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징 솔로 -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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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에이징 솔로 Aging Solo, 2023, 동아시아

내가 원했던 게 이거잖아 : 에이징 솔로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




내게 비혼은 낯선 삶의 방식이 아니다. 비혼 중년도 꽤 친숙한 존재이다.

20대 청년 여성인 나의 경우, 비혼의 삶을 생각하고 있으며 친척 가운데 친가와 외가에 모두 비혼 중년이 있다. ‘비혼비혼 중년이라는 키워드와 가까운 환경에 노출되어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여태껏 비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잘 없었다.

명절에 만난 친척들의 관심은 그해에 새로 태어난 아기가 거의 독차지했고 나머지는 결혼, 직장, 가족 이야기 등이었지 비혼자체가 화두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비혼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일종의 금기처럼 취급되거나 비혼 당사자들이 없을 때 걱정이나 염려의 형태로 잠깐 언급되었다가 금방 사라지곤 했다. 그마저도 어른들의 이야기라며 나는 이야기에 낄 자리가 없었고, 비혼 중년 친척분들께 직접 여쭤보자니 왠지 결례일 것 같아서 삼갔다.

 

나는 분명 비혼 중년의 삶 이야기를 듣는 일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성적으로 찾아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대책이 없었는데, 그 이유가 내 주위에 이미 비혼자이거나 비혼 예정자가 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위 친구들에게 결혼 의사를 물어보면 비혼을 생각하고 있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비혼 친척분들도 혼자의 삶을 잘 꾸려나가시는 것 같았다. 결혼 적령기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점점 연령을 높여 가는 상황에서 나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결혼 압박을 받을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내게 비혼은 오히려 결혼보다도 자연스러운 기본값이었다. 비혼 중년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자리 잡아 갈 내 삶의 방식으로만 여겨졌다. 비혼은 내게 불안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비혼과 홀로 나이 듦에 대해 딱히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곧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어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비혼으로 살기 위한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해졌다. 최근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일에 전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현실적인 비혼 1인 가구의 삶을 계획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을 선택한 사람의 삶은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졌지만, 비혼을 선택한 사람의 삶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삶은 주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비혼의 삶은 내 개인적인 이상에 가까운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진다는 걸 발견했다. 이른바 비혼 데이터가 내게는 부족했다. 나는 비혼의 삶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설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덜컥 겁이 났다.

 

에이징 솔로 Aging Solo는 비혼을 현실적인 문제로 적용하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차에 만난 책이다. 나는 앞서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8차례 이메일로 발행한 에이징 솔로 레터, ‘비혼 뒤 맑음의 구독자였기에 에이징 솔로사전 연재분을 읽으며 출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간된 책을 읽으면서는 책 제작에 관여한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을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찾던 이야기, 내게 필요했던 삶의 예제가 여기에 있었다.

 

김희경 저자는 책에서 에이징 솔로(Aging Solo)’를 홀로(Solo) 나이 들어가는(Aging) 중년 1인 가구로 개념화하고 있다. 에이징 솔로 Aging Solo1인 가구 시대, ‘비혼 중년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책이다. 김희경 저자는 1인 가구 시대에, 세대로 구분되는 비혼 집단 가운데 청년과 노년보다 담론장에서 존재감이 약한 중년의 삶을 에이징 솔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비혼과 1인 가구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을 이들이라면 19명의 인터뷰이의 삶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삶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 말이다.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의 모델이 필요하다라는 책 소개 문구처럼, 이 책은 에이징 솔로 Aging solo’들이 꾸려 온 삶의 방식과 나이 듦과 수반되는 질문의 응답이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저자의 사유와 통계의 해석을 통해 우리 사회와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던 중년 1인 가구에 대한 인식을 점검하고, 그들의 삶을 참조해 내 삶을 조금씩 그려볼 수 있었다.

 



이 책이 소중한 건 단지 비혼 중년 1인 가구라는 삶의 모델만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닌, 그들이 받아 온 질문과 시선을 하나하나 톺아보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언론과 미디어가 조장한 비혼과 비혼 중년에 대한 과장되고 부정적인 이미지와 낙인을 두고, 저자는 진짜 그런가?” 질문한다. 실제 에이징 솔로 19명이 인터뷰에서 "그렇지 않다"라고 응답하는 생생한 목소리가 여기에 담겨 있다.

 

