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회사 생활의 웃긴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웃프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 - 박대식 - 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아홉시가 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또 있었다. 몇달 전 예매해두었던 조성진 홍콩 리사이틀이 벌써 다음 달이었다. 공휴일과 주말, 그리고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서 삼박 사일을 놀고 공연도 볼 것이다.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다음, 홍콩행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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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시 되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몰라서 되묻지만 알면서 되물을 때도 있다. 그것은 힘없는 어린 남자가 세상에 맞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보타주였다.

그밖에도 무수한 "......하지 않았다면"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고 싶어하는 연인들의 소중한 재산이었고 언제 꺼내봐도 질리지 않는 메뉴였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고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바로 그거예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언제나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집에 가서 내 말을 잘 생각해봐요. 사회는 그런 거예요. 여자라서 밀리고 나이가 많아서 잘리고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가고 한국인이라서 차별받고, 그런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 그래야 길이 보일 거예요. 배경도 재능의 일부예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생긴 면접관이 큰 선심이나 쓰듯 말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사업의 성공이나 고시 합격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두 연인이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오직 그들만의 것이므로 그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위태로워진다. 증명서도 공인된 형식도 없다. 그날 코엑스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마치 날달걀을 던지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들의 기쁨은 휘발되고 날카로운 고통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걸까? 증인을 세우고 공인된 형식을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간직하던 그 짧고 황홀하고 위태로운 기쁨을 진부하고 안락하고 견고한 제도로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마치 믿을 수 없이 많은 돈을 딴 도박사가 카지노의 칩을 현금으로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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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의 천일야화 1 - 첫날밤의 맹세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웹툰으로 보았던 <1001>의 단행본이 밀리의서재에 올라와 있길래 연휴 동안 읽었다. 양영순의 첫 장편 연재작인데 작화나 연출이 워낙 뛰어나 그야말로 주술에 걸린 듯 이야기에 쉽게 몰입된다.

원전과는 달리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고 한다. 1001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6개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 갯수를 늘려 지루해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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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불완전하나 숫자는 정직하다.

돈 얘기가 나오면 진지해져야 한다는 것을. 수돗물도 정수장에서 집까지 오는 사이에 조금씩 새나가고 전기도 발전소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그 일부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진심 어린 말도 곧잘 오해를 받는다. 내 입에서 나간 ‘사랑’은 네가 들은 그 ‘사랑’이 아니다. 나의 생각은 너에게 전해지지 않고 너의 생각 역시 나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말은 언제나 왜곡되고 변질된다. 그러나 돈에 대한 말은 아무 손실 없이 그대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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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주도적인 삶을 산다는 착각


마술사들은 앞에 있는 관객에게 카드를 고르게 함으로써 속임수를 감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쉽게 믿어버리고 심지어 책임까지 지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은 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이다.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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