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릿광대 - 복음의 어리석음과 설교의 아이러니
찰스 L. 캠벨.요한 H. 실리에 지음, 김대진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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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Preaching Fools: The Gospel as a Rhetoric of Folly by Charles Campbell, Johan Cilliers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책의 기초는 고린도전서 1장 후반부에서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바보 멍청이들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역설이다. 저자는 바울이 했던대로 그 방법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외친다. 


# 핵심


1. 바보들은 어떻게 외치는가?


2. 그들의 외침은 어째서 우리에게 메아리치는가?



# 교훈


1. 오늘날 교훈


2. 필요한 자세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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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참된 예배와 증언,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
마이클 J. 고맨, 박규태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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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 Uncivil Worship and Witness: Following the Lamb into the New Creation (2011)

 

 

이 책의 정체는 제목에 잘 드러난다. 한글 번역본은 Responsibly를 '바르게'라고 바꾸었지만, 저자의 의도랑 다소 어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철저하게 현재, 즉 오늘날 계시록을 읽으면서 독자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저자는 Responsibly Reading을 통해서 미국의 실정이나 상황에 대한 분석을 요한계시록 해석과 밀접하게 엮어냈다.

 

 

우선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 도처에서 다음 두 권을 크게 의존하고 있다.

 

1. Eugine Peterson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Reversed Thunder: The Revelation of the Praying Inagination)
2. Richard Bauckham <요한 계시록 신학>(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 번역본은 보컴이 아니라 보쿰으로 저자 표기가 되어있다.

 

조금 더 간결하고 핵심적인 요한계시록 해석을 원하는 독자는 유진 피터슨의 저서를, 더 신학적인 개괄과 심오한 통찰이나 분석을 원하는 독자는 보컴의 책이 유용할 것이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장에서 4장까지로서 문제제기, 요한계시록의 저자, 장르, 줄거리 요약, 방법론 및 그 평가가 포함된다. 서론인 셈이다.
둘째는 저자가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눈 요한계시록 해설이다. 5장은 7교회에 초점을 둔 1~3장 해설, 6장은 어린 양이 핵심인 4~5장, 8장은 여러 환상들을 폭넓게 다루는 6~20장, 9장은 마지막 절정과 끝맺음에 해당하는 21-22장 해설이다. 7장은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환상적이거나 상징적인 요소와 배경 해설이며, 10장은 저자가 현실에 책임감있게(responsibly) '적용'하는 부분이다.

 

 

이제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겠다.

 

1. 저자의 의도는 장래성보다 현재성에 초점을 맞추는 "계시록 읽기"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술 제목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자는 특히 계시록을 미래의 범위에 가두어놓는 여러 해석들에 반대한다.

 

"미래만 앙망하는 도피주의자의 요한계시록 해석과 요한계시록을 사람의 손으로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완전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책으로 보는 비현실적인 해석 사이에 중도(the middle way)는 없을까?"  (316)

 

저자는 "있다"고 답하면서, 특별히 그 예시로 바빌론과 제국을 해설하면서 미국의 실정에 많이 파고든다. 미국의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해석이 아주 적실성있게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책의 구조상 실천적인 적용이 요한계시록 해석 부분과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지금을 위한 적용'의 시도는 수많은 계시록의 해석과 접근법이 범람하는 가운데,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고하기에 신뢰할 만한 기준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666문제도 침묵하지 않고 제안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언했던” 적그리스도이자 666이라는 숫자와 연관성을 가진 특정인을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늘 스스로가 신이나 신에 걸맞는 지위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무조건” 신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정치권력, 철저한 충성이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 충성을 요구하는 권력을 가려내고 이들과 손 잡기를 거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47-8)

 

 

복음서나 서신서에 비해서 계시록을 오늘을 위한 책으로 읽는 시도는 상당히 드물다. 이 점에서 이 저술의 가치는 빛난다.

 


2. 저자는 "계시록 읽기"의 핵심을 그리스도로 본다.

