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고의 구멍 ㅣ 초월 3
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3월
평점 :
현호정, <고고의 구멍>, 2023, 허블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 _<고고의 구멍> 서평
이 소설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고고의 구멍>을 소개할 수 있는 키워드는 많겠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단어이자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되어 우선 위 문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소설은 주인공 ‘고고’가 마을에서 추방당하며 시작한다. 모두가 쌍둥이로 태어나 서로 ‘켤레’를 이루고 살아가는 마을에서 고고는 홀로둥이로 태어난다. 마을 사람들에게 혼자 사는 자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고, 혼자인 고고는 마을에서 배척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고고는 또 다른 홀로둥이 ‘노노’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마을에서 살아가는 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노노가 병으로 고고의 곁을 떠나면서 고고는 또다시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된다. 고고가 마을에서 추방된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홀로둥이로 태어났다는 존재 자체의 결함 탓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고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존재가 부정당하고 마을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이다.
고고가 살아가던 마을 공동체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마을인’들은 ‘비정상적인 존재’인 고고를 마을에서 추방하여 공동체에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제거 및 축출한 것이다. 마을은 행성 ‘망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에서 추방된 고고는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부 인물로서 소수자이다. 이처럼 고고는 사회 공동체로부터 비정상적인 존재로 여겨짐으로써 소수자성이 부여된 존재이다.
고고는 자신의 소수자적 특성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마을에서 강제적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동시에 고고가 지닌 소수자적 특성은 고고가 마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을 것들을 할 수 있게끔 작용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추방되어 가장 먼저 다다른 ‘습지’에서 고고는 어느 날 가슴에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긴 것을 발견한다. 이제 고고는 홀로둥이이면서 가슴에 구멍이 난 존재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결함’이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고고는 자신에게 일어난 신체의 변화에 혼란을 겪는다. 고고의 구멍은 정신적인 고통뿐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생생한 통증을 불러왔고, 그동안 고고가 일궈낸 안정적인 일상은 다시 혼돈 속에 빠진다. 고고는 생존을 위해 신체에 일어난 이상스러운 변화를 이해해야 했으며 동시에 달라진 신체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주지했듯 고고의 구멍은 고고에게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나, 고고가 구멍을 갖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하게 하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한다. 고고의 구멍은 고고라는 주체에게 어떤 이행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정리하자면 소설 <고고의 구멍>에서 소수자성은 그것을 지닌 존재(소수자)로 하여금 다른 환경과 세계에서 살아가게 하고, 고고는 이행 가능성을 지닌 주체로서 다른 신체로 다른 세계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전과 다른 존재로 바뀌어 나간다. <고고의 구멍>이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편 고고의 구멍은 스스로를 ‘상실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한다. 고고의 구멍은 그것을 발견했을 당시에 생긴 것이 아닌, 이미 있어 왔던 상실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어느 날 문득 몸에 멍이 든 것을 발견하고부터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고고는 어느 날 구멍을 발견하면서부터 통증과 심정의 변화를 느낀다. 눈으로 직접 보는 방식으로 구현된, 즉 가시화된 상실의 증표로써의 구멍은 고고로 하여금 ‘자신에게 상실이 존재함’이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구멍을 인식한 고고는 자신을 상실한 존재로 정체화하면서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고, 그 탐구는 행성 ‘망울’의 여행으로 이루어진다.
고고는 마을에서 벗어나 행성 망울을 여행하며 자신의 신체를 통해 타인의 신체와 세계의 신체를 이해해 나간다. (여기서 ‘신체’는 ‘마음’과도 치환해 쓸 수 있다) 고고는 ‘구멍’으로 표상되는 자신이 지닌 결핍을 통해 새롭게 조우한 세계를 이해하고, 어떤 결핍을 지닌 존재들에 공감한다. 다시 말해 고고는 자신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결핍을 이해하고 있다. 고고는 무의식적으로 세계와 타인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와 동일시하고, 세계와 타인이 가진 결핍과 상실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상실한 부분의 치유와 회복을 시도한다. 고고가 행성 망울 곳곳의 구멍을 메우는 ‘협곡인’을 떠올리고 찾아간 것 또한 자신의 구멍과 세계의 구멍을 연관 짓는, 즉 신체의 동일시를 통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갈망이다.
