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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 레볼루션 - 기술 패권 시대, 변화하는 질서와 한국의 생존 전략
이희옥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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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에서 큰 부와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인식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엔지니어나 과학자들이 추동하고 있는 혁신 경제 분야"이며, "수많은 중국의 2030 젊은이들은 학부 공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으려 하고, 대학원 진학률도 높"다. 그리고 "창업 결심을 많이"해, "자기 돈으로, 또는 특허를 내서 차근차근 창업하겠다는 게 아니고 거의 무작정, 속된말로 '맨땅에 헤딩'"(110)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는 데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KBS 다큐 인재전쟁이 떠올랐다. 한국의 방향성은 인재(인재)라기 보다는 인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4세고시부터 시작해 공부가 아닌 점수를 향한 잘못된 교육관,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경쟁 속에서 모두가 의사가 되려는 어떤 희망 고문같은 사회적 레일, 계속해서 축소되고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공대, 유출되는 석박사 인재들(최근 중앙일보에 따르면 2030 이공계 인재 62%가 해외로 갈 생각 중이라고).. 이러한 지점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는데, 그건 도태 혹은 생존의 갈림길이다.

책은 중국의 정치상황(당국가체제)와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중국의 발전을 두고 스터디하는 것은 유의미하나, 그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 없을 강조한다. 일단 국가가 투자하는 예산 자체가 차이가 너무 나며(작년에 중국 정부가 지방 정부까지 포함해 R&D에 투자한 규모가 800조원이라고 한다. 이재명 정부가 내년 AI 예산안으로 밝힌 금액은 10조 100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금액이다. 또한 중국은 패스트트렉이라고 천재들만 모아서 그 안에서 또 경쟁을 시키고 천재 중의 천재를 양성하는 과정을 정부와 대학이 주도한다. 중국의 대학 졸업자 수가 매년 1200만명이 졸업하고 그중 절반이 STEM분야(과학·기술·공학·수학) 전공이고, 그와 관련해 박사 배출만 매년 8~9만명이다(136-137쪽). 한국은 작년에 수능 본 인구만 역대로 가장 적은 55만염이 지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 위에 중국은 공산당이고 한국은 민주주의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프라이버시와 인권이 중요한 대한민국에서 한 목표로 달려가는 범국가적인 주도와 개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에서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각자의 해결책을 말해준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두 가지인데, 먼저 '엘리트 주의는 위험하다'는 것과 두번째는 '적시에 정부 개입은 필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합의해야 할 지점도 너무 많고 들어야할 목소리, 말하고 싶은 사람들의 자유가 맞부딪히는 장이기 때문에 느리다는 인상을 심기에 충분하다(실리콘밸리의 테크브로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 지도 체제, 특히 "당이 중심이 되어 엘리들이 정책을 만들고 밀고 나가는 중국의 방식이 맞지 않냐"는 지적에 있어 권석준 교수님은 "장기적인 지속능성 측면에서 봤을 때 무척 위험한 발상"(142-144)이라고 지적한다. 당의 체제에 의해 한 목표로 나아갔을 때 전문성이 생긴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거대한 산업구조나 경제 생태계를 일일이 파악할 수 없으며, "톱다운 방식 산업 정책 중 가장 큰 맹점 중 하나는 과연 어디서 파괴적인 혁신이 나올 수 있을지 그 징조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144)을 말씀하셨다. 지속가능한 연구가 곧 지속가능한 국가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국가의 사명이자 숙명이다. 하지만 동시에 시장의 실패 가 분명히 나타날 경우 교정을 위해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도 맞다. 김영한 교수님은 외부 효과(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가거나 혹은 아무 잘못도 없이 피해가 발생하는 현상)을 국가는 항시 확인하여 적절하게 개입해야 하며,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개입은 어려울 순 있어도 롱테일 법칙이 AI시장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롱테일 안에서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정부와 민간이 적극적이고 절박하게 협업해 눈 앞에 놓인 과제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물론 나는 AI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경제라던가 국가적인 관계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최근 가장 큰 화두인 AI가 가장 빠르고 깊이있게 읽혔다. 책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문가들과 함께 다방면으로 톺아본다. 이러한 시각은 나에게도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혐중시대에 살면서 혐오는 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 그러한 태도와는 멀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중국인이 큰소리로 지하철에서 통화하면 '왜 저래'하는 감정 그 이상의 혐오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모르기 때문에 혐오가 시작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 또 알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이번 하니서포터즈에서 가장 인상깊은 책이었다.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면,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진짜로 느끼고 싶다면, 그리고 혐오가 답이 아니라 관찰이 답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추천한다.


