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지원과 만날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지원은 ‘사랑하니까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은 사랑이고 이해는 이해고, 그러니까 그것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같은 거 아닐까?"
내가 말했다.
"독감?"
"사생아라는 말이 이미 내 안에 잠복하고 있었던 것 같아. 어쨌거나, 나는 진짜 사생아니까. 찬바람이 불고 몸이 약해지면 바이러스가 활동을 하듯 어떤 단어도 적절한 때가되면 활성화가 되는 거야. ‘아버지의 인지‘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고, 그랬기 때문에 보자마자 불길한 느낌을 받았던 거야."
"그럴 수 있겠다."

"그러게 말야."
지원은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와 대화하다보면 가끔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복숭아를 자르는 것과 비슷하다. 겉은 부드럽지만 어떤 지점에 이르면 더는 날이 들어가질 않는다. 진짜 감정은 딱딱하게 응결된 채 부드러운 과육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마치 비밀문서라도 새기듯 골똘히 손톱을 손질하고 있었다.

‘사랑이 솟구친다‘는 말을 비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나는 두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물질이 분수처럼 솟구쳐 대뇌피질의 모든 주름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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