김희경 저자에 따르면 비혼이 사회의 문젯거리로 여겨지는 원인은 비혼이라는 삶의 방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한국 사회의 가족 중심적인 문화,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성차별이 만들어 내는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고, 더 이상 사회가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흐름, 에이징 솔로들을 배제하지 않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골자이다. 에이징 솔로 Aging Solo에서 에이징 솔로들은 나이 듦의 과정에서 찾아오는 인생의 질문들에 답하며 자신들 앞에 놓인 제한과 통제에 저항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못 본 척하는 사회에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며 제도의 마련 및 개편을 요구한다. 동시에 그들이 제도 바깥의 삶을 상상하며 대안을 모색한 작업들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어 김희경과 인터뷰이로 참여한 19명의 에이징 솔로들은 "혼자 나이 들면 비참해지고 외로워진다(316pg)"는 저주에 가까운 '사회의 음모론'에 맞서 관계망이라는 연결로 서로 간 단절을 막고, 단절로 인한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느슨하게 맞잡은 손 덕분에 에이징 솔로들은 "홀로이면서 함께 Alone Together(315pg)"일 수 있다. 이렇게 목소리를 내 주는 사람이 있어 기쁘다. 선배들이 있어서 든든하고, ‘새로운 삶의 모델을 발명해 온 선구자들 덕분에 나는 내 삶의 방식 또한 어떤 이야기의 형태로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끊임없이 내 삶의 방식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할 순 있겠지만 이 책이 있어서 내 삶의 방향성을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에이징 솔로 세대의 삶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웠다. 유튜브 플랫폼 등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삶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없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비혼자의 삶을 다룬 콘텐츠의 댓글에 부정적인 인식이 드러나는 걸 여러 번 목격하면서 피로하기도 했었다. 기혼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로 비혼자들의 삶을 대신 전해 듣고 싶지 않았고, 내가 살아갈 삶을 미리 겪어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김희경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저자이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줄 사람들을 찾아 책으로 엮어 냈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에이징 솔로 Aging Solo는 우리 삶의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문제의 뿌리를 함께 살펴보고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으로서 소중한 작업물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다수이자 주류로 자리를 잡아 가는 1인 가구와 비혼이라는 삶의 형태를 함께 이해해 나갈 독자들에게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해당 서평은 동아시아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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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 초월 3
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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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 <고고의 구멍>, 2023, 허블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것] _<고고의 구멍> 서평




이 소설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고의 구멍>을 소개할 수 있는 키워드는 많겠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단어이자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되어 우선 위 문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소설은 주인공 고고가 마을에서 추방당하며 시작한다. 모두가 쌍둥이로 태어나 서로 켤레를 이루고 살아가는 마을에서 고고는 홀로둥이로 태어난다. 마을 사람들에게 혼자 사는 자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고, 혼자인 고고는 마을에서 배척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고고는 또 다른 홀로둥이 노노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마을에서 살아가는 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노노가 병으로 고고의 곁을 떠나면서 고고는 또다시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정상성이 결여된 존재가 된다. 고고가 마을에서 추방된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홀로둥이로 태어났다는 존재 자체의 결함 탓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고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존재가 부정당하고 마을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이다.

 

고고가 살아가던 마을 공동체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마을인들은 비정상적인 존재인 고고를 마을에서 추방하여 공동체에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제거 및 축출한 것이다. 마을은 행성 망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에서 추방된 고고는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부 인물로서 소수자이다. 이처럼 고고는 사회 공동체로부터 비정상적인 존재로 여겨짐으로써 소수자성이 부여된 존재이다.

고고는 자신의 소수자적 특성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마을에서 강제적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동시에 고고가 지닌 소수자적 특성은 고고가 마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을 것들을 할 수 있게끔 작용하기도 한다.

 

마을에서 추방되어 가장 먼저 다다른 습지에서 고고는 어느 날 가슴에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긴 것을 발견한다. 이제 고고는 홀로둥이이면서 가슴에 구멍이 난 존재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결함이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고고는 자신에게 일어난 신체의 변화에 혼란을 겪는다. 고고의 구멍은 정신적인 고통뿐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생생한 통증을 불러왔고, 그동안 고고가 일궈낸 안정적인 일상은 다시 혼돈 속에 빠진다. 고고는 생존을 위해 신체에 일어난 이상스러운 변화를 이해해야 했으며 동시에 달라진 신체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주지했듯 고고의 구멍은 고고에게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나, 고고가 구멍을 갖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하게 하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한다. 고고의 구멍은 고고라는 주체에게 어떤 이행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정리하자면 소설 <고고의 구멍>에서 소수자성은 그것을 지닌 존재(소수자)로 하여금 다른 환경과 세계에서 살아가게 하고, 고고는 이행 가능성을 지닌 주체로서 다른 신체로 다른 세계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전과 다른 존재로 바뀌어 나간다. <고고의 구멍>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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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고의 구멍은 스스로를 상실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한다. 고고의 구멍은 그것을 발견했을 당시에 생긴 것이 아닌, 이미 있어 왔던 상실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가 어느 날 문득 몸에 멍이 든 것을 발견하고부터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고고는 어느 날 구멍을 발견하면서부터 통증과 심정의 변화를 느낀다. 눈으로 직접 보는 방식으로 구현된, 즉 가시화된 상실의 증표로써의 구멍은 고고로 하여금 자신에게 상실이 존재함이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구멍을 인식한 고고는 자신을 상실한 존재로 정체화하면서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고, 그 탐구는 행성 망울의 여행으로 이루어진다.

 

고고는 마을에서 벗어나 행성 망울을 여행하며 자신의 신체를 통해 타인의 신체와 세계의 신체를 이해해 나간다. (여기서 신체마음과도 치환해 쓸 수 있다) 고고는 구멍으로 표상되는 자신이 지닌 결핍을 통해 새롭게 조우한 세계를 이해하고, 어떤 결핍을 지닌 존재들에 공감한다. 다시 말해 고고는 자신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결핍을 이해하고 있다. 고고는 무의식적으로 세계와 타인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와 동일시하고, 세계와 타인이 가진 결핍과 상실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상실한 부분의 치유와 회복을 시도한다. 고고가 행성 망울 곳곳의 구멍을 메우는 협곡인을 떠올리고 찾아간 것 또한 자신의 구멍과 세계의 구멍을 연관 짓는, 즉 신체의 동일시를 통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갈망이다.