*해당 리뷰는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제공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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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전쟁 - 제국주의, 노예무역, 디아스포라로 쓰여진 설탕 잔혹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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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전쟁>을 이번달 도서로 선택한 이유가 있다. 나는 그동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으면 읽었지, 정작 역사책 자체는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설탕'이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가진 책이 9월 도서로 선정되었기에 무리없이 선택해서 읽게 되었다.


<설탕전쟁>은 말 그대로 설탕수수와 그 농장을 가꾸고 일구려는 지주들과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노예제도에 포커스가 맞춰진 '전쟁사'였다. 이 달콤한 마약은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며 인종과 인종간의 전쟁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읽으면서 단 한가지 문장만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는데, 그 문장은 두번째 사진에 밑줄 쳐진 '기도도 소용없다'는 말이었다.


읽다보면 흑인 노예제도가 빠질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흑인노예제도에 관한 끔찍하고 처참한 현실을 담아냈는데, 그 현실은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지치며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 뿐이다. 정말로 '기도도 소용없는' 해괴하고 망측한 산업이 바로 설탕을 둘러싼 농장(플랜테이션) 산업이었다.


책을 덮으면서 이 일련의 무수한 과정들이 너무나 납작하고 또 편리하게 내 밥상 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또 저당의 시대다. 너무 당이 넘쳐나서 당을 줄여야하는 시대라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사실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무심코 먹는 어떤 것이, 혹은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이러한 전쟁사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도도 소용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전쟁사를 읽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게 된다. 설탕을 먹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게 아닌 알고서 먹을 수 있음에 감사. 그래서 소용없는 기도에 내 마음이라도 담아서 이 전쟁사에 심심한 위로를 더하고 싶다.


*위 책은 한겨레 풀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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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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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의 첫인상은 '넓다'였다. 내용이 넓거나 인물의 마음이 넓고, 혹은 다루는 주제가 넓어서가 아닌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작고 세로가 긴 책이 아닌 가로와 세로가 '넓은' 책이었다는 것이다. 핸디북, 손에 잡히는 작은 사이즈의 책들, 크루와상 백이나 바게트 백에 들어갈 법한 작은 사이즈의 책들이 이제 트렌드가 아닌 하나의 양식처럼 자리잡은 가운데 이렇게 넓은 사이즈의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뭐랄까. 눈물인 줄 알았던 남자의 눈에 흐르는 것이 사실 목없는 사람의 형태였고 이제 징그럽다기 보다는 조금더 우스꽝스러운 기운(?)을 보여주는데 한 몫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작으면 책 디자인팀의 재치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예상대로 내부는 더 넓었다. 문단과 문단사이의 간격도 적당히 넓었으며 여백도 널널했다. 그동안 작고 좁은 책에서 하도 시달려서(?) 그런가. 술술 읽혔다.


돈 많은 사람은 못되고, 후기 신조선 사회에서 쌍놈의 위치에 있는 회사원 장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보통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은행원이다. 그러나 어느날 출근길에 갑자기 납치를 당하게 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납치는 허무하게 끝났으나, 그와 동시에 바다에서 시체를 박아넣는 형벌이었던 '말뚝'들이 도심 곳곳에 나타나면서 말뚝들과 사회의 살아있는 시체인 회사원 장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가 폭발한다.


'말뚝들'은 지난 2000년대의 잘나가던 현대소설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평범한 줄 알았는데 어딘가 나사가 빠진(positive) 주인공 주변인들과 함께 말도 안되는 사건이 얽혀 결국 이 모든일이 전부 '신기한 건 전혀 없는 인간'에 의해 신기하고 가소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총체적 난국의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특히 잠들어있는 시체같은 말뚝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박에 알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오래된 미래이자 현재형 과거라는 것을. 우리는 이 사회에서 거꾸로 처박힌 채 죽어가고 있는 작은 시체 더미들 중 각각이라는 것을. 

다만 이런 비관적이고 씁쓸한 현실 속에서도 작가는 유우머를 놓지 않는다. 피식 거리면서 새어나오는 웃음과 장의 좌충우돌한 행동거지가 너무 무겁게만 인생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마주치면 엎드려 빌기보다는 삥이라도 뜯는 편이 낫다는 게 장의 지론이었다. 특히 삥을 뜯는 게 중요했다. 제대로 된 신이라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게 틀림없고, 체면이 있어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힘들며, 속성상 보복보다는 용서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P154

있어야 할 자리를 자꾸만 벗어나는 게 시대적인 트렌드인가 싶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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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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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한가로워지기까지 말이다. 이런 한가로움에는 자발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강제적인 이동제한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한가함에 우리는 우리들의 한가로움이 기반으로 삼았던 아주 오래된 지침을 발견했다. 이 지침은 지침(tired)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지침(指針)이기도 했다. 우리는 무엇을 그동안 일상이라는 일기 안에 켜켜이 쌓아 왔던 것일까.


