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가 선언되면서 현대적 개인들에게 마법처럼 다가왔던 캐치프라이즈가 있다.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중심이 될 줄 알았던, 혹은 중심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밥 벌어먹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진짜 '주인공'이 된 줄 알고 혹은 될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얼마나 있는가. 하지만 인생의 주인공은 분명 나인데 누군가에게 난 조연이었을 뿐 (혹은 더 나아가 엑스트라가 되버리기도 한다) 이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여러가지 선택로가 생기는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자각을 계속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서까지 주인공이 될 것인지, 혹은 내 인생에서만 주인공인 것으로 하고 두 번째 나만의 캐치프라이즈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기꺼이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날 것인지 등 다양한 길이 다시 생겨난다.
정명원 검사는 기꺼이 '이끼'라는 외곽주의를 선언하면서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역과 삶을 확장 시킨다. 나를 감싸고 있던 사각형을 깨드리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외곽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이 그를 맞이 한다.
바로 민원인. 그래, 당신과 나다.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약간의 상상력(p.25)
개인적으로 법조인이 껴들어간 드라마나 영화를 잘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CJ갬성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간에 눈물콧물 짜게 만드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아는 판검사의 대표적인 대사나 제스쳐(?)는 오직 '이의있소!' 뿐이었다.
하지만 검사의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인간답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하는 민원인들의 삶은 더 구체적이고 핍진하다. 무슨 뜻이냐고? 생각보다 무진장 극적인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세이는 다소 '어떻게 판결이 내려졌고, 뭐가 극적이었으며~'가 아닌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민원인들의 삶 역시 우리네 삶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1>에서의 문제도 결국 극적인 추리와 과학적 수사방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상상력으로 해결되지 않았는가! 검사들의 야무짐은 별개의 일이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민원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은 결국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함부로 속단하지 않기 위해 약간의 상상력을 키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라는 필살기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입증할 수 있는 없는지에 따라 변모하는 것(p.102)
무엇일까? 바로 사건이다. 입증할 수 있는 지 없는지에 관해 그것은 진실이 되기도 하며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건 사건이 될 수도 있고, 피해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소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것들에게 검사들은 그 소용들이 한복판으로 자진해서 뛰어들게 된다. 그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르는 그 소용돌이에 내 발자국이 큰 소리가 난다면 소용돌이는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침착하게 용의자 혹은 피해자, 가해자, 민원인들을 대한다. 어찌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다. '저거 미친놈 아니야?'(「피고인이 사라졌다」의 사라진 피고인, p.93),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한다고?'(「딱 보면 압니까」의 용의자 아주머니,p.104), '대박이다....'(「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고여사님, 정영감님,p110),'가지가지한다...'(「그남자의 속사정」의 야간주거침입절도미수죄의 그남자,p.125) 등등 신박한 민원인들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침착하고 똑부러지게 대응하실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들의 삶 마저 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검사 엄마로서, 혹은 후배로서 선배로서 어쩔 땐 꼰대로서 그당시 초임검사로서 각자의 소리가 왕왕있다. 그런 자신들의 소리를 모두 내려놓고 입증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어떤 무게일까? 나는 그때를 간접적으로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정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곽주의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바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