 

이 책에서 가장 비판받는 저술은 팀 라헤이의 <Left Behind>시리즈이다. 저자는 책 도처에서 집중포격을 퍼붓는데, 그 이유는 휴거를 계시록의 핵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먼은 요한계시록에 "휴거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휴거나 심판 같은 특정한 전제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을 획일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본문 자체에서 드러난 내러티브에 주목하고 그 다양한  요소들을 아우르려고 시도한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유일한 핵심으로서 계시록 4~5장 본문을 근거로 "어린 양"을 가져온다. 이는 리처드 보컴의 <계시록 신학>에서도 충분히 강조되는 측면이다. 저자는 계시록을 이렇게 이해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좋은 소식이요, 악이 그치지 않고 제국이 폭압을 일삼는 와중에도 영원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굳건한 신실함을 다룬 책이다" (53)

 

고먼은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는 방법이 오히려 승리한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고먼 역시 심판이 핵심이라는 입장과 어린양 그리스도가 핵심이라는 입장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며 동시에 사자로서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로 풀 수 있다.

 

"어린 양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곧 어린 양의 능력이다."(265)

 

계시록은 이위일체, 즉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을 핵심적으로 강조한다. 충돌이나 긴장처럼 보이는 여러 항목들은 십자가의 역설과 삼위일체의 신비 속으로 모두 받아들여질 수 있다.

 

 

3. 저자는 책임감 있는 적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1) 보라. (2) 들어라. (3) 예배하라. (4) 증언하라. (5) 빠져나와라. (6) 저항하라. (7) 따르라. (352-3)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단순한 적용을 도출하는데 복잡한 논의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저명한 신약학자로서 고먼은 복잡한 학설들과 단순한 진리 사이에서 상당히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뇌가 바로 위의 일곱 가지 결론이다. 결국 고먼이 독자에게 권하는 바는 이 일곱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독자들이 직접 계시록 말씀과 마주하고 오늘날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다소 산만했던 책의 중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고먼의 논의는 잘 정리되어 있다.

 

계시록은 언제나 두 극단에서 긴장과 갈등 상태에 있었다. 한쪽에서는 계시록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기피하는 경향에 빠져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손쉽게 대해서 부주의한 해석이 범람한다. 고먼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중간에 있는 성경적인 길를 탁월하게 돌파해냈다. 미국 실정이라는 점을 감안할지라도, 이 책은 계시록과 관련된 신앙서적이나 주석서에서 간과했던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자고 호소하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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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의 5가지 유형
에드워드 W. 클링크 III & 대리언 R. 라킷 지음, 신윤수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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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Understanding Biblical Theology: A Comparison of Theory and Practice (2012)


성경신학은 오늘날 가장 많이 다양한 저술들을 쏟아내는 신학 분과이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거품 탓인지 열기 탓인지 혹은 치고받는 논쟁의 자욱한 먼지 탓인지 현재 사태를 규명하는 작업을 성공리에 끝마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 안으로 뛰어들기만 할 뿐, 그 광경을 밖으로 전달해주지 않았다. 혹은 반대로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부정확한 설명만 되풀이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러나 이 탁월한 두 학자는 그 과업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이 책은 “성경신학”을 정의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이 책은 성경신학이라는 과제와 관련된 몇몇 핵심 논점들과 함께, 그 영역에서 연구하는 두드러진 학자들의 실제적인 고찰에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이다. 우리의 과제는 대학과 교회 양쪽을 괴롭히는 정의와 대안들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규명하는 것이다." (288)

 

저자의 설명처럼 성경신학은 교회와 대학 양쪽을 섬긴다고 공언하지만, 의도와 반대로 괴롭히고(?) 있었다. 이 곤경을 탈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교와 분석이다. 도대체 이 저자와 저 저자, 이 학파와 저 학파는 무엇이 다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한 다섯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구약과 신약의 관계
(2) 성경의 역사적 다양성과 신학적 통일성
(3) 성경신학의 범위, 특히 자료의 범위

(4) 성경신학의 주제

(5) 성경신학의 목적: 교회인가 학교인가

 

여기서 다섯 번째 항목이야말로 독보적인 공헌이다. 교회와 학계(학자들/학교들)의 이 긴장과 갈등은 결국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성도들과 학자들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을 발생시켰다. 이를테면 톰 라이트의 압도적인 분량(!)의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저술을 능히 읽어낼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교회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 아님 학계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 그러나 우리는 저자의 탁월한 안목과 정리 덕분에 학술 서적들과 논문들을 수천 페이지를 읽지 않아도, 성경신학계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성경신학에 접근하는 다섯가지 길'을 안내한다.

 

(1) 역사 서술
(2) 구원사/구속사

(3) 세계관-이야기

(4) 정경적 접근

(5) 신학적 구성

 

아마 다섯 가지 길을 교차하거나 폭넓게 종합하는 방법론을 가진 성경신학자들은 저자의 구분에 반박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표지판은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며, 현 상황을 진단하기 위한 안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 지도는 특별히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주요 학자들에 대한 정리이며, 다른 하나는 책 자체에서 직접 제공하는 요약이다.