고고는 결핍과 상실의 치유를 향해 나아가며 성장한다. 고고의 회복은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고고의 구멍>에서 회복은 구멍이 메워지는 것이 아닌, 구멍 난 자신의 신체 또는 그러한 신체를 지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고고의 신체와 자아의 회복 및 치유는 타자와의 마주침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리하자면, 고고의 상실에 대한 회복과 성장은 가슴의 구멍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고고가 지닌 결핍은 신체의 증상으로 발현되고 가시화되면서 구멍이라는 외상으로 발견된다. 고고는 처음에 자신의 신체의 변화(구멍이라는 외상)를 부정하고 회피한다. 외상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기까지 고고는 역동적인 심정의 변화를 겪는다. 놀람, 부정, 회피, 체념, 수치, 공포 사이를 오가는 진동 단계를 겪으며 고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구멍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
‘고고의 구멍’은 고고가 새(birld)로 살게 한다. 여기서 전제로 생각해야 할 점은 새는 한 둥지에 정착해 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고는 마을에서 추방된 이후 계속해서 자신이 정착해 살 곳을 탐색한다. 하지만 둥지에 정착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영위할 만하면, 고고의 구멍이 고고를 둥지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고고는 가슴에 생긴 구멍에 의해 끊임없이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로서 살아간다. 고고가 둥지라는 보금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의적으로도 타의적으로도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고고가 지닌 존재의 특성, 소수자성으로 상징되는 ‘홀로둥이’와 ‘구멍’이 고고를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새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고고의 구멍은 고고가 새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의 증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가슴의 구멍은 고고로 하여금 자신을 상실한 존재로 인식하게 했고, 고고는 구멍의 존재로써 상실이 존재함을 잊지 않는, 다시 말해 상실을 기억하는 존재가 된다. 상실을 자각한 존재는 상실한 것을 메꾸려는 욕망에 따라 여기저기를 이동해 다닌다.
<고고의 구멍>이 취하는 소설의 구성은 둥지에서 새로운 둥지로, 또다시 새로운 둥지로의 ‘이동’과 이동하는 자의 ‘성장’이라는 이행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지닌 특성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돌아갈 곳’의 재위치가 일어나며 고고의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여정이 이어진다.
고고가 여행하며 잠시동안 머무르는 곳들(습지, 협곡, 지도리)에는 각각의 세계관이 존재하고, 각 세계에 터전을 잡고 머무르는 공동체는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고고는 습지에서의 생활 요령이 협곡에서 통하지 않고, 협곡에서의 의미가 망울의 남반구에 있는 지도리에서 통하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여행에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과 마주치고, 마주 보고, 교류하며 고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고고의 여정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갈 곳으로써의 둥지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도달한다. 욕망을 추구(고고의 경우에는 결핍을 충족하려는-가슴의 구멍을 채우려는 욕망)하는 존재에게 있어야 할 곳으로서의 둥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개인이 어떤 것을 추구(욕망)할 때 한 장소에서 모든 것을 충족하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의 법에 귀속된 존재는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기에, 현호정 작가는 상징계에서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개인이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대안으로 여러 세계의 이동을 제시하고 있다고 서평자는 해석한다.