황정은 작가는 계속해서 바쁜 일상에서 내가 잊었던 것들을 나긋나긋하게 혹은 적확한 말투로 천천히 곱씹게 해준다. 그래. 이를 테면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읽는지, 종이를 넘기는지 혹은 읽다가 어떻게 몸을 푸는 지 등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익숙해져 갈 때즘, 혹은 익숙한 감각이 돌아올 때쯤 나의 어깨를 살며시 흔든다. 우리의 4월을 잊지마. 우리의 하사를 잊지마. 우리의 촛불을 잊지마.


잊지마, 란 문장은 "잘 지내냐?"라는 문장과 맞물려 오랜 기억을 잠재워뒀던 이들을 사무치게 슬프게 한다. 잊었으니 잘지내지? 어쩌면 이런 직설적인 말보다 더 숨막히고 각진 말들일 수도.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와 그녀의 동거인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목포로, 광화문으로, 파주로 쏘다닌다. 거기는 여전히 눈이 온다. 여기는 이제서야 낙엽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유사할 경우엔 ‘버려진다‘는 생각, 휴전선이 가깝다는 생각을 감각처럼 지닌 채 살아간다. 늘 그것을 되새기며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이나 생각 깊은 곳에서 지울 수 없어 지문처럼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 P108

나라는 일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변화는 일어난다. 그렇다고 나도 생각한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변한다. 그러나 내가 그 변화를 매번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P94

책장 선반에 백단향을 담은 함을 두었는데 거기 꽃혀 있던 책에 향이 배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백단향이 난다.
1년치 기쁨.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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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외곽주의자’ 검사가 바라본 진실 너머의 풍경들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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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도, 삶의 진실도 아니고 다만 늘 어느 정도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검찰청의 한 귀퉁이에서 분주했던 이끼의 이야기야. 각자의 그늘에서 기꺼이 이끼로서 존재하고자 부단했던 수많은 이끼 씨들의 이야기.

프롤로그 中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가 선언되면서 현대적 개인들에게 마법처럼 다가왔던 캐치프라이즈가 있다.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중심이 될 줄 알았던, 혹은 중심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밥 벌어먹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진짜 '주인공'이 된 줄 알고 혹은 될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얼마나 있는가. 하지만 인생의 주인공은 분명 나인데 누군가에게 난 조연이었을 뿐 (혹은 더 나아가 엑스트라가 되버리기도 한다) 이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여러가지 선택로가 생기는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자각을 계속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서까지 주인공이 될 것인지, 혹은 내 인생에서만 주인공인 것으로 하고 두 번째 나만의 캐치프라이즈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기꺼이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날 것인지 등 다양한 길이 다시 생겨난다.

정명원 검사는 기꺼이 '이끼'라는 외곽주의를 선언하면서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역과 삶을 확장 시킨다. 나를 감싸고 있던 사각형을 깨드리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외곽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이 그를 맞이 한다.

바로 민원인. 그래, 당신과 나다.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약간의 상상력(p.25)

개인적으로 법조인이 껴들어간 드라마나 영화를 잘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CJ갬성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간에 눈물콧물 짜게 만드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아는 판검사의 대표적인 대사나 제스쳐(?)는 오직 '이의있소!' 뿐이었다.

하지만 검사의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인간답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하는 민원인들의 삶은 더 구체적이고 핍진하다. 무슨 뜻이냐고? 생각보다 무진장 극적인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세이는 다소 '어떻게 판결이 내려졌고, 뭐가 극적이었으며~'가 아닌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민원인들의 삶 역시 우리네 삶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1>에서의 문제도 결국 극적인 추리와 과학적 수사방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상상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는가! 검사들의 야무짐은 별개의 일이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민원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은 결국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함부로 속단하지 않기 위해 약간의 상상력을 키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라는 필살기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입증할 수 있는 없는지에 따라 변모하는 것(p.102)

무엇일까? 바로 사건이다. 입증할 수 있는 지 없는지에 관해 그것은 진실이 되기도 하며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건 사건이 될 수도 있고, 피해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소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것들에게 검사들은 그 소용들이 한복판으로 자진해서 뛰어들게 된다. 그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르는 그 소용돌이에 내 발자국이 큰 소리가 난다면 소용돌이는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침착하게 용의자 혹은 피해자, 가해자, 민원인들을 대한다. 어찌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다. '저거 미친놈 아니야?'(「피고인이 사라졌다」의 사라진 피고인, p.93),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한다고?'(「딱 보면 압니까」의 용의자 아주머니,p.104), '대박이다....'(「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고여사님, 정영감님,p110),'가지가지한다...'(「그남자의 속사정」의 야간주거침입절도미수죄의 그남자,p.125) 등등 신박한 민원인들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침착하고 똑부러지게 대응하실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들의 삶 마저 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검사 엄마로서, 혹은 후배로서 선배로서 어쩔 땐 꼰대로서 그당시 초임검사로서 각자의 소리가 왕왕있다. 그런 자신들의 소리를 모두 내려놓고 입증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어떤 무게일까? 나는 그때를 간접적으로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정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곽주의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바깥으로

