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질때샌디에이고에서로스앤젤레스로운전하며소형디지털녹음기에구술한막연히LA/운전시들이라고생각하는작품들의모음
#정지돈
#작가정신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제목이 뭔지 한참 찾았다. 이 길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제목이라고? 의심이 들어 출판사에서 보내준 글을 읽고서야 인정했다. 난해한 제목만큼이나 글도 쉽지 않다. 정한아 시산문집 #왼손의투쟁 을 접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렵게 읽던 책에서 드물게 맛볼 수 있는 알아차림의 묘미는 책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내게 정지돈 연작 소설집을 읽는 시간은 그 맛 포인트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책을 ‘네 편의 모빌리티 픽션, 에세이 그리고 대화가 담겨있습니다’이라고 소개했는데 왜 ‘픽션’이 붙은 건지 의아했다. 엠과 엔씨, 수지와 수지 커플은 실존 인물이고(맞죠?) 화자 ‘나’는 분명 작가 본인 같으며 파리와 런던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은 분명 실화 같단 말이지...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건 ‘모빌리티’인데, 단순히 A에서 B로 가는 위치적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안은별?정지돈 대화’ 부분을 정독했지만,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다. 이론적으로 ‘사람, 물건, 정보의 수많은 이동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사회 현상과 문제들, 그리고 그 순환’들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을 ‘모빌리티’라고 한다.
글 속에 인물 ‘나’와 ‘엠’의 이동 중에는 어떤 종류든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리고 둘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실존했던 예술가들이나 책 속 인물들의 모빌리티 속에서 일들이 일어나고 어떤 관계로 이어지고 서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내주신 네 편의 작품을 읽고, 이것들이 복수의 시간대와 장소들, 사건들, 사람들, 기억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과 그렇게 남지는 않았지만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에 대한 묘사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설들이 제게 보여주는 것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을 ‘모빌리티’라는 키워드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_안은별
<땅거미 질 때...>
친구 엠과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나눈 대화나 생각들이 주를 이룬다.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국외자들>과 <몽상가들>을 오마주하는 동시에 기록을 경신하고 싶다는 취지로 루브르에서 함께 달리기할 사람을 모집하는 글]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한다.
「루브르 달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아녜스 바르다가 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 예술가들, 고다르, 베르톨루치가 달리길로 기록을 겨룰 때 아녜스 바르다는 기계 장치의 힘을 빌려 유유히 공간을 거닌다. 바르다와 도나 해러웨이가 겹쳐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 라고 엠이 말했다. 달리기는 지배자의 도구, 반면 기계 장치는 해방의 도구. 고로 자동차는 타자기가 여성 해방에서 수행한 것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_26~27
이런 대화는 잭 런던의 『불 지피기』로 이어지고 작품 속 주인공이 알래스카를 걷다가 얼어 죽었다는 사실은 멈추지 않고 이동하는 것의 공포에 대한 소설 『루디』와 움직임이 멈춘 사람의 혼돈에 대한 희곡 『일종의 알래스카』의 어찌보면 ‘같은 소재’에서 나온 ‘상반된 주제’에 닿는다. 그리고
「이동이라는 테마는 무한해······.」 _27
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녜스 바르다가 ‘여성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적인 고찰과 비판’을 주제로 하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감독이란 사실을 알고, 도나 해러웨이가 ‘오리엔탈리즘과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인간중심주의까지 과학이 감춰왔던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밝힌 페미니즘 과학 연구자임을 안다면 이 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물론 나도 몰랐다. 네*버야 고마워!)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죽음의책 에 수록된 단편 중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 『불 지피기』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다. ‘목적 지향적이고 직선적인 인간을 비판하지만, 소설의 형식은 목적 지향적이고 직선적’이라는, 형식과 내용의 충돌은 ‘부자가 되고 싶은 공산주의자’ 잭 런던 자신의 모순이기도 하다는 것!
무장 강도 건으로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레이와 함께 갓 태어난 레이첼을 안고 멕시코로 넘어간 비트닉 계열의 시인 ‘보니 브렘저’, 그녀는 레이에 의해 거리로 떠밀려 매춘으로 가족을 부양한다. 레이가 감옥에 들어가자 딸은 입양 보내 버리고 매춘을 계속한다. 그 기간 중에 레이에게 써 보낸 편지의 모음이 책으로 나왔고 2007년 재출간 되면서 작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엠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저자는 ‘영웅으로 올려치기에는 문제가 많았고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주체적’이었다고 평한다. 나는 감히 어리석고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제롬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이 말은 멋지다고 인정한다.
「나는 어떤 말의 편이 아니고 나는 어떤 의미의 편도 아니고 나는 그저 존재의 편일 뿐이다.」 _37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
엠이 페테 드 뤼마니테라는 축제에서 만난 ‘엔씨’의 사연은 짠한 슬픔을 자아낸다. 부디 그가 그 번역으로 인정받는 번역가가 되어 카타콤에서 벗어나고 한국에 돌아올 타이밍을 다시 잡을 수 있기를!
「..들뢰즈가 말한 좌파의 조건이 떠올랐다. “좌파라는 것은”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그에게 좌파는 거리의 문제였고 지정학적 인간이었다. 멀리 있는 사람, 멀리 있는 사건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반면 우파는 자신의 앞마당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좌우 모두 보수주의다」 _100
현 정부나 여당은 카르페디엠을 아주 성실히 수행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내일 어떤 욕을 먹더라도 지금 순간을 즐기겠다는 듯, 산불로 난리가 나도 골프를 치고, 지난 약속도 어기며 4.3 추모식은 빼먹고 자신을 우쭈쭈 달래줄 서문시장이나 찾는 걸 보면 말이다.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내부순환> 편에 실린 호준과의 에피소드나 윌리엄 버로스라는 작가의 이야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약쟁이 버로스가 윌리엠 텔 게임에서 실수로 아내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버린 후, 자신의 작품 『퀴어』 서문에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조앤의 죽음 덕분이라는 소름 끼치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여정을 적어서 내보이는 것 말고 달리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었다,’고 썼는데 어떤 전기 작가는 그에게 공감하고 릴라 지넬레는 명백한 가정폭력이자 살인이며, 평론가, 비트닉, 문학사가들이 살인의 2차 가해자이자 동조자라고 비난했다. 릴라 만세!
불우한 환경에서 매월 우편배달부가 가져다주는 ≪위어드 테일스≫를 기다리는 기쁨이 유일했던 소년 발로우와 그의 유일한 친구(상상 속 친구;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가져온 이름) 러브크래프트와 편지를 통한 소통, 적잖이 충격적인 만남(발로우 열여섯 살 말라깽이/ 러브크래프트 마흔셋)은 운명이었다라고도, 결국은 비극으로 가는 과정이었다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빌리티’라는 개념은 낯설었지만, 작품 속에서 다룬 문학 작품들과 에피소드들은 충분히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