 

고고는 결핍과 상실의 치유를 향해 나아가며 성장한다. 고고의 회복은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고고의 구멍>에서 회복은 구멍이 메워지는 것이 아닌, 구멍 난 자신의 신체 또는 그러한 신체를 지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고고의 신체와 자아의 회복 및 치유는 타자와의 마주침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리하자면, 고고의 상실에 대한 회복과 성장은 가슴의 구멍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고고가 지닌 결핍은 신체의 증상으로 발현되고 가시화되면서 구멍이라는 외상으로 발견된다. 고고는 처음에 자신의 신체의 변화(구멍이라는 외상)를 부정하고 회피한다. 외상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기까지 고고는 역동적인 심정의 변화를 겪는다. 놀람, 부정, 회피, 체념, 수치, 공포 사이를 오가는 진동 단계를 겪으며 고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구멍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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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은 고고가 새(birld)로 살게 한다. 여기서 전제로 생각해야 할 점은 새는 한 둥지에 정착해 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고는 마을에서 추방된 이후 계속해서 자신이 정착해 살 곳을 탐색한다. 하지만 둥지에 정착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영위할 만하면, 고고의 구멍이 고고를 둥지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고고는 가슴에 생긴 구멍에 의해 끊임없이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로서 살아간다. 고고가 둥지라는 보금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의적으로도 타의적으로도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고고가 지닌 존재의 특성, 소수자성으로 상징되는 홀로둥이구멍이 고고를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새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고고의 구멍은 고고가 새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의 증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가슴의 구멍은 고고로 하여금 자신을 상실한 존재로 인식하게 했고, 고고는 구멍의 존재로써 상실이 존재함을 잊지 않는, 다시 말해 상실을 기억하는 존재가 된다. 상실을 자각한 존재는 상실한 것을 메꾸려는 욕망에 따라 여기저기를 이동해 다닌다.

 

<고고의 구멍>이 취하는 소설의 구성은 둥지에서 새로운 둥지로, 또다시 새로운 둥지로의 이동과 이동하는 자의 성장이라는 이행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지닌 특성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돌아갈 곳의 재위치가 일어나며 고고의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여정이 이어진다.

고고가 여행하며 잠시동안 머무르는 곳들(습지, 협곡, 지도리)에는 각각의 세계관이 존재하고, 각 세계에 터전을 잡고 머무르는 공동체는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고고는 습지에서의 생활 요령이 협곡에서 통하지 않고, 협곡에서의 의미가 망울의 남반구에 있는 지도리에서 통하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여행에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과 마주치고, 마주 보고, 교류하며 고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고고의 여정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갈 곳으로써의 둥지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도달한다. 욕망을 추구(고고의 경우에는 결핍을 충족하려는-가슴의 구멍을 채우려는 욕망)하는 존재에게 있어야 할 곳으로서의 둥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개인이 어떤 것을 추구(욕망)할 때 한 장소에서 모든 것을 충족하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의 법에 귀속된 존재는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기에, 현호정 작가는 상징계에서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개인이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대안으로 여러 세계의 이동을 제시하고 있다고 서평자는 해석한다.

 

우리가 상징계에서 살아가는 상징적 주체로 존재하는 한, 그 세계의 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상상계와 실재계에서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의 어떤 부분을 상실하게-거세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은 금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기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도덕적인 당위나 법의 형태로 나타난다. 법은 언어로 되어 있기에 특정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언어로 이루어진 법적인 질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욕망 가운데 법 바깥에 있는, 위법의 영역에 속하는 욕망은 추구하는 것이 금지된다. 소설에서 고고는 존재 자체(홀로둥이)가 세계(마을 공동체)의 법에 위배되어 추방되었고, 고고는 마을에서 살아갈 권리(욕망)를 박탈(금지)당한다. 하지만 오히려 고고는 다른 세계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고고라는 존재가 지닌 소수자성이 세계의 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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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은 고고의 욕망이 기거할 보금자리(고고의 결핍이 해소될 장소), 돌아갈 곳으로써의 고정된 둥지를 찾는 것으로 끝맺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다른 새들과 함께 날기를 하며 활짝 웃는 고고의 모습을 회상하는 노노새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앞으로 고고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하나의 특정 세계에서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여러 세계의 이동을 통해 충족하며 살게 되지 않을까. 고고는 가슴의 구멍과 마을의 외투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되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신체로 고고는 망울 행성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여행 중에 만난 각 세계의 존재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 금과 밤, 노노새와 누누중총새를 비롯한 다양한 이들을 만나러 다닐 것이다. 행복은 한 군데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고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날아다닐 것이다. 하늘을 날 때를 비롯해 일상에서 느껴지는 구멍의 고통(물리적, 정신적 고통 모두)은 고고에게 어쩌면 끝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지도(196pg)” 모르나, 구멍의 존재감은 계속해서 고고를 상실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로 존재하게 할 것이다.

