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에게 ‘믿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 중에 가장 추상적이고 아득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 추상과 아득함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상대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보다는, ‘믿음’이라는 나의 감정이 언젠가는 닳고 지쳐 색이 바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온다.

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믿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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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운명 -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
이정우 지음 / 한길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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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들, 특히 그 중에서도 ‘사이버펑크‘로 분류될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책이다.
이쪽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요즘 관심 주제에 부합하기도 해서 읽게 되었다.

꽤 오래 전에 나온 책으로, 책에서 다룬 다섯 편의 영화들은 모두 20세기에 나온 것들이다.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테니얼 맨>, <매트릭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운명을 예견한 작품들이다. 가장 최근작인 <매트릭스>만 해도 벌써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레플리컨트(제작된 인간)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인간을 인간 ‘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지 탐구하기도 하고, <공각기동대>에서는 기억이 외화되는 전뇌화의 시대에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더 나아가 영혼과 육체의 경계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과거에 이미 감상한 영화들임에도, 저자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영화들을 보았을 때는 그저 고도로 발달된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을 목도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결국 이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건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였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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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지 스토리 - 빈민가에서 제국을 꿈꾸다
잭 오말리 그린버그 지음, 김봉현.김영대 옮김 / 시드페이퍼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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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무원이나 학자는 셈에 능하기보다는 청렴결백해야 하며, 예술가는 오로지 예술적 성취에만 열중해야 한다는 오래된 편견이 있다. 물론 자신의 인생을 예술 그 자체에 바치다시피 한 열정적인 예술가들은 위대하고 멋져 보이지만, 현대의 예술가들, 특히 대중예술을 지향하는 이들이 인기와 돈에 대해 초연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제이지 스토리>는 유명한 힙합 뮤지션 제이지를 다룬 책이다. 전기적인 성격도 띄고 있고 음악적 커리어에 대해서도 일부 다루고는 있지만 <포브스> 기자인 저자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제이지의 사업가적 면모이다. 그의 비즈니스는 단순히 음악 산업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를 그저 래퍼나 연예인으로만 알던 사람들은 놀랄 만큼) 다방면에 걸쳐 있다. 라커펠라 레코드라는 힙합 레이블에서 시작해서 데프 잼(레코드사)의 사장이 되고, 라커웨어라는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프랑스 주류 회사와 함께 고가의 샴페인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또한 NBA 뉴저지 네츠의 구단주가 되어 그가 자란 브루클린으로 팀을 옮겨온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운영하여 불우한 아이들과 난민을 구제하는 자선가이기도 하다. 탁월한 마케터이며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TIDAL을 만들었다. 슈퍼스타 비욘세의 남편이며, 버락 오바마가 연설에서 그의 노래 가사를 인용할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자산 규모는 무려 5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2011년 기준).

저자는 제이지가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아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빈민에서 어떻게 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업가가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 하나 하나 추적하듯 취재하여 분석한다. 제이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으면 훨씬 집필이 수월했겠지만... 책이 큰 금전적 이익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한 제이지 측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만큼 실리를 중시하며 계산이 철저한 인물이다. 때문에 저자는 작은 퍼즐들로 큰 그림을 완성하듯 자료 수집과 주변 인물 탐색, 인터뷰 등을 통해 이 책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운 것도 아닌 그가 어떻게 CEO로서 직관적이고 냉철하게 사업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마치 정글의 맹수처럼 거리에서 마약을 팔며 동물적으로 체득한 감각인 듯 싶기도 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브랜드화하고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솜씨는 경영이나 마케팅의 문외한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다.

힙합을 즐겨 듣고 제이지의 음악을 좋아하는 터라 관심이 있어 더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제이지가 ‘비욘세 남편’으로 더 유명한 한국에서는... 이 책이 몇 부나 팔렸을 지 사뭇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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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도시
백승재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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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무료로 대여해주길래 읽은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스릴러나 호러 장르의 냄새가 난다. 사실은 도심 속에서의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은 대리 운전 기사로 일하고 있는 정명환. 보증 사기로 떠안은 거액의 사채로 인해 사채업자에게 두들겨 맞고 정해진 기한까지 갚지 않으면 딸을 해치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나타난 김 실장이라는 의문의 인물이 명함 한 장과 함께 제안을 하는데…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면 한 명 당 1억 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명환은 황당무계한 김 실장의 제안을 처음엔 장난으로 여겨 넘기지만, 곧 일어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이 살인 게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읽다 보니 <배틀 로얄>이나 <헝거 게임> 시리즈가 연상된다. 이런 주제로 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작품의 차별적인 요소라면 각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함께 인간적인 면을 좀 더 부각했다는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누가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도 않고, 다소 중구난방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정이 허술한 탓인지 중반부터는 몰입도가 떨어지며 스토리 전개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혹시 용두사미급 전개로 이어지진 않을까 불안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됐는데 그래도 결말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지어져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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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연상호 지음 / 세미콜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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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사이비> 그리고 <부산행>,<염력>의 감독으로 알려진 연상호 감독의 만화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려다 사정상 완성하지 못했는데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화라는 형식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갓난아기일 때 집을 나간 어머니가 산 속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사체 부검 결과 어머니는 실종 직후에 사망하였고 사인은 낙상 또는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은 어머니 없이 시각장애인인 아버지가 홀로 키워왔는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버지로부터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심지어 영정 사진으로 쓸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는데 부고를 듣고 찾아온 어머니의 형제들에게 사진을 부탁하니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희는 사진이 없어. 사진 찍기를 싫어했어. 얼굴이 괴물 같았거든...”
어머니의 실종과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 그의 어머니 영희의 얼굴이 아주 못생겼었다고 말한다. 조소와 혐오가 담긴 말과 표정들...

그간 발표된 연상호 감독의 영화들이 그랬듯 이 만화 역시도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인간 내면의 추악함과 나약함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자신이 이룬 것을 그냥 받아먹는 기생충’ 운운하며 일갈하는 장면은 세대갈등이 극대화된 현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탁월한 이야기꾼 연상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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