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잔을 석양에 가져다 대자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석양을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였다. - P157

나 또한 나중에 죽고 나면 다른 이가 이집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은그렇다. 잠시 자신의 생을 사는 동안 빌려 쓰는 공간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그 집의 역사가 된다. - P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면 되는데, 그중 하나에는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 해. 소개가 끝나면 다른 친구들이 어떤 게 거짓인지 알아맞힐 거고. 그럼 나머지 네 개는자연스레 참이 되겠지? - P14

바람돌이는 채운이 실수할 때마다 ‘배움이란 원래 그런 거‘라며
‘세상에 틀리지 않고 배울 수 있는 언어는 없다‘고 했다. - P23

꼭 경치가빼어나거나 유서 깊은 장소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자신이다른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곳, 검색이나 추적이 안 되는 곳이면 족했다. 거기가 어디든 지저분한 소문이 못 건너오는곳, 아버지도 하느님도 못 따라오는 곳이라면 모두. - P26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P66

-가난이란.....
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 P85

채운아, 어제 너는 여기 왔지. 지도에도 잘 안 뜨는 곳에기댈 만한 어른 하나 없이 너 혼자 왔지. 네 또래 아이들은잘 모르고, 또 몰라야 하는 장소로, 환기가 잘 안 돼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가 고인 곳으로, 나를 만나러. -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숲속을 걸을 때도 가끔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지 않는가. 그것은우리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바람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주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서 저녁밥이나 드셔 헛심 쓰지 말고. - P410

승주와 제이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뭔 깨달았다. 죄책감과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분노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주로 분노를 성공적으로 억누를 때 듣는 칭찬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사내다움을 강요하는 동시에 어른스럽기를 바랐다. 내가 어른스러울 때 자랑스러워했다. 나는좀처럼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 P435

‘결혼한 적이 있어요. 아주 오래전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얼굴도, 목소리도, 몸도, 마음도, 잠든 숨소리마저도. 그러니까 내게는 그랬다는 것이다. 우리가함께 지낸 시간은 짧았으나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내게도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은 시절이기도 했다. 그녀는 제이가 말했던 신비로운 존재, 자아라는 내 안의 신전에 들어온 ‘누군가‘였다. - P439

나는 처음으로 제이가 부러웠다. 자신에게 온 사랑을 알아봤다는점에서, 사랑해야 할 때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사랑을지켜야 할 때 지키는 법을 알았다는 점에서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 P4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나는 고국이 아니라......." 그는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너한테 온건데."
아마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나 보았다. 온몸에서 시계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배꼽 안쪽, 심장, 턱 밑, 심지어 잇몸까지 똑딱똑딱. 입이 열리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뭐가?"
묻는 제이의 눈이 생기를 띠며 반짝거렸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나한테 와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에게 안겨 있었다. - P183

매 순간순간 나는 제이에게 길들여졌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내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