 

고고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넘나들며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자 또 그것이 가능한 존재이다. 더불어 고고는 상징계 바깥의 상상계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상징과 언어 바깥에 있는 상상되어지는 나, 즉 언어로는 묘사되거나 포착되지 않는 상징 바깥 세계의 상상되어지는 나”¹ 를 추구하는 고고는 상상계에 진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아버지의 법 밖에서 진짜 나를 상상하는 영역을 여성적 향유라 한다”² (여성적 향유라는 개념은 실제 생물학적 성별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일러둔다. 또한 소설 텍스트 내에서 고고가 여성이라는 내용을 찾지는 못했으나 책의 뒷표지에는 고고를 소녀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일러둔다) 그러한 맥락에서 고고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넘나들며 여성적 향유를 할 수 있는-상상계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³ 실재적 주체(real subject)’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이다. 결말 이후의 고고는 여러 세계를 왕래하며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욕망을 조금씩 충족하며,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제 고고의 구멍은 단지 어떤 결핍이나 상실의 상징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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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초월을 키워드로 소설을 살펴보려 한다. <고고의 구멍>은 허블의 초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초월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일까. 서평자는 소설 <고고의 구멍>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언어가 지닌 한계의 초월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가 두드러지는 부분이 <1>이다.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구멍>에서 의미의 전복을 시도한다. 특히 <1>에서 많은 공을 들인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그 세계의 새로운 의미망을 재구성하고 있다. 서평가는 소설의 <1>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하는 작업으로, <2><3>을 서로 다른 의미망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각 장은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망울의 창조 신화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다.

 

언어는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획득함으로써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나와 타자를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의미의 구분, 너와 나 사이의 다름에서 비롯된 의미의 차이는 우리 사이에 수많은 경계를 만들어 낸다. 마치 행성 망울 곳곳에 생겨나 있는 구멍과, 사람들 사이 이해의 불가능이 만들어 내는 관계의 균열처럼 말이다.

 

이러한 균열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일어나며 그걸 인지하더라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수용되기 마련이고 나와 너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인식과 표현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낙차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서로에 대한 마음과 동기가 선하더라도, 나의 생각은 행동이나 언어로 표현되어 상대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왜곡되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생겨나게 한다. 고고와 노노 사이에 있던 관계의 균열 또한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며 엇갈린 결과이기도 하며, ‘상대를 위한다는 마음이 곧 나의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나와 타인은 다른 존재로서 내가 의미하는 바와 타인이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누군가를 위한다는 행위는 온전히 있을 수 없다. <고고의 구멍>에서 다뤄지는 돌봄 노동또한 타인을 위하는 행위의 모순성을 드러내는 제재이다. 고고는 병에 걸린 노노를 돌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엇갈리며 생겨난 갈등과 오해가 관계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또는 나의 경우에만 비추어 타인을 대할 때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은 몸집을 불려 우리 사이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내거나 그것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한껏 노력해도, 너와 내가 갖는 존재의 차이라는 본질적인 다름 때문에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공존하면서 서로의 에고(ego)를 존중하는-상처입히지 않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구멍>에서 타자 사이의 인식의 낙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대화를 통한 이해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고고와 노노새는 대화를 통해 나와 너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음,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임을 확인하고 과거의 서로에게 미안했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런 인사가 균열의 완전한 메꿈으로 이어질 순 없겠지만 그들이 회복을 통한 새로운 관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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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정 작가는 소설을 통해 언어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고가 살아가는 세계를 비롯해 우리의 세계 또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따르는 사회의 법 또한 언어로 되어 있다. 언어가 만들어 내는 우리 사이의 간극과 균열은 우리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되어 개인의 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러한 맥락에서 현호정 작가는 우리 사이에 놓인, 언어가 만들어 낸 경계와 경계가 불러온 것(행성 전체의 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경계는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경계는 지리적 경계가 아닌 우리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경계이다. 그러한 경계를 상징하는 요소가 이다. 알은 자아(ego)’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에고를 가진 사람이자 자신의 에고를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아를 지키는 일은 존재에게 중요한 일이나, 자기방어가 강해질수록 나와 바깥을 구분 짓는 이라는 경계는 공고해진다.

 

나의 에고가 다치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에고이스트가 될 수 있다. 에고이스트는 나 중심적이고, 나밖에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즘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나 외의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나를 위해 타자를 이용한다. 에고이스트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판단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고고의 행성>에서 마을이 극도로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노노가 새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 것 또한 마을인들의 에고가 노노의 행위에 의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새를 먹지 않는 문화의 마을에서 생존을 위해 새를 먹어야만 했을 때, 노노는 새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양보했던 노노의 도덕적인 행위는 마을 사람들을 도덕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도덕판단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마을인 자신들이 자신의 자아가 추락했다고 느껴 모든 비난의 화살을 노노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러한 비난의 눈초리와 배척은 노노와 함께 살아가는 고고에게도 함께 돌아간다.

