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지원과 만날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지원은 ‘사랑하니까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은 사랑이고 이해는 이해고, 그러니까 그것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같은 거 아닐까?"
내가 말했다.
"독감?"
"사생아라는 말이 이미 내 안에 잠복하고 있었던 것 같아. 어쨌거나, 나는 진짜 사생아니까. 찬바람이 불고 몸이 약해지면 바이러스가 활동을 하듯 어떤 단어도 적절한 때가되면 활성화가 되는 거야. ‘아버지의 인지‘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고, 그랬기 때문에 보자마자 불길한 느낌을 받았던 거야."
"그럴 수 있겠다."

"그러게 말야."
지원은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와 대화하다보면 가끔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복숭아를 자르는 것과 비슷하다. 겉은 부드럽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면 더는 날이 들어가질 않는다. 진짜 감정은 딱딱하게 응결된 채 부드러운 과육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마치 비밀문서라도 새기듯 골똘히 손톱을 손질하고 있었다.

‘사랑이 솟구친다‘는 말을 비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나는 두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물질이 분수처럼 솟구쳐 대뇌피질의 모든 주름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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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

‘회사‘ 시절을 얘기하자면 이 ‘장군‘이라는 존재를 간과할 수가 없다. 그만큼 그곳에서 나는 장군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매료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후자에 속했다. 저개발 독재국가의 우두머리처럼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딴전을 피우고 있지만 실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사내였다. 타고난 가부장이었고 권력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상한 선배 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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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화로 배우는 인공지능 만화 비즈니스 클래스 2
미야케 요이치로.전승민 감수, 비젠 야스노리 그림, 신은주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9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인공지능에 대한 기본 개념과 원리, 현 시점에서 응용할 수 있는 분야들을 다룬 책이다. 기본적으로 만화로 구성되어 있지만 텍스트와 표, 삽화로 핵심을 요약한 부분이 1/3은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만화의 스토리를 따라 가며 인공지능을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만화 파트만, 핵심만 간추려 이해하고 싶다면 텍스트 파트만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기호주의와 연결주의, 모라벡의 역설 같은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 책은 인공지능이 가져다 줄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대량실업과 불평등의 심화 같은 문제들은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여도 그것들을 통제•관리하는 역할은 인간이 하게 될 거라는 말만 있을 뿐).

인공지능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간단히 훑는 데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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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회사 생활의 웃긴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웃프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 - 박대식 - 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아홉시가 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또 있었다. 몇달 전 예매해두었던 조성진 홍콩 리사이틀이 벌써 다음 달이었다. 공휴일과 주말, 그리고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서 삼박 사일을 놀고 공연도 볼 것이다.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다음, 홍콩행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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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시 되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몰라서 되묻지만 알면서 되물을 때도 있다. 그것은 힘없는 어린 남자가 세상에 맞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보타주였다.

그밖에도 무수한 "......하지 않았다면"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고 싶어하는 연인들의 소중한 재산이었고 언제 꺼내봐도 질리지 않는 메뉴였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고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바로 그거예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언제나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집에 가서 내 말을 잘 생각해봐요. 사회는 그런 거예요. 여자라서 밀리고 나이가 많아서 잘리고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가고 한국인이라서 차별받고, 그런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 그래야 길이 보일 거예요. 배경도 재능의 일부예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생긴 면접관이 큰 선심이나 쓰듯 말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사업의 성공이나 고시 합격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두 연인이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오직 그들만의 것이므로 그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위태로워진다. 증명서도 공인된 형식도 없다. 그날 코엑스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마치 날달걀을 던지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들의 기쁨은 휘발되고 날카로운 고통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걸까? 증인을 세우고 공인된 형식을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간직하던 그 짧고 황홀하고 위태로운 기쁨을 진부하고 안락하고 견고한 제도로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마치 믿을 수 없이 많은 돈을 딴 도박사가 카지노의 칩을 현금으로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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