 

 

 

1) 저자는 개별 성경신학 접근/방법론을 대표하는 학자들을 정리한다. 그들은 각각 제임스 바, D. A. 카슨, 톰 라이트, 브레바드 차일즈, 프랜시스 왓슨이다. 저자가 이 학자들을 정리한 의도는 ‘성경신학의 다섯 가지 유형’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도식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의 각 유형들은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사실 각 유형은 다양한 정의와 표현을 반영한다." (288)

 

이처럼 다양성과 폭넓은 현재 상황을 독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시도로 수많은, 독자들이 이름을 처음 들어볼 법한 여러 학자들을 나열하는 것은 오히려 부적절하다. 커다란 지도에 모든 글씨가 똑같은 크기로 적혀있다면, 과연 가독성이 좋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중요한 위치를 큰 글씨 혹은 굵은 글씨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각 성경신학의 입장에 속한 대표자를 한 명 골라서 학력 및 배경, 핵심 저술, 인터뷰, 쟁점에 대한 답변 등을 제공한다.

 

 


2) 저자는 지도의 인덱스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책 마지막 페이지에 일목요연한 표를 제공함으로써 책 전체를 요약하는 수고까지 기꺼이 책임진다. 현대 성경신학계에 정통한 학자나 독자는 그 표가 필요없겠지만, 그 정체를 규명하기 힘들었던 독자들에게 이런 수고는 너무나 큰 선물이다. 이 표를 통해서 독자들은 대륙이 어디이고, 그 장소의 지명과 지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거시적인 특징 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관점도 놓치지 않는다. 책 제목은 다분히 도식적인 제목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곳곳에서 여러 성경신학 유형들에 대한 비교를 시도하면서, 각 유형의 경계를 세밀하게 언급해준다. 자칫 모호하거나 혼란스럽게 정리할지도 모를 부분들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사례를 해당하는 책 본문을 확인해보자.

 

"제임스 바가 사용한 story라는 용어와 톰 라이트의 worldview-story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 (77)

 

저자는 1유형에 속한 제임스 바와 3유형의 톰 라이트의 닮은 부분을 지적한다. 이런 관찰을 저자는 매 장마다 각 유형을 평가하면서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의 논쟁 역시 요점을 정리한다. 다음은 동일한 성경신학 유형에 속한 학자들로 분류된 톰 라이트와 리처드 헤이스 사이의 논쟁이다. 이들에게는 일치점과 불일치점이 있다. 다음 대목은 헤이스가 라이트를 평가하는 대목이다.

 

" 톰 라이트의 예수 해석을 지지하는 주요 대화 상대는 이레나이우스나 칼케돈 공의회가 아니다. 심지어 히브리서나 베드로서신서도 아니다. 오히려 핵심 대화 상대는 요세푸스, 사해사본, 에스라4서 등이다.... 여기서 그의 방법론은 학계의 우선적 관심사와 매우 잘 어울리지만, 교회의 생각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186)

 

물론 라이트는 헤이스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라이트가 성경신학계에서 지정학적으로 어떤 위치와 입장을 대변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다른 입장에 속한 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2유형, 즉 구원사/구속사에 초점을 두는 입장의 학자들을 통째로 묶지 않고, 세 가지로 세부적으로 정리한다. 달라스신학교 교수들로 대변되는 '달라스 학파', D. A. 카슨이 속한 트리니티신학교의 '시카고 학파',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위치한 '필라델피아 학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차이점보다 훨씬 크다. 이들의 차이점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2유형의 모든 지지자들은 점진성과 통일성의 해석적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양성을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거시 문맥 내에서 단락의 위치를 결정할 때, 특정 단락을 어느 수준까지 전체 맥락에 연결시키는지 여부이다." (100)

 

여기서 단락은 성경의 단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적게는 성경 본문부터 크게는 역사-문화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단위들(units)을 구속사라는 전체 맥락에서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상이하다. '달라스 학파'는 성경 본문에 조금 더 치중한 입장이고, '필라델피아 학파'는 신학적 구성과 결합에 조금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추가로 인용할 대목은 이 책이 제일 공헌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학계를 넘어선 교회를 향한 관심과 진단이다.