 

에고가 성숙한 자아를 가진 존재, 성숙한 의미의 상징적 주체(symbolic subject)’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이해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자신의 에고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타자의 에고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에고를 깨트리지 못하고 알 안에 갇힌 상태,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 이해의 부재는 나와 외부와의 단절을 불러 온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비롯해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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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춘다면 개인은 의 결핍에만 갇힌 존재가 될 수 있다.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사이에 놓인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현호정 작가는 고고의 회복과 성장을 통해 우리 사이의 다름이라는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현호정 작가가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의미망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의미는 차이에서 비롯되며 의미는 너와 나의 다름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우리 사이의 경계, 나와 타자의 경계, 나와 외부와의 경계를 견고하게 만든다. 이는 의미망 바깥에 놓인 자들, 소수자들을 배제하기도 한다.

 

현호정 작가는 소수자라는 존재가 지닌 가능성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의미망,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고고의 성장, 즉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될 수 있는 범위를 늘리는 과정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고고의 구멍이 고고를 여행자로 만들었듯, 상실이 존재함은 상실한 것이 무엇이든 상실의 주체를 나아가게 한다. 상실은 상실의 대상에게 상실한 것을 메꾸고 채우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이 심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누구나 눈이나 귀 등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실을 갖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상실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결핍(에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고의 구멍>의 표지에서 고고는 자신 앞에 놓인 커다랗고 새카만 구멍을 바라보고 있다. 고고가 바라보는 구멍은 자신이 가진 결핍이나 상실이기도, 타인이나 세계가 가진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 이외의 타인이나 세계가 지닌 상실과 결핍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가진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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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신화라는 키워드로 이 소설을 해석하기엔 배움이 부족하고 소설 내용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일단 던져 본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고고는 마을이라는 인간 사회에서 분리되어 오로지 혼자, 자신의 신체로 자연과 대면한다. 여기서 자연은 사회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고는 마을 밖의 자연환경에 놓이면서 아는 것(인간 사회의 논리, 상식, 규칙, 의미)’실제로 몸소 느끼는 것의 차이를 깨닫는다.

 

그저 앞으로 열심히 걷는 것만으로도 다른 기후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몇 년 전 마을에서 습지로 이동하던 경험에 기대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몸소 느끼는 일은 아는 일과 전혀 무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던 것이었다.”(38pg)

이처럼 고고는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고 이해(기술)되었던 자연을 실제 몸소 체험하면서 차이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 체계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고고의 구멍>의 이야기는 고고가 자연을 몸으로 겪으며 스스로 이해한, 세상에 대해 기술하는 신화의 창조과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사회가 이미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벗어나 직접 자연을 이해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고고의 신화 창조 과정을 이 소설의 큰 틀로 이해해 봐도 좋지 않을까.

 

소설 <고고의 구멍>이 구사하는 문법은 왠지 시를 닮아있다. 극을 닮아있기도 하고,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독자분들은 이런 감상을 서정적이다’, ‘추상화 같다라고 표현하고 있었는데 본 서평가도 공감한다.

이런 감상이 나오는 이유는 현호정 작가가 소설에서 의미망으로부터의 자유’, ‘언어로 된 상징계의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고의 구멍>의 서술 방식은 실제 인간 사회의, 세계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와 의미로 구성된 문법을 발명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은 독자들이 우리 세계의 의미 체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즉 상징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현호정 작가가 마련해 둔 소설의 장치들을 통해 다른 세계를 희미하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명확하지 않고, 명료하지 않다는 이야기의 특성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고고의 구멍>은 어쩌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감상 자체가 소설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나와 너는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설 <고고의 구멍>은 책이라는 매체가 지닌 언어의 한계 탓에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완전히 이해했더라도 그것은 개인만의 생각일 수 있으며, 우리의 이해는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영원히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음에도(같아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 각자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있다면 우리는 존재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균열의 격차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서로의 다름, 개별 주체인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에서 출발한 행동이든 우리는 어떤 감각이나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당위라는 관점 틀에 묶여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마음은 끊임없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세계는 서로 이해할 수 없음의 상태를 어떻게든 봉합해 버린,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상 또한 가장 많은 수로 이루어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졌다. 세상은 타협의 결과이기에 타협되지 않은 자, 소수자라는 세계에서 배제된 존재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설 <고고의 구멍>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설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모호하게 전달된다. 현호정은 작가로서 어떤 생각의 인도자를 자처하지 않는 듯하다.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비워 놓고 각자에게 생각의 자유를 열어 둔다. “모든 상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아무는 것(84pg)”이라는 회복의 실마리를 제시하며 의미의 느슨한 연결망과 또다른 세계의 존재를 보여줄 뿐이다. 결핍과 상실이 만들어 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균열과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이제 독자인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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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서평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 및 출처]

 

현호정 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이자, 허블의 초월시리즈 세 번째 작품 고고의 구멍sf 성장소설이다.

앞서 초월 시리즈 2, 김희선 작가님의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책도 기대하며 펼쳤다.

 

그렇게 읽은 고고의 구멍은 내게 정말, 어려웠다.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를 시도하면 할수록 모든 게 모호해져 갔다. 한 마디로 난해했다.

1장까지 읽었을 때, 문득 내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출판사 지원 도서이고, 서평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소설 내용의 전반을 어떻게든 파악해야 했다.

 

고고의 구멍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힌트를 물색했다.