우리가 상징계에서 살아가는 상징적 주체로 존재하는 한, 그 세계의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상상계와 실재계에서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의 어떤 부분을 상실하게-거세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은 금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기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도덕적인 당위나 법의 형태로 나타난다. 법은 ‘언어’로 되어 있기에 특정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언어로 이루어진 법적인 질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욕망 가운데 법 바깥에 있는, 즉 ‘위법의 영역에 속하는 욕망’은 추구하는 것이 금지된다. 소설에서 고고는 존재 자체(홀로둥이)가 세계(마을 공동체)의 법에 위배되어 추방되었고, 고고는 마을에서 살아갈 권리(욕망)를 박탈(금지)당한다. 하지만 오히려 고고는 다른 세계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고고라는 존재가 지닌 소수자성이 세계의 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 여기서부터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은 고고의 욕망이 기거할 보금자리(고고의 결핍이 해소될 장소), 돌아갈 곳으로써의 고정된 둥지를 찾는 것으로 끝맺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다른 새들과 ‘함께 날기’를 하며 활짝 웃는 고고의 모습을 회상하는 노노새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앞으로 고고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하나의 특정 세계에서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여러 세계의 이동을 통해 충족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 고고는 가슴의 구멍과 마을의 외투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되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신체로 고고는 망울 행성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여행 중에 만난 각 세계의 존재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 금과 밤, 노노새와 누누중총새를 비롯한 다양한 이들을 만나러 다닐 것이다. 행복은 한 군데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고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날아다닐 것이다. 하늘을 날 때를 비롯해 일상에서 느껴지는 구멍의 고통(물리적, 정신적 고통 모두)은 고고에게 “어쩌면 끝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지도(196pg)” 모르나, 구멍의 존재감은 계속해서 고고를 상실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로 존재하게 할 것이다.
고고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넘나들며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자 또 그것이 가능한 존재이다. 더불어 고고는 상징계 바깥의 상상계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상징과 언어 바깥에 있는 상상되어지는 나, 즉 언어로는 묘사되거나 포착되지 않는 상징 바깥 세계의 상상되어지는 나”¹ 를 추구하는 고고는 상상계에 진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아버지의 법 밖에서 진짜 나를 상상하는 영역을 여성적 향유라 한다”² (여성적 향유라는 개념은 실제 생물학적 성별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일러둔다. 또한 소설 텍스트 내에서 고고가 여성이라는 내용을 찾지는 못했으나 책의 뒷표지에는 고고를 ‘소녀’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일러둔다) 그러한 맥락에서 고고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넘나들며 여성적 향유를 할 수 있는-상상계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³ 인 ‘실재적 주체(real subject)’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이다. 결말 이후의 고고는 여러 세계를 왕래하며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욕망을 조금씩 충족하며,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제 고고의 구멍은 단지 어떤 결핍이나 상실의 상징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
이번엔 ‘초월’을 키워드로 소설을 살펴보려 한다. <고고의 구멍>은 허블의 초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초월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일까. 서평자는 소설 <고고의 구멍>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언어가 지닌 한계’의 초월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가 두드러지는 부분이 <제1장>이다.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구멍>에서 의미의 전복을 시도한다. 특히 <제1장>에서 많은 공을 들인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그 세계의 새로운 의미망을 재구성하고 있다. 서평가는 소설의 <제1장>을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하는 작업으로, <제2장>과 <제3장>을 서로 다른 의미망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각 장은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망울의 창조 신화’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다.
언어는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획득함으로써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나와 타자를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의미의 구분, 너와 나 사이의 다름에서 비롯된 의미의 차이는 우리 사이에 수많은 경계를 만들어 낸다. 마치 행성 망울 곳곳에 생겨나 있는 구멍과, 사람들 사이 이해의 불가능이 만들어 내는 관계의 균열처럼 말이다.
