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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ㅣ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한가로워지기까지 말이다. 이런 한가로움에는 자발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강제적인 이동제한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한가함에 우리는 우리들의 한가로움이 기반으로 삼았던 아주 오래된 지침을 발견했다. 이 지침은 지침(tired)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지침(指針)이기도 했다. 우리는 무엇을 그동안 일상이라는 일기 안에 켜켜이 쌓아 왔던 것일까.
황정은 작가는 계속해서 바쁜 일상에서 내가 잊었던 것들을 나긋나긋하게 혹은 적확한 말투로 천천히 곱씹게 해준다. 그래. 이를 테면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읽는지, 종이를 넘기는지 혹은 읽다가 어떻게 몸을 푸는 지 등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익숙해져 갈 때즘, 혹은 익숙한 감각이 돌아올 때쯤 나의 어깨를 살며시 흔든다. 우리의 4월을 잊지마. 우리의 하사를 잊지마. 우리의 촛불을 잊지마.
잊지마, 란 문장은 "잘 지내냐?"라는 문장과 맞물려 오랜 기억을 잠재워뒀던 이들을 사무치게 슬프게 한다. 잊었으니 잘지내지? 어쩌면 이런 직설적인 말보다 더 숨막히고 각진 말들일 수도.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와 그녀의 동거인의 발자취를 따라 나도 목포로, 광화문으로, 파주로 쏘다닌다. 거기는 여전히 눈이 온다. 여기는 이제서야 낙엽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유사할 경우엔 ‘버려진다‘는 생각, 휴전선이 가깝다는 생각을 감각처럼 지닌 채 살아간다. 늘 그것을 되새기며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이나 생각 깊은 곳에서 지울 수 없어 지문처럼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 P108
나라는 일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변화는 일어난다. 그렇다고 나도 생각한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변한다. 그러나 내가 그 변화를 매번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P94
책장 선반에 백단향을 담은 함을 두었는데 거기 꽃혀 있던 책에 향이 배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백단향이 난다. 1년치 기쁨.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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