 

" 세계관-이야기라는 3유형의 성경신학 방법은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성경 독자들의 이야기와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성경 전체의 치밀하고 상호본문적 읽기를 제공한다. 이 성경신학은 대학에서 활용되는 내러티브 도구들과 교회에서 이미 연출되고 수행되는 살아있는 대본의 직접적인 협력을 통해서 구성되고 유지된다. 그러나 이런 협력 관계는 이론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천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대학과 교회 모두 자기 역할의 수행이 요구된다." (147-8)

 

어떤 이들은 이 책의 겉핡기 수준을 약점으로 지적할 수도 있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에서 교회나 대학의 역할을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독자들? 그러나 이는 저자들이 밝힌 저술 목적에 잘 부합한다. 더 깊은 논의를 원하는 사람들은 학술지의 논문과 서평을 읽으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쟁쟁한 추천인들을 나열해보자. 고든 피 이후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신약 시리즈의 에디터로 임명된 조엘 그린, 톰 라이트의 연구조교 출신이며 톰 라이트 관련 컨퍼런스를 주도했고 현재 휘튼컬리지의 신약학 교수 니콜라스 페린, 해석학 분야의 대가 케빈 밴후저, 구약학계를 대표하고 또한 Everyone 구약 시리즈를 책임진 존 골딩게이, 신약학계에서 진지하게 개혁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토마스 슈라이너 등. 더 이상 이 책에 무슨 보증서가 필요하겠는가? 


Tole, R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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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법적 성경연구
데이비드 R. 바우어 외 지음, 윤철호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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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의 문제 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쿠이스트는 개신교 안에서 발생한 성경의 “재카톨릭화” 현상의 실체를 분명히 확인해 주었다. 그는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경향성에 대해서 (목회자와 성도들 모두)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는 신뢰받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그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위해서 오직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이 행한 해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신교의 경우 교황이나 교권을 가진 사람(magisterium)이 아니라, 교수나 성경주석 저자들이 제공한 권위 있는 해석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전문가의 성경 해석에 즉시 순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pp.126-7)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올바르게 해석해야만 한다. 이 책은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론을 통해서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1. 이 책은 살아있는 고전이다.

1952년 Robert A. Traina(1921-2010)가 초판을 출판. 다음 세대의 학자 Bauer가 참여해서 함께 작업한 2판(2011)이다. 하지만 제목이 <방법론적 성경 연구(Methodological Bible Study)>에서 <귀납법적 성경 연구(Inductive Bible Study)>로 달라졌다. 번역본에서 유진 피터슨의 글은 추천사 항목에 포함되었지만, 원서에서는 무려 ‘서문’의 자리이다. 그의 50년 전 회상은 진귀하다. 그가 처음으로 1950년대 뉴욕에서 성경 연구를 배울 때, 자신의 손에 Traina의 책 <방법론적 성경 연구>가 있었다고. 그 책이 자신에게 “획기적인 변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신학교에 등록한 나(유진 피터슨)는 그 학기 첫 주에 한 교수(로버트 트래이나)의 강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교수는 그 날 이후의 3년 동안 성경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교수와의 만남은 일평생 내가 행하고 있는 모든 학문적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유진 피터슨의 고백만으로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2. 이 책은 상당히 학술적이다. 

사실 이 책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첫 단계는 관찰/질문, 둘째 단계는 해석/답변, 셋째 단계는 평가/적용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그 세부내용이 매우 세밀하게 전개된다(지나치게 학술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를테면 책 도처에서 논리학, 해석학, 언어학의 전문 용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특히 3부에서 본격적인 성경 해석의 실행에서 피해야 할 오류에서는 보통 논리학에서 다루어지는 오류들과 James Barr가 지적한 어원 오류 등 갖가지 오류들의 종류만 소주제 별로 10여개씩 나온다. 이는 보통 독자들로 하여금 피곤함이나 지루함을 발생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 더구나 책의 장마다 분량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처음에는 꼼꼼한 정독보다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성경 연구를 진행하다가 필요한 과정에서 세밀하게 참고해서 적용하는 방식으로 독서할 필요가 있다. 


3. 이 책은 최신 연구의 흐름과 분야별 주요 저서/해석들의 핵심을 제공한다.