이러한 균열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일어나며 그걸 인지하더라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수용되기 마련이고 나와 너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인식과 표현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낙차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서로에 대한 마음과 동기가 선하더라도, 나의 생각은 행동이나 언어로 ‘표현’되어 상대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왜곡되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생겨나게 한다. 고고와 노노 사이에 있던 관계의 균열 또한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며 엇갈린 결과이기도 하며, ‘상대를 위한다’는 마음이 곧 나의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나와 타인은 다른 존재로서 내가 의미하는 바와 타인이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누군가를 ‘위한다’는 행위는 온전히 있을 수 없다. <고고의 구멍>에서 다뤄지는 ‘돌봄 노동’ 또한 타인을 위하는 행위의 모순성을 드러내는 제재이다. 고고는 병에 걸린 노노를 돌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엇갈리며 생겨난 갈등과 오해가 관계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또는 나의 경우에만 비추어 타인을 대할 때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은 몸집을 불려 우리 사이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내거나 그것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한껏 노력해도, 너와 내가 갖는 존재의 차이라는 본질적인 다름 때문에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공존하면서 서로의 에고(ego)를 존중하는-상처입히지 않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구멍>에서 타자 사이의 인식의 낙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대화를 통한 이해’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고고와 노노새는 대화를 통해 나와 너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음,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임을 확인하고 과거의 서로에게 “미안했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런 인사가 균열의 완전한 메꿈으로 이어질 순 없겠지만 그들이 회복을 통한 새로운 관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
현호정 작가는 소설을 통해 언어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고가 살아가는 세계를 비롯해 우리의 세계 또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따르는 사회의 법 또한 언어로 되어 있다. 언어가 만들어 내는 우리 사이의 간극과 균열은 우리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되어 개인의 ‘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러한 맥락에서 현호정 작가는 우리 사이에 놓인, 언어가 만들어 낸 경계와 경계가 불러온 것(행성 전체의 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경계는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경계는 지리적 경계가 아닌 우리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경계이다. 그러한 경계를 상징하는 요소가 ‘알’이다. 알은 ‘자아(ego)’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에고를 가진 사람이자 자신의 에고를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아를 지키는 일은 존재에게 중요한 일이나, 자기방어가 강해질수록 나와 바깥을 구분 짓는 ‘알’이라는 경계는 공고해진다.
나의 에고가 다치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에고이스트가 될 수 있다. 에고이스트는 나 중심적이고, 나밖에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즘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나 외의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나를 위해 타자를 이용한다. 에고이스트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판단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고고의 행성>에서 마을이 극도로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노노가 새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 것 또한 마을인들의 에고가 노노의 행위에 의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새를 먹지 않는 문화의 마을에서 생존을 위해 새를 먹어야만 했을 때, 노노는 새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양보했던 노노의 ‘도덕적인 행위’는 마을 사람들을 도덕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도덕판단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마을인 자신들이 자신의 자아가 추락했다고 느껴 모든 비난의 화살을 노노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러한 비난의 눈초리와 배척은 노노와 함께 살아가는 고고에게도 함께 돌아간다.
에고가 성숙한 자아를 가진 존재, 즉 “성숙한 의미의 ‘상징적 주체(symbolic subject)’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이해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⁴ 자신의 에고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타자의 에고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에고를 깨트리지 못하고 알 안에 갇힌 상태,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즉, 이해의 부재는 나와 외부와의 단절을 불러 온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비롯해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
우리가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춘다면 개인은 ‘나’의 결핍에만 갇힌 존재가 될 수 있다.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사이에 놓인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회복과 성장을 통해 우리 사이의 다름이라는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현호정 작가가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의미망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의미는 차이에서 비롯되며 의미는 너와 나의 다름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우리 사이의 경계, 나와 타자의 경계, 나와 외부와의 경계를 견고하게 만든다. 이는 의미망 바깥에 놓인 자들, 소수자들을 배제하기도 한다.