현호정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계정 피드를 살펴보고,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연필 샌드위치와 작품 해설과 심사 경위를 읽어 보고, 젊작상 코멘터리 북과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 리뷰를 찾아 읽었는데, 그럴수록 소설에 대한 감상이 더 모호해져 갔다. 정말 알 수 없는 소설과 소설가였다. (물론 소설을 완독하고 해석해 본 지금 시점과는 감상이 다르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현호정 작가님이 인류학 전공자이시고, 거북이 두 마리를 키우고 계시고, 연극을 하신다는 점... 등단작과 수상 목록 등등. 소설을 이해하려다 의도치 않게 작가님을 덕질해 버린 것 같다.

아무튼 소설을 이해하고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얻은 힌트를 토대로 스스로 고고의 구멍작품 해석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고고의 구멍서평은 자연스럽게 소설 분석에 가까워졌다.

 

고고의 구멍은 총 3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인데, <1>이 소설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한다. 어렵다거나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위와 같은 감상은 1장에 한정된다. 2장과 3장은 줄거리 위주의 서술이었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현호정 작가님이 소설에서(특히 1장에서) 구사하는 문법은 이라기보다는 생각의 형태와 닮아있는 듯했다. 또한 1장에서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와 함께 의미의 전복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모호함이라는 감상을 불러온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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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석·해석 형식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참고했던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쓴 서평은 아래의 글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 부분도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아물어야 하는 상처인 줄로만 알아서 무엇으로든 메워지기를 바랐다가, 조금 더 나아가자 가슴의 구멍이 이 세계에 난 구멍과 구분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구멍이 회복 내지 구원으로 통하는 탈출로처럼 여겨졌다.” -구병모 소설가 추천사

 

데뷔 이후 특유의 생명력으로 소녀와 신화라는 주제를 변주해 온 그가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녀의 상실을 공유하는 행성과 그 창조 신화를 탄생시켰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호정의 성장에서 세계는 상처와 상실감을 주는 존재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고 상실의 구멍을 가진 존재로 바뀐다. 자신이 진심으로 환영하며 구멍을 메워주고 싶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렇듯 고고의 구멍에는 상실에 의한 서늘한 마음과 상실을 회복시키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중략) 소녀의 가슴과 여러 기후가 뒤섞인 행성에 뚫린 구멍. 소녀는 자기 가슴에 난 구멍을 보면서 행성의 구멍을 떠올린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소녀는 자신을 냉대했던 세계로부터 똑같은 상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상실을 회복시키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이렇게 소녀의 성장은 세계와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소녀를 중심에 두고 기존의 신화를 전복하는 활달한 상상력”(문학평론가 강지희, 문학동네2022년 봄호)이라는 평처럼, 데뷔 이후 특유의 생명력으로 소녀와 신화라는 주제를 변주해 온 그가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소녀의 상실을 공유하는 행성과 그 창조 신화를 탄생시켰다.” -알라딘 책소개

 

¹~정봉석, “한국영화의서사미학”, 동아대학교, 2022

: 각주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면, 고고의 구멍의 해석은 학교 전공 수업 가운데 정봉석 교수님의 영화 분석 강의 <한국영화의 서사미학> 강의내용 필기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기에 출처를 표기한다.


※ 해당 서평은 동아시아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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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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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_1급 기밀 문서 



CAUTION !

해당 책, 김희선 작가의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기밀 문서입니다.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의 줄거리는 허블과의 비밀 유지 계약(NDA)에 따라 공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진실을 알아야겠다면

해당 메모를 발견한 분들을 위한 몇 가지 제한된 단서들을 제공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단편의 키워드를 통해 단서를 제공할 것이며, 

해당 메모는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메모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일 테니, 자세한 진실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기밀 문서를 직접 참고하십시오. 



일러두기. 

책 <빛과 영원의 시계방>에 실린 8편의 단편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이며, 기본 이야기 틀은 '비밀을 추적하고, 끝내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서 1. <공간 서점> ⏱📖

시계수리공 아버지, 시계방과 헌책방

1980년 봄, 대체 역사 


"혹시 세상에 길은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서 2. <오리진> 🎭

교황청, 타락 혹은 신앙의 길, 성스러움과 불경스러움

금기, 언어의 힘, 시뮬레이션 우주론 


"중요한 물건일수록 깊숙하고 특별한 장소에 숨길 거라 지레짐작한다" 



단서 3. <달을 멈추다> 🌕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 미타찰, 약속, 꽃

인간성, 사랑, 감정, 감각, 의식(영혼)업로딩, 포스트휴먼 


실재의 삶과 컴퓨터 속 전기적 생명, 육신의 소멸과 의식의 불사, 영생, 합일(용융), 영원한 평화 


"그때 우린 살아있는 것 같았어. 모두가 하나라는 느낌, 그걸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단서 4. <꿈의 귀환> 🌌

미항공우주국(NASA), 유리 가가린, 지구 궤도 선회, 꿈 


냉전, 우주 경쟁, 인간 본성, 이성 과대평가, 전쟁과 학살

심리학, 뇌신경과학, 정신분석학, 꿈 기록 장치

꿈의 분석과 해석, 의식과 무의식 


형이상학의 형이하학 전환, 유물론, 실재(물리적 형체) 

측정-기록할/될 수 없는, 정상과 비정상

양자이론, 확률, 고정, 종말과 희망, 의미



단서 5. <악몽> 👁

행운과 불운, 불행과 고통, 평화와 안정, 회피와 도피

이상적 삶, 현실과 환상, 기시감, 기억, 인류의 행복, 구원 

"당신은 기억을 만들고 그것은 당신 삶의 일부가 된다." 