핵심을 제공한다는 걸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방법론의 논의에서는 지나치게 학술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성경 구절을 대할 때 저자들이 너무 훌륭할 정도로 핵심만 간추리는 요약에 감탄한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연구 성과를 제공한다. 이 대목은 마지막 5부 상관관계(Correlation)에서 두드러진다. 저자는 일부 구절들과 단락들을 깊게 해석하면서 1-4부보다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선보인다. 이를테면, 마태복음의 “성취하다(pleroo)” 동사의 의의는 “그리스도 사건과 히브리성서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라는 것이다. 아니면 구약이나 신약 본문을 다루면서 본문 이해를 위한 배경과 설명을 제공하는데, 이런 설명 만으로도 유익이 꽤 크다. 저자는 독자에게 핵심은 전달하지만, 그 구체적인 연구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르를 정의한다면, ‘백과사전’에 넣고 싶다. 그만큼 포괄적이고 방대하며 두고두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Bauer의 다른 저술 <성경 연구를 위한 손안의 서재>와 훌륭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추가 정보: 이 책의 실전 연습을 위한 스터디북이 원서로 출판되어 있다. 저자들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과제와 그 가이드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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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워필드 신학 시리즈 1
벤자민 B. 워필드 지음, 이경직 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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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입

이 책은 20세기 3대 칼뱅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B.B. Warfield의 칼뱅 관련 저술을 단행본으로 엮어놓은 것이다. 구성은 목차에서 보여지듯 칼뱅의 생애, 칼뱅의 <기독교 강요> 1부 1-9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해설, 칼뱅의 삼위일체, 칼뱅주의로 나열할 수 있다. 칼뱅주의를 제외한 모든 주제들은 모두 신학 학술지에 기고했던 글들이다. "5장. 칼뱅주의"는 19세기-20세기 초반의 가장 걸출한 개신교의 표준적인 신학 사전 중 하나로 알려진 <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에 Warfield가 기고했던 주제어 '칼뱅주의'를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3대 칼뱅주의자로서 Warfield의 확고한 지위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칼뱅에 대한 Warfield의 친절한 가이드를 기대한 독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신학 논문의 심오한 논의 때문에 예기치 못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칼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선행 학습(?)으로 칼뱅의 기독교 강요 1부 1-9장을 읽고 나면, Warfield의 논의를 뒤따르기에 훨씬 용이할 것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처럼 Warfield의 논의가 결코 일반 독자들에게 쉬운 수준이 아니다.

이 책에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해보는 방식으로 글을 진행하겠다.


II. 질문

1. Warfield는 왜 지금까지 풍성하게 소개되지 않았는가?
2. Warfield 저술의 추적: 출판, 재구성, 재출간, 재구성
3. Warfield의 <칼뱅>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III. 대답

1. 20세기 칼뱅주의자 Warfield

20세기 3대 칼뱅주의자로 Kuyper, Bavinck, Warfield가 있다. 사람들은 Kuyper를 떠올릴 때 곧바로 '영역주권론'을 연상하고, <개혁교의학>은 Bavinck를 대변한다. 그러나 Warfield는 사람들이 떠올릴만한 그런 대표적인 주장이나 저술이 없다. 이따금 Warfield는 진화론과 관련해서 그 유명세가 떠오를 뿐이다. 최근에 <Warfield의 신학>을 저술한 Zaspel은 지금까지 Warfield의 신학이 단 한 번도 통합적으로 이해된 적이 없었다고 성토했고, 그 거대한 작업을 그의 연구가 성공리에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Warfield가 풍성하게 소개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저술이 대부분 논문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도 고도로 섬세한 신학 논문이다. Sinclair Ferguson은 Warfield가 "학술적으로 최고 수준의 글을" 저술했고 "정밀한 학문성"이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고백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Warfield가 "칼뱅의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아주 쉽게 풀이하는 워필드의 탁월함"이라고 소개한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쉽지 않고, 심오하다!) 교의학자이자 변증학자인 그의 저술은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근해서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Warfield는 개혁주의 혹은 칼뱅주의 학자들이나 (신학적인) 목회자들에 의해서 위대한 칼뱅주의자로 칭송받았지만(또한 수많이 인용되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Warfield는 저 높은 상아탑 속의 칼뱅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Bavinck의 <개혁교의학> 역시 대중적인 저술은 아니다. 그렇지만 Warfield는 그런 포괄적인 대작이 아니라, 수많은 저술들을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가 변증한 주제들은 너무나 방대하다. 대표적으로 선별해보면 성경 영감설과 성경 무오성 논쟁, 초자연주의 및 기적 논쟁, 완전주의 논쟁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칼뱅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Warfield가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종교사학파에 맞서서 칼뱅주의를 변증했다는 사실만 옛 이야기처럼 반복해서 전해지고 전해졌을 뿐이다. 그 논증이나 주장과 근거들은 구체적으로 전수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다른 3대 칼뱅주의자 Kuyper나 Bavinck에 비해서 Warfield는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두 사람과 분명히 다른 Warfield의 특징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으니, 이제 첫 질문과 연관성을 가진 다음 질문에 대답해보자.