현호정 작가는 소수자라는 존재가 지닌 가능성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의미망,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고고의 성장, 즉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될 수 있는 범위를 늘리는 과정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고고의 구멍이 고고를 여행자로 만들었듯, 상실이 존재함은 상실한 것이 무엇이든 상실의 주체를 나아가게 한다. 상실은 상실의 대상에게 상실한 것을 메꾸고 채우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이 심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누구나 눈이나 귀 등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실을 갖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상실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결핍(에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책 <고고의 구멍>의 표지에서 고고는 자신 앞에 놓인 커다랗고 새카만 구멍을 바라보고 있다. 고고가 바라보는 구멍은 자신이 가진 결핍이나 상실이기도, 타인이나 세계가 가진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 이외의 타인이나 세계가 지닌 상실과 결핍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가진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
마지막으로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신화라는 키워드로 이 소설을 해석하기엔 배움이 부족하고 소설 내용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일단 던져 본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고고는 마을이라는 인간 사회에서 분리되어 오로지 혼자, 자신의 신체로 자연과 대면한다. 여기서 자연은 사회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고는 마을 밖의 자연환경에 놓이면서 ‘아는 것(인간 사회의 논리, 상식, 규칙, 의미)’과 ‘실제로 몸소 느끼는 것’의 차이를 깨닫는다.
“그저 앞으로 열심히 걷는 것만으로도 다른 기후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몇 년 전 마을에서 습지로 이동하던 경험에 기대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몸소 느끼는 일은 아는 일과 전혀 무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던 것이었다.”(38pg)
이처럼 고고는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고 이해(기술)되었던 자연을 실제 몸소 체험하면서 차이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 체계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고고의 구멍>의 이야기는 고고가 자연을 몸으로 겪으며 스스로 이해한, 세상에 대해 기술하는 ‘신화의 창조’ 과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사회가 이미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벗어나 직접 자연을 이해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고고의 신화 창조 과정’을 이 소설의 큰 틀로 이해해 봐도 좋지 않을까.
소설 <고고의 구멍>이 구사하는 문법은 왠지 시를 닮아있다. 극을 닮아있기도 하고,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독자분들은 이런 감상을 ‘서정적이다’, ‘추상화 같다’라고 표현하고 있었는데 본 서평가도 공감한다.
이런 감상이 나오는 이유는 현호정 작가가 소설에서 ‘의미망으로부터의 자유’, ‘언어로 된 상징계의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고의 구멍>의 서술 방식은 실제 인간 사회의, 세계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와 의미로 구성된 문법을 발명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은 독자들이 우리 세계의 의미 체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즉 상징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현호정 작가가 마련해 둔 소설의 장치들을 통해 다른 세계를 희미하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명확하지 않고, 명료하지 않다는 이야기의 특성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고고의 구멍>은 어쩌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감상 자체가 소설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나와 너는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설 <고고의 구멍>은 책이라는 매체가 지닌 언어의 한계 탓에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완전히 이해했더라도 그것은 개인만의 생각일 수 있으며, 우리의 이해는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영원히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음에도(같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 각자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다면 우리는 존재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균열의 격차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서로의 다름, 개별 주체인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에서 출발한 행동이든 우리는 어떤 감각이나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당위라는 관점 틀에 묶여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마음은 끊임없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세계는 ‘서로 이해할 수 없음’의 상태를 어떻게든 봉합해 버린,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상 또한 가장 많은 수로 이루어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졌다. 세상은 타협의 결과이기에 타협되지 않은 자, 즉 ‘소수자’라는 세계에서 배제된 존재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설 <고고의 구멍>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설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모호하게 전달된다. 현호정은 작가로서 어떤 생각의 인도자를 자처하지 않는 듯하다.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비워 놓고 각자에게 생각의 자유를 열어 둔다. “모든 상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아무는 것(84pg)”이라는 회복의 실마리를 제시하며 의미의 느슨한 연결망과 또다른 세계의 존재를 보여줄 뿐이다. 결핍과 상실이 만들어 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균열과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이제 독자인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
[『고고의 구멍』 서평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 및 출처]
현호정 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이자, 허블의 ‘초월’ 시리즈 세 번째 작품 『고고의 구멍』은 sf 성장소설이다.
