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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ㅣ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에는 다양한 부류가 존재할 것이다.
일단 진지하게 작가와의 대결에 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의외로 이런 사람은 적을 것 같지만), 또 특수한 무대 설정에 기인하는 탐미적 분위기나 개성적인 캐릭터들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가장 흔한 타입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즉, 트릭의 논리적인 풀이보다 다양한(?) 꼼수를 활용해 어중간하게 추리에 참여하는 타입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어렵고, 그렇다고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지는 단서들을 가지고 끙끙대며 추리를 하는 것은 귀찮다. 트릭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범인이나 범인의 동기를 운좋게 맞추면 기분이 좋다. - 대충 이런 사고를 가진 근성이 썩어빠진 게으른 독자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는 나 같은 독자들이 입맛을 다실 만한 멋진 먹잇감, 아니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후던잇(누가 범인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초반부터 몇 가지 명백한 단서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세 명제에는 후던잇(누가 범인인가?), 와이던잇(동기는 무엇인가?), 하우던잇(어떤 트릭을 사용했는가?)이 있다.
그 단서들이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화단의 무늬이다. 약간 찌그러져 있는 형태긴 하지만 쉽게 국화꽃 모양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국화는 장례식 등에서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꽃이기 때문에, 저택의 주인이 누군가를 애도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를? 자신이 지금부터 죽일 희생자를.
두 번째로, '어떤 인물'의 수상쩍은 행동이다. 그 인물은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밤에 경관을 자신의 방에 데려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어딘가로 향할 때마다 대동하는 등 너무나도 티나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으로 현장을 훼손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 인물은 현장에 들고 간 창포꽃 화병을 부주의한 척 떨어뜨렸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건, 화병에 들어있는 물을 엎질러서 현장에 남아있던 물 웅덩이를 감추려 했던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장에는 왜 물 웅덩이가 남아있었을까? 아쉽게도 내 얄팍한 추리는 여기서 그쳤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것은 범인의 트릭을 간파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단서들을 통해 나는 범인은 저택의 주인인 하마모토 고자부로라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단계는 범인으로부터 역으로 추론해 동기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 동기는 크게 실리추구(재산 ,명예)나 감정적인 요인(주로 복수)으로 나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거래처 사장과 그 운전수를 죽여야 했을까?
나는 고용인 부부의 딸이 사실은 하마모토 고자부로의 딸일 거라고 짐작했다.
즉 하마모토 고자부로가 하야카와 치카코와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을 기쿠오카가 농락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복수로 기쿠오카를 죽였을 거라고 말이다.
하우던잇, 트릭에 관해서는 자신은 없지만 덴구의 방과 10, 14호실의 환풍구를 실로 연결해 인형을 이동시키는 방법일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다. 인형을 이동시킨 다음에는 방안에 설치해둔 장치(유감스럽게도 그 장치가 뭔지는 나도 모른다.)를 활용해 인형을 조종해 피해자를 칼로 찌르도록 조종한다. 무책임한 추리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추리소설의 트릭은 워낙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이 등장하고, 독자들 못지않게 작가들도 꼼수를 쓰기 때문에 알아내는 것이 어렵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름의 추리를 해보았고, 작가에게 초라한 도전장을 내밀어보았지만 맞춘 것은 범인 뿐이었다.
동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훌륭하게 헛다리를 짚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작가가 제시한 동기가 본문의 내용 상으로는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릭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내 추리에서 덴구의 방과 범행현장을 잇는 가상의 선을 조금 더 확장시켰다면, 현장에 남은 물 웅덩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봤다면 충분히 연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트릭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포기가 너무 빨랐던건지도 모른다.
수상쩍은 인형(골렘이라는 이름의)에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한 작가의 함정에 빠져 덴구의 방에 있는 또 하나의 단서에는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다만 운전수가 수기 신호를 통해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는 추리는 뜬금없다는 느낌이었다. 자위대에서 수기 신호를 배우기 때문인가? 독자에게 특수한 지식을 요구하는 트릭은 좋아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같은 타입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미끼 - 이 경우에는 후던잇의 문제 를 던져 추리에 몰두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능숙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어찌되었든 새로운 단서가 나올 때마다 저택의 단면도가 실린 페이지로 성실하게 되돌아갈 정도로 골몰한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캐릭터들이 평면적이서 중반에는 살짝 지루함을 느끼긴 했지만, 적어도 탐정인 미타라이 기요시의 캐릭터에는 호감을 느꼈다. 살짝 맛이 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엄청나게 제멋대로인 이기주의자' 인 탐정이라니, 제법 매력적이지 않은가.
한국에도 '슈발의 궁전'이나 '린더호프 성', '유빙관'(작가의 상상의 산물이지만)과 같은 기괴하지만 흥미로운 구조의 건축물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꼭 방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