단서 6. <가깝게 우리는> ⚙

노인 소외, 고독사 문제, 무관심, 무연고자

노인의 글쓰기(자서전-회고록) 


세계 최고 시계태엽장치 제작 기술자, 

자동인형 오토마톤,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 


자본주의, 사회주의, 여성 노동운동,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 해방 시위, 자본가, 세뇌 


착하고 능력있고 지치지 않는 노동자, 제국, 노동 형태 변화, 4차 산업혁명 패러다임의 전환

역사, 기록, 기억, 기념, 선행된 믿음에 뒤따르는 실재 



단서 7.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축구, 월드컵 경기, 실축한 선수 향한 비난, 국위선양

광산, 파독광부, 독일, 한인 이주 노동자

정부 주도하, 경제, 박씨와 이씨 


한국 근현대사, 개인의 기억, 합의와 공유가 불가능한 서사, 기억의 공식화(교과서화), 증언, 기억의 공백 


흥신소, 행방불명, 자아정체성, 정신분석학

맨인블랙, 기억의 소멸/매몰/매장, 집단 망각, 부작용, 

믿음이 은폐하는 것과 만들어내는 것 


"나는 대답하고 싶었어. 여기에 있다고. 

여기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



단서 8. <끝없는 우편배달부> 📦

우편배달부, 꿈, 현실과 환상, 영화, 다잉메시지 


불행의 일상화/보편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평균-보통의 삶, 획일화된 삶, 노동권 묵살, 사회 부조리 


무사안일주의, 문제의식 부재, 사회 문제, 라돈 방사능 침대, 노동자를 지켜 줄 시스템의 부재, 비판적 목소리의 부재,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논리의 내면화와 단념, 무기력 


'노동자의 본분', 규율과 시스템의 주객전도, 병든 사회의 부작용, 오류, 진실, 기억 


자의식, 정신분석학, 자크 라캉, 거울 단계, 정체성 확립 과정, 과학 기술, 인***, 가**실 


"하긴, 매일 이 일대를 돌아다니니, 

아무데서고 한 번쯤은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 해당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책의 컨셉과 어울리는 서평(내지 콘텐츠)을 제작해보고 싶었는데, 책에 다가가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은 생각보다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진실을 추적해 보시길 바라며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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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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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

<빛과 영원의 시계방>, 김희선, 2023, 허블

 

 

김희선 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SF 전문 출판사 허블의 초월 시리즈중 두 번째 단편집으로, 문학의 장르 경계를 초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현실의 제약과 한계를 넘어서고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SF 장르의 특성과 잘 어울리는 시리즈 제목이다.

 

초월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 <빛과 영원의 시계방> 또한 SF 장르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SF라는 장르명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김희선 작가가 문학과 글쓰기를 대하는 인문학적인 태도는 SF 장르의 화법과 상상력으로 구성된 세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따뜻한 과학자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인문학적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현실 위에 환상을 덧씌워 치밀하게 설계된 여덟 개의 세계관은 하나같이 매혹적이면서도 미스테리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현재 문학적 상상력으로 대중매체에서 창작되는 사이언스 픽션(SF)의 세계관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언젠가 미래 인류에 도래할 것이다. 최근에는 챗GPT의 등장과 인공지능 툴의 상용화며 과학 기술이 바꾸어 놓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은근한 공포감을 동시에 불러왔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의 단편들은 과학이 마법의 영역에 진입해 우리의 생활 양식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계관을 무대로,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기억하고 계승되어야 할 중요한 진실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에는 우리가 관심 가지고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나 감춰지고 외면되어 온 존재들, 시간의 저편으로 자꾸 사라져가고 행방이 묘연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워져가고 망각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SF적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현재-미래의 현실로 소환한다.

이처럼 <빛과 영원의 시계방>의 단편들은 우주와 시공간, 가상현실과 AI 등 과학 기술의 영역을 다루면서도,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현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인문 사회의 영역을 함께 다루고 있다.

 

여덟 편의 단편에는 이라는 오브제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은 문자 기록물을 엮은 기술(테크놀로지)로서 일종의 타임머신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 역시 한 권의 책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해 기억되어야 할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기록으로 세상에 전달한다. 작가는 책이라는 타임머신에서 시계의 태엽을 감아 독자들을 과거 혹은 미래로 보낸다. 그렇게 도착한 낯선 시공간에서 독자들은 잊혀져가는 이들을 기억하거나 새로 도래할 세상을 상상함으로서 나의 인식을 재고하고 어쩌면 미래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나는 책을 읽으며 단편에 소개된 이야기들을, 행방이 묘연해지거나 사라진 사람들을 기꺼이 기억하고 싶어졌다.

