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거대한 두 축인 종교(기독교)와 과학은 오랜 세월 대립해 왔다. 이른바 과학시대의 도래로 종교는 그 권위를 끊임없이 도전받아 왔고 진화론이 처음 등장한 19세기 이후 창조론 Vs. 진화론의 대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진화와 창조, 두 가지 가설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걸까?<창조론 연대기>는 고등학교 1학년인 준과 수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창조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어나가고 이론적 설명을 덧붙이는 만화다. 김민석 작가는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난해한 이 주제를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음슴체와 은어를 남발하는 유쾌한 청소년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다가도 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에 대한 진지한 설명이 나올 땐 심각하게 곱씹어 보게 된다. 보통 ‘창조론‘ 하면 진화론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이 책은 창조론에도 다양한 관점들 - ‘진화적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 - 이 있음을 소개한다. 또한 성서의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을 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각각의 주장에는 어떤 과학적 오류가 있는지도 밝히고 있다. 특히 일반에서는 유사과학으로 여겨지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정론처럼 여기는 창조과학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딱딱한 이론을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그림을 통해 들려주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과연 신앙과 과학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과학적 이성 안에서 사고할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해본 사람에게라면 이 책이 어느 정도 해답이 될 수도, 아니면 더 깊은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연속된 흥행과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이제는 유명 감독이 된 지 오래인 박찬욱이지만, 그도 한때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써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박찬욱의 몽타주>는 일찍이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박찬욱 감독이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책은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파트 1에서는 가족이나 신변잡기, 그의 음악 취향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역시나 영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파트 2는 <공동경비구역JSA>와 복수 3부작 등 자신이 감독한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들을 모았다. 파트 3에서는 자신이 사랑한 B무비들,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마틴 스코시즈 등의 작품에 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워낙 달필인데다 영화에서도 종종 보이는 감독의 개그감이 빛을 발한다. 그동안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즐겁게 보아온 팬이라면 그의 작품세계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 텍스트로서도 유용할 테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
시인인 박준의 첫 산문집이다. 산문집이라지만 책에 실린 어떤 글들은 시 같기도 하고 어떤 글들은 서간문 같기도 하다. 여행지에서의 사건이나 음식, 어린 시절의 풍경, 기억나는 지인과의 일화를 통해 사람, 관계, 추억,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들을 이야기한다. 어쩐지 단어 하나, 글줄 하나를 꾹꾹 눌러쓴 것만 같아 독자인 나 역시 몇 번을 곱씹어 읽게 되었다. 글을 액체에 비유한다면 이 책에 쓰인 글귀들은 아마도 말갛고 담백하지만 농도가 짙은 진액일 것만 같다. 지나치게 장난스러워 가볍게 느껴지거나 허투루 쓰인 일회성 단문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박준의 글은 더욱 빛이 난다.「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이 책을 읽으며 눈으로 들어간 수많은 말들 중 내 마음속엔 어떤 말들이 살아남았을지 모르겠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마음의 폐허‘라는 글이다. 사람 사이의 믿음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와 <해피 매니아> 등을 그린 만화가 안노 모요코는 2002년에 결혼한 바 있다. <감독부적격>은 아내인 안노 모요코가 자신들 부부의 일상을 그린 만화다. ‘감독 군‘과 ‘롬퍼스‘라는 캐릭터로 자신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주로 감독 군(안노 히데아키)이 얼마나 못말리는 오타쿠인지, 그리고 롬퍼스(안노 모요코)가 험난한 ‘오타쿠 신부의 길‘을 걸으며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그리고 있다.만화에는 오타쿠들이 열광할 만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과 관련된 각종 서브컬쳐 용어들이 난무한다. 특히 안노 히데아키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전설거신 이데온>이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울트라맨>, <가면 라이더> 등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한다. 감독은 뜬금없이 어떤 캐릭터를 소환하여 흉내내거나 애니 주제가를 불러대는 모습을 연출한다. 처음에는 황당해하던 롬퍼스 역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자포자기한 듯 완벽한 오타쿠의 신부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리정돈이나 미용과는 담을 쌓고 살던 감독 군도 롬퍼스를 통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며 그것을 즐기는 경지에 이른다.안노 모요코의 막 그린 듯 귀여운 작화와 정신없는 개그를 좋아하는 터라 킥킥대며 재미있게 읽었다. 뼛속까지 오타쿠인 중년 남성과 겉으로나마 일반인을 지향하는 만화업계 종사자 여성. 두 사람이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동화되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 미나카타 진은 현대 일본(서기 2000년)의 외과의사인데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138년 전의 에도로 타임슬립을 한다. (작가는 타임슬립의 시기를 왜 하필 138년 전으로 설정했을까? 이 연도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6년 전이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항구가 개항했고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였지만 아직 일본이 근대화되기 이전인 막부 말기이다. 서양 의술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거나 전염병이라도 돌면 속수무책으로 죽던 시대, 주인공은 미나카타 진은 20세기의 첨단 의술로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기술과 시대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난다는 내용.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이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나카사키를 여행했는데 길거리에 수많은 기념품과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며 일본에서의 사카모토 료마의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료마는 소설과 드라마로도 유명해졌으며 나가사키는 그가 활약했던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만화 속에 등장하는 그가 반가웠다. 그 외 사이고 다카모리라든지 오키타 소오지 같은 막부 말의 인물들과 사쓰마 번이니 초슈 번이니 신센구미 같은 이름들은 학창시절 열광했던 만화 <바람의 검심>을 통해서도 익숙한 터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역사학자나 의학교수 등의 자문과 감수를 거쳐 만든 만화인 만큼 고증이 잘 되어 있다. 의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아도 수술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세밀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된다. 보통의 의학 만화에 더해 흥미롭게 볼 만한 포인트는 현대 의료 기구나 장비가 없는 과거에 어떻게 외과수술을 하는가이다. 그리고 기초적인 의학 상식, 이를테면 세균이나 감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옛날 사람들이 미나카타의 수술을 보며 보이는 반응들이 재미있다. 주인공 미나카타는 (당시로 볼 때) 신에 가까운 의술을 행할 뿐 아니라 자애롭기까지 한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후반부로 갈수록 역사적 사건들도 깊이 다루어지는데 일본이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며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또한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동시대에 조선의 근대화가 좀 더 순탄히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로 대표되는 황금기의 시작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 역사의 과오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에 반해 우리가 자랑할 만한 역사는 어떤 것이고 반성할 부분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