"자리가 너무 좋아서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외곽주의자」, p.267


지방대를 나온, 집안적, 사회적 아무런 배경이 없는, 체력이 다소 떨어지는, 여성인 나는 .... 검찰에서도 내내 중심이라 할 수 없는 형사부, 공판부에서 일했고, 공판부 중에서도 주로 꺼려하는 국민참여재판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는 늘 원의 중심이 명백한 사회였다. 서울 혹은 대도시, SKY 대학, 판사, 서울의 5대 로펌, 특수부, 공안부...그런 것들이 의심없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했고 무서운 구심력으로 그 시대의 구성원들을 끌어들였다. 왜 끌려가지는지 모르는 채 끌려가던 나날이 계속되었다. 홀린 듯 중심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왜 저것은 중심인가, 왜 우리에게 작동하는 힘은 구심력 밖에 없는가 의문은 일었다.


결국 세상이 설정한 표준 사이즈가 뭣이든 간에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굽 높이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곳이 중심이라는 일반론을 덮어두고, 그곳에 서 있는 구체적인 나를 그려보았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에 보람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를 추상적으로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씩 따져보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나의 외곽은 스스로 형태를 갖추었다. 외곽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어떤 취향에 가깝다. 중심을 거부하겠다는 높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체질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복잡한 곳, 핫한 곳, 관심이 집중되는 곳, 가장 높고 가장 비싼 곳이 좀 불편할 뿐이다. 그 불편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겠다는 다소간의 고집이 외곽주의의 실체다.

「외곽주의자」, p. 267-273


대학원 2학기와 3학기 그 1년 동안 내가 입에 달고 산 말이 있다. "결혼하고 싶어"였다. 순수학문으로 대학원까지 진학한 나는 초반에는 경기권 대학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마침내 서울의 한복판에, 심지어 누구든지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학원에 보란듯이 합격했다. 나의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으나 그 '뽕'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와 학문 경향에 나는 금방 질려버렸고, 생각보다 나에게 버거운 학문의 길은 자존감을 바닥을 치게 하였다.

엉엉 울면서 수업이 끝나면 공원으로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는 일이 허다해질 무렵, 나는 연애와 결혼에 집착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외로워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개그맨 장동민씨가 예전에 예능프로그램에서 연애는 건너뛰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 같이 있던 패널들에게 빈축을 샀다. 그때 문득 그 말이 떠오르면서 내가 왜이렇게까지 결혼에, 연애에 집착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에 속하고 싶던 것이었다.

대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닌 어정쩡한, 더구나 '순수학문'이라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일반대학원생에게 사회에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이다. 석사를 수료하려면 아직 멀었지, 석사 논문은 더 멀었지... 하는 그 모든 아득한 마음들이 불안함을 못이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결혼'(!)밖에 없다는 황당한 결론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직장도 얻었고 무사히 수료를 앞두고 있어 그때의 마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 않지만 참으로 웃지 않을 인생의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여성으로서, 대학원생으로서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먼저 떠올렸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씁쓸한 에피소드였다.

그런 나에게 정명원 검사님은 '개인주의자'를 넘어서 '외곽주의자 선언'을 도모한다. 같이 한 번 이끼가 되어보자고, 외곽주의자가 되어서 중심을 욕하는 게 아니라 중심의 틀에서 벗어나보자고 말이다. 그러면 중심보다 덜 빡빡한, 혹은 너무나 넓은 광야가 펼쳐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디든지 텐트를 치고 누워있으면 된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나는 장명원 검사님이 먼저 그랬다고 말하면 된다. 검사님이 먼저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어차피 합법일 것을.

책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정말 재밌다. 역시 남 얘기가 가장 웃긴 법. '웃겨 증말'이 입에 달려버리는 책. 그래서 진정으로 외곽의 외곽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책. 그래서 나에게 굳이 중심이 아니어도 인생은 다이나믹하고 재밌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이다.

한겨레문학상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도, 삶의 진실도 아니고 다만 늘 어느 정도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검찰청의 한 귀퉁이에서 분주했던 이끼의 이야기야. 각자의 그늘에서 기꺼이 이끼로서 존재하고자 부단했던 수많은 이끼 씨들의 이야기.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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