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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천 개의 파랑』은 2019년 제 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 때문에 책 읽기도 전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책 한권이 모든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기는 힘든 일이지만, 한 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 다수의 대상에 나 또한 포함 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책을 펼친다.
책을 펼치자 마자 짧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C-27'이라는 존재가 작은 방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이야기. 이 글을 보자마자 이 책은 나와 잘 맞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감성적이고도 아련한 느낌이 들 것 같은 책이었다. 그런 첫 인상이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이 이야기의 결말로부터 시작된다. 한마디로 누군가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이 결말까지 다다르기 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회상하는 듯이 빠져드는 이야기이다.
『천 개의 파랑』에는 단 한명의 주인공이 없다. 한개의 휴머노이드와, 한 마리의 말과, 여러명의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희망차지도 밝지는 않지만 인간적이고 따스한 이야기이다.
C-27은 기수 휴머노이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조 과정에서 기수 휴머노이드를 위한 소프트웨어 칩이 아닌 연구생의 가방에서 떨어진 인지와 학습 능력 소프트웨어가 삽입된 무언가 잘못된 휴머노이드다.
C-27은 다른 기수 휴머노이드와 좁디좁은 화물칸 안에 실렸다. 그렇게 어디론가 실려가는 중 비좁은 창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C-27은 여러가지 단어들을 떠올렸는데 그 단어는 딱 천 개였다.
화물차가 멈춰선 곳에서 C-27은 '투데이'라는 말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도민주라는 직원에게 말과 교감하는 법, 고삐를 당기는 법, 말의 목덜미를 쓸어주는 법, 등자로 말허리를 차는 법 등을 배워나갔다. 하루에 5시간을 훌녈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데에 쓰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C-27은 경기장에 서서 하늘과 나무를 관찰했다. 매일 시간마다 색과 모양이 바뀌는 하늘을 바라보며 C-27은 세상에 단어가 천 개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C-27은 투데이와 교감을 잘 했고, 그 덕에 그 둘의 경기 성적은 점점 좋아졌다. 투데이의 몸값은 점점 뛰어올랐고, 돈을 벌기 위한 인간들은 쉴 틈 없이 투데이를 달리게 했다. 그리고 투데이는 신기록을 경신한지 3개월 만에 무너졌다. 투데이는 관절이 아팠고,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투데이의 고통을 알아챈 것은 오로지 C-27뿐이었지만 그 누구도 로봇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C-27은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경기 중 스스로 낙마했다.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에 밟혀 골반과 하반신이 전부 부셔졌지만, C-27은 투데이를 지켰다.
이제 쓸모 없어진 C-27은 수거업체에 실려가 몸이 조각조각 나위어 다른 기계의 부품에 쓰이거나 경마박물관에 박제될 미래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뛰지 못하는 투데이는 안락사 당할 것이다.
하지만 C-27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한 소녀가 앞에 있었다. 열일곱 소녀인 우연재. 그리고 그녀는 C-27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브로콜리, 줄여서 콜리.
연재는 아이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빨랐다. 그래서 열한살 때 학교 체육대회 이어달리기 주자로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연재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서 연재가 달릴때 계속 '더!'를 외쳤고, 그에 질린 연재는 정해진 레일을 일탈해 근처 경마장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빠르게 뛰는 말과 그 위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기수 휴머노이드를 봤다.
그 이후로 연재에게 달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공부도 포기한 채 학교에서는 아웃사이더로 지내며 밖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연재를 받아줄 곳은 얼마 없었고, 간신히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는 휴머노이드인 '베티'에게 빼앗겼다.
연재는 아르바이트에서 짤린 날, 집 근처 경마장으로 갔다. 4년전 쯤 부터 경마장을 드나든 자신의 언니 은혜를 찾아서. 그리고 그곳에서 C-27을 발견했다. 경기 도중에 낙마해 뒤에서 오는 말에게 밟혀 하반신이 망가졌다는 말을 덤덤히 하면서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다는 독특한 휴머노이드. 그래서 연재는 받은 퇴직금을 탈탈 털어 이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샀다.
『천 개의 파랑』은 여러 인물들의 시점으로 전개가 된다. 콜리와 연재 외에도 다리가 불편한 은혜, 연재와 은혜의 엄마이자 소방관인 남편을 잃은 보경, 경마장의 말들을 담당하고 있는 수의사 복희 등등.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로봇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연재가 콜리의 다리를 고치고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안락사를 앞둔 투데이의 수명을 조금더 연장 해 다시한 번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인물 한명 한명의 절망과 고뇌, 깊숙히 가라앉고 있는 씁쓸한 과거들을 인물 시점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편리함과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 그리고 그 로봇 때문에 뒤로 밀려난 인간. 로봇과 과학으로 인해 인간들 사이의 빈부격차는 더 뚜렷해지고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잔인해 진다.
결국 투데이와 콜리는 다시 한 번 달렸다.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야유는 무시한 채, 그저 그들 스스로의 바람으로 빠르게, 자유롭게. 설렁 무릎이 완전히 망가질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