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 편 가르기 시대 휘둘리지 않는 유권자를 위한 정당정치 안내서
에즈라 클라인 지음, 황성연 옮김 / 윌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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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사실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_p134


#우리는왜서로를미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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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있을 수 없듯이 정치에서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린 정당도 존재할 수 없다. 듣는 귀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고이 모셔두고 시끄러운 입만 달고 나와서 하는 정치 토론들에 염증을 느낀다. ‘나의 의견만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식의 싸움판으로만 보이는 정치 이야기는 이제 신물이 나고, 내 잘못은 슬쩍 뒤로 감추고 “쟤가 먼저 그랬어!”라고 우기는 아이들 싸움처럼 답답하다. 


한때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을 귀담아듣고, 그의 주장에 대한 진정성과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한 적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이중성에 놀라고, 정신적 나약함에 실망하고, 본의 아님을 알지만 내로남불 하게 되는 모습들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이번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충격적이었고(많은 이들이 예상했었으나 믿고 싶지 않음) 산적한 나라 현안들보다 자축 쇼에 열을 올리는 그의 얼굴이 보기 싫어 뉴스를 멀리 했다. 이 책은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당파성(지지하는 당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아니라 반대하는 당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하는 당파적 행동)’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했다. 미국은 지금 이 부정적인 당파성에 빠져있고 그것은 양극화를 부추기는 큰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은 빨강과 파랑으로 나뉘었고, 부유한 백인과 비백인으로, 기독교와 나머지 종교들과 무교로, 시골과 일구가 밀집한 도심로 분열되고 있다. 이전에도 이런 분열은 존재했으나 그 양상이 달라지고 깊어져 정치적 정체성은 ‘메가 정체성’이 되었으며 여러 정체성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 가지 정체성에 위협이 가해질 때, 모든 영역의 정체성이 활성화되어 반응하게 되었다. 예전에 미식축구는 민주당원도 공화당원도 다 같이 좋아하는 스포츠였으나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무릎을 꿇기 시작한 일)의 그 행동 이후로 미식 축구에 대한 사랑도 정치적으로 양극화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의 일등공신 중 하나는 언론과 쇼설 미디어이다. 시골에 사는 백인 노인들은 하루종일 폭스 뉴스만 보고 그것만이 옳은 정보라 믿는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 아랫지방 시골 어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이다. 디지털 학자 제이넵 투펙치가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어떻게 과격화를 부추기는지 추적한 결과는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단순히 과격화 엔진이 아니라 정체성 엔진임을 보여준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되며 무엇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더 잘 조직된다.  


2017년 실시한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아주 많은 글을 접하면 반대 집단에 대한 글도 읽게 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없어서 커지는 고정관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VS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은 반성이 아닌 짜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정치적 양극화를 악화할 수 있다.”는 두 가설을 시험했다. 결론은 비관론자들의 승리였고 한 달 동안 통로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인기 있고 권위 있는 목소리에 노출된 결과 양극화는 증가했다. 다시 말해, 공화당원들은 더 보수적이 되었고, 민주당원은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지만, 더 진보적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에즈라 클라인은 미국 정치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의 배경과 원인, 그 과정을 여러 사례와 논문, 리서치 결과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미국의 양극화는 동기, 기술, 정체성, 정치 기관들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의 논리적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양극화를 벗어날 것인가? 클라인은 그런 방법은 없고 양극화 속에서도 기능할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을 개혁해야 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내폭(정치적 재난에서 정부의 운영이 경색되지 않도록), 민주화(승자 독식의 선거와 달리 제 3의 정당이 생존할 수 있게 등), 균형을 이야기한다. 클라인이 말한 ‘정체성 마음챙김’은 꽤 흥미롭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들이 있고, 어떤 것은 거대한 규모의 자금이 투입된 것’이라는 말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남성과 여성의 분열, 두 정당의 분열, 노동자와 기업의 분열 끝없이 분열해가고 있는 사회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나의 정체성에 반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다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의 탈양극화가 이뤄지면 각 정체성 간의 양극화의 간격이 좁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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