 

<··>에 실린 단편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숨겨진 진실을 추적해 알아내는 이야기라는 이야기 구성을 따르고 있으며,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탐정은 진실 혹은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행적을 추적하여 진실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끝내 진실과 마주한다. 독자는 탐정의 시선으로 저자가 숨겨놓은 단서를 조합하며 비밀을 파헤쳐 가고, 진실을 둘러싼 비밀의 장막들을 하나씩 들춰내게 된다. 여덟 편의 이야기 곳곳에 제시된 상징 기호들의 의미를 가늠하며 읽다 보면 어느샌가 스릴과 서스펜스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또 각각의 단편들에는 비슷한 표현이나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반복되는 표현들에 집중하며 읽으면 작가가 이야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어나 문장을 통해 은근히 전달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열린 결말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또한 여덟 편의 단편이 공유하는 공통점인데, 명확하지 않은 끝마무리는 진실을 마주한 독자에게 혼란스러움과 미스테리를 안겨 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열린 결말이 단편들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는 각각의 단편에서 다루는 키워드에 대한 기본 지식이나 관심이 있다면 훨씬 재미있고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문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을 비롯해 정신분석학, 심리학, 뇌과학, 천문·우주학, 물리학, 과학기술(인공지능, 가상현실) 분야 중 어느 하나에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매우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독서 모임의 주제도서로 삼기에도 좋을 책이다. 김희선 작가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사회가 가진 병적인 부분을 SF의 문법, 소설의 문장으로 드러내고 꼬집어 낸다. 인간에 대한 심도있는 탐구와 인간을 향한 글쓰기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던 책이기에, 생각해 볼 지점도 풍부하고 토론하고 싶어지는 글들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선 넘(나드)김희선 작가의 현실 기반 판타지를 읽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판타지가 시작되는지 혼동되는데, 나는 이 기묘한 흔들림이 좋았다. 재미와 공포를 함께 가져다주는 흔들림이 마음에 파동을 만들어 준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중 하나는 기록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기록과 기억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 책이다. 작가가 마련해 둔 책이라는 타임머신으로 함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 있길 바란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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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2023-03-2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과 디자인 모두 좋았습니다. 김희선 작가의 신작도 기다려집니다! 다만 책에 사용된 다른 폰트가 가독성이 떨어져 익숙해지기 전까지 읽기 힘들어 아쉬웠습니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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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계의 이야기이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
 -한국형 SF 장르로 재구성된 민족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 그리고 혼돈 속에서 피어난 사랑


매년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라, 화국은 서양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인 라잔 제국에 점령당한다. 라잔의 식민 통치로 화국은 '14행정령'이라는 이름이 붙어 전국에 주둔한 라잔 군대에 의해 통치된다. 
라잔 총독부는 화국인들에게 라잔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장려하고 생존을 위해 라잔어를 배우는 화국인들이 늘어간다. 또 라잔은 군수 물품 생산을 위해 화국의 철을 수탈하고, 화국에는 라잔의 전쟁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철도가 들어서고 전기가 공급된다. 


°°
이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또는 한국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한 SF 소설이다. 
화국은 조선(한국)으로, 라잔은 일본으로 치환되기에 소설의 배경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처럼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에서 역사적 사실이 재현되는 방식은 '우화'이다. 
소설은 항일 서사를 기본 플롯으로 삼으면서도 현실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한국)->화국', '일본->라잔'으로 변경해 역사적 사실을 우회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SF 판타지 장르의 묘미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역사 속 실제와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를 대조하며 읽으니 마치 닮은 그림 찾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한국(조선)을 상징하는 화국의 모습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찬가지로 라잔의 모습에서 일본 제국 통치, 일본의 특성을 찾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때 유행했던 '외국인은 못 읽는 숙박업소 후기' 같았다고나 할까. '이런 것까지?!' 할 정도로 역사와 문화를 디테일하게 반영하며 풍자를 곁들인 것도 있었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한국인이거나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한국 문화가 소설에서 어떻게 빗대어 표현되었는지, 새롭게 가미된 SF 판타지 요소는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며 읽어간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동양 마법 세계관에서 동양의 요괴 구미호가 출몰하거나 신화 속 존재인 용이 등장하는 등,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관 속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은 움직이고, 싸우고, 투쟁하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한 소설이지만 역사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나조차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서평자는 언젠가부터 역사 콘텐츠를 편안하게 즐기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를 테면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탄압과 그에 맞서는 조선의 독립운동 서사의 반복 노출로 인한 지겨움', '역사 고증 콘텐츠를 소비하며 한국인으로서 민족적인 고양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의무감', '우리 민족의 역사이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과 콘텐츠 제작자의 의도와의 충돌'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역사 콘텐츠를 기피하게 되는 이유들을 흐리게 만들었다. 
'내 나라 이야기', '우리 민족 이야기', '한국의 실제 역사 이야기' 이기에 민족의 상흔에 깊이 공감하며 경건하게 읽어야 한다 ... 라는 이른바 민족주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소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가 우화나 상징으로 현실의 것을 빗대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와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 서사'의 틀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설정을 비틀고 소설의 큰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기 때문에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이게 SF 판타지 소설의 묘미인 듯싶다. 화국과 라잔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오늘날 콘텐츠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양 SF 판타지, 여성과 여성의 사랑, 검과 붓(무예와 예술), 민간 신앙-판타지와 서양의 과학 기술(마법/부적과 전차/소총) 등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조화를 이룬 세계를 당신도 소설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해당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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