엄에 대해 이토록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일까? 12·3 계엄 이후 첫 선거의 결과는 내가 아는 상식을 의심하게 만든다. 12·3의 밤에 시민들의 평화 시위가 없었다면, 끝까지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의원들이 없었다면, 군의 명령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않고 소극적이었던 군인들이 없었다면 1980년 광주는 서울에 그대로 재현되었을 텐데 말이다.
지난 역사를 잊지 않고 되돌아보고 자꾸 논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짐승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진부한 경구가 아니라, 지금 우리 코앞에 닥친 현실의 경고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있는가. 굳어버린 마음을 깨우는 묵직한 질문 앞에 길게 여운이 남는다.
#헤세드서평단 & #말하는나무 감사합니다.
@hyejin_bookangel
@the_sapient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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