앞서 초월 시리즈 2편, 김희선 작가님의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책도 기대하며 펼쳤다.
그렇게 읽은 『고고의 구멍』은 내게 정말, 어려웠다.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를 시도하면 할수록 모든 게 모호해져 갔다. 한 마디로 난해했다.
제1장까지 읽었을 때, 문득 내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출판사 지원 도서이고, 서평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소설 내용의 전반을 어떻게든 파악해야 했다.
『고고의 구멍』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힌트를 물색했다.
현호정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계정 피드를 살펴보고,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연필 샌드위치』와 작품 해설과 심사 경위를 읽어 보고, 젊작상 코멘터리 북과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 리뷰를 찾아 읽었는데, 그럴수록 소설에 대한 감상이 더 모호해져 갔다. 정말 알 수 없는 소설과 소설가였다. (물론 소설을 완독하고 해석해 본 지금 시점과는 감상이 다르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현호정 작가님이 인류학 전공자이시고, 거북이 두 마리를 키우고 계시고, 연극을 하신다는 점... 등단작과 수상 목록 등등. 소설을 이해하려다 의도치 않게 작가님을 덕질해 버린 것 같다.
아무튼 소설을 이해하고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얻은 힌트를 토대로 스스로 『고고의 구멍』 작품 해석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고고의 구멍』 서평은 자연스럽게 소설 분석에 가까워졌다.
『고고의 구멍』은 총 3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인데, <제1장>이 소설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한다. 어렵다거나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위와 같은 감상은 1장에 한정된다. 2장과 3장은 줄거리 위주의 서술이었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현호정 작가님이 소설에서(특히 1장에서) 구사하는 문법은 ‘글’이라기보다는 ‘생각의 형태’와 닮아있는 듯했다. 또한 1장에서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와 함께 ‘의미의 전복’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모호함이라는 감상을 불러온 이유인 것 같다.
-
소설 분석·해석 형식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참고했던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쓴 서평은 아래의 글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아물어야 하는 상처인 줄로만 알아서 무엇으로든 메워지기를 바랐다가, 조금 더 나아가자 가슴의 구멍이 이 세계에 난 구멍과 구분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구멍이 회복 내지 구원으로 통하는 탈출로처럼 여겨졌다.” -구병모 소설가 추천사
“데뷔 이후 특유의 생명력으로 ‘소녀와 신화’라는 주제를 변주해 온 그가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녀의 상실을 공유하는 행성과 그 창조 신화를 탄생시켰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호정의 성장에서 세계는 상처와 상실감을 주는 존재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고 상실의 구멍을 가진 존재로 바뀐다. 자신이 진심으로 환영하며 구멍을 메워주고 싶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렇듯 『고고의 구멍』에는 상실에 의한 서늘한 마음과 상실을 회복시키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중략) 소녀의 가슴과 여러 기후가 뒤섞인 행성에 뚫린 구멍. 소녀는 자기 가슴에 난 구멍을 보면서 행성의 구멍을 떠올린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소녀는 자신을 냉대했던 세계로부터 똑같은 상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상실을 회복시키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이렇게 소녀의 성장은 세계와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소녀를 중심에 두고 기존의 신화를 전복하는 활달한 상상력”(문학평론가 강지희, 《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라는 평처럼, 데뷔 이후 특유의 생명력으로 ‘소녀와 신화’라는 주제를 변주해 온 그가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녀의 상실을 공유하는 행성과 그 창조 신화를 탄생시켰다.” -알라딘 책소개
¹~⁴ 정봉석, “한국영화의서사미학”, 동아대학교, 2022
: 각주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면, 『고고의 구멍』의 해석은 학교 전공 수업 가운데 정봉석 교수님의 영화 분석 강의 <한국영화의 서사미학> 강의내용 필기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기에 출처를 표기한다.
※ 해당 서평은 동아시아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