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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인생에 꼭 필요한 다섯 단어는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쪄’였다.」
첫 문장을 쓰기 몹시 힘든 책이 있다. 도통 할말이 없는 책이거나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가득 찬 나머지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문장의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그렇다. 이 책은 당연히 후자다. 심윤경 작가의 책 『영원한 유산』에서 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첫 페이지에 담겨 있다. 할머니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다소 새침해 보이는 손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계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사진을 다시 보니, 왠지 할머니가 잠투정하는 손녀에게 “예쁜 사람, 왜 그러나.”고 말씀하고 계시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자라는 온갖 비뚤빼뚤한 모습을 모두 ‘예쁘다’고 요약했고 분투하는 모습은 ‘장하다’고 했다. 어른이건 아이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입술을 삐죽이며 ‘별나다’고 했다. 더 나쁘면 ‘고약하다’였다.」 _p78~79
언어의 미니멀리스트이셨던 할머니는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아우라 같이 은은하게 막내 손녀딸을 사랑하셨다. 저자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할머니의 간략한 언어 사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깊은 사랑의 표현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할머니에 대한 예찬과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할머니가 남기고 간 강렬한 자식 사랑법을 저자가 딸 ‘꿀짱아(애칭)’에게 적용하는 육아서 같기도 하다. 할머니의 ‘말 없는 사랑법’은 영원한 유산처럼 되물림 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외동딸 꿀짱아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아이였는데 그 자그마한 아이가 등장함으로써 저자가 겪게 되는 당혹감과 좌절감, 자괴감을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저자의 유머러스한 표현들에 낄낄대며 봤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저렸는데 그 통증은 미안함 내지는 죄책감이었다.
「나는 ‘야단침’의 효용과 쓸모에 대해 늘 고민하고 회의했다/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핏대를 올리며 무수히 많이 야단을 쳤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용하다는 깨달음은 일찍부터 희미하게 찾아왔다/내 성질과 좌절감에 못 이겨 폭발하고 있을 뿐, 이 행위는 아이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_p80
방금 주의를 줬으나 돌아서면 또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아들들로 인해 신랑과 나는 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고 만다. 물론 아무리 별난들 ‘여자아이’ 하나를 돌보는 할머니와 아무리 착한들 ‘남자아이’ 셋을 돌보는 나와 ‘야단침’의 유혹에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저자의 못된 행동에도 근본적으로 사랑을 담은 마음으로 “예쁜 사람 왜 그러나~”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너그러움과 혼낸다는 말이 고작 언성 높임 한번 없는 “별나다!”라는 말이라는 사실이 나를 반성하게 한다. 나는 가끔 하지 않아도 될 못된 말을 퍼붓고 나서 ‘나는 진정 이 정도 인간밖에 못 된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에 한동안 허우적댄다. 그 자괴감은 상품에서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남은 스티커 자국처럼 끈적이고 불쾌한 기분에 괴롭다. 아이들에게만은 저자의 할머니처럼 나도 언어의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
「보통 아이가 속상해서 울면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괜찮아’라고 말하는데, 사실 아이는 괜찮지 않거든. 저런, 이라는 말 속에는 정확한 공감이 숨어 있는 거야. 아이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놀라고 속상해하는 마음을 알아주는 말인 거지.」 _p125
심리상담가이자 저자의 절친인 친구가 저자에게서 배운 ‘저런’이란 말을 놀이치료 상황에서 적용해보고 그 효과에 대해 극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매우 막내다운 우리집 막둥이는 수시로 징징댄다. ‘엄~마아아아아 형아가하아아아~ 나만 안해주고오오오오~ 어쩌구저쩌구’ 속상한 상태로 달려와서 징징대면 속으로 ‘지긋지긋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지만 종종 “아이고 저런~ 그랬어~”라고 하고 토닥여주면 금방 괜찮아져서 휑하니 갈 때가 있다. 나도 이미 “저런!”의 효과를 경험했지만 사실 늘 통하지는 않기도 하고 내 마음의 상태로 저런~에서 끝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오늘부터 다시 마법의 단어 “저런!”을 좀더 실생활에 적용해보려 한다.
잔소리 없이 믿음의 눈빛으로 나를 길러주신 나의 위대한 엄마를 떠올리며 서평을 갈무리한다.
아름다운 할머니의 사랑을 소개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