2. Works of Warfield

Warfield는 주로 단행본을 저술하기 보다는 여러 신학 저널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생전에 일부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지만, 대다수 저술은 논문이나 강연록이 차지한다. 20세기 초반인만큼 초자연주의나 기적 그리고 계시에 대한 주제가 단연 두드러졌다. 1927-32년 옥스포드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Warfield의 전집을 10권으로 간행했다. 이 시리즈는 절판되었다가, 1981년부터 Baker 출판사에서 10권 그대로 재출간하기 시작했다(이은선 교수는 2003년 재출간이라고 하지만, Baker의 초판은 1981년이다).  결국 Warfield 전집은 오늘날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는 시리즈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전집 역시 Warfield의 모든 저술을 담아내지 못했다. 그 정도로 Warfield는 정력적인 저술가였다! 그래서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일부 저술들은 <Selected Shorter Writings>라는 제목으로 P&R에서 1970년대에 출판되기도 했다(2001년 재판). 전집 10권마다 제목이 붙어있지만, 이 제목은 Warfield가 직접 구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방대한 저술들을 모아서 편집자가 기획한 것이다. 이런 재구성적인 기획과 편집은 한국의 Warfield 번역에서도 그대로 이식된다. 다음은 기존의 Warfield 번역본 목록이다(발행년도는 초판 기준).

(1989) 성경신학연구 1: 구원론 - B. B. 워필드
(1991) 구원의 계획 - B. B. 워필드
(1993) 칼빈·루터·어거스틴 - 벤자민 B. 월필드
(1998) 워필드 명설교 - B. B. 워필드
(2014) 한 권으로 읽는 워필드 신학 - 프레드 재스펠
(2015) 칼뱅 - B. B. 워필드

의외로 Warfield 번역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을 번역한 이경직 교수 역시 기존의 Warfield 번역본에 대해서 두 권(명설교, 워필드 신학)만 언급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두 권의 번역서는 소개할 가치가 있다. 1989년 <성경신학연구 1: 구원론>는 전집 2권 <Biblical Doctrines>과 9권 <Studies in Theology>에서 일부 저술들을 모아서 번역한 책이다. 1993년 <칼빈·루터·어거스틴> 역시 세 인물에 대해서 수록된 전집 중 일부 논문들만 선별해서 번역한 것이다. 전집에는 세 인물들에 대한 더 많은 신학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이번에 새물결플러스에서 출판한 <칼뱅>의 1장과 5장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작정(Decree)의 순서를 다루는 <구원의 계획>은 아마도 국내 칼뱅주의자들이 제일 탐독했을 저술로 추정된다.

이번 <칼뱅>을 시작으로 출판을 예고한 새물결플러스의 Warfield 시리즈 역시 기존의 10권짜리 전집을 따르지 않는 재구성 기획이다. 이 번역본의 기초는 전집 5권 <칼뱅과 칼뱅주의>이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전집 5권 <칼뱅과 칼뱅주의> 목차
1. 장 칼뱅: 생애와 작품
2. 칼뱅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교리
3. 칼뱅의 신론
4. 칼뱅의 삼위일체 교리
5. 칼뱅의 창조 교리
6. 칼뱅주의
7. <기독교 강요>의 문헌 역사

여기서 쉽게 포착되는 것처럼 이번에 출판된 <칼뱅>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창조론'과 마지막 논문이 누락되어 있다. 새물결플러스와 동일한 재구성 목차를 가진 책이 하나 있다. 1954년 P&R에서 간행한 <Calvin & Augustine>이다. 이 책은 <계시와 영감>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Warfield의 저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 구성과 차례는 다음과 같다.

<Calvin & Augustine> 목차
1부: 칼뱅
1. 장 칼뱅: 생애와 작품
2. 칼뱅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교리
3. 칼뱅의 신론
4. 칼뱅의 삼위일체 교의
5. 칼뱅주의

2부: 어거스틴
1. 어거스틴
2. 어거스틴과 <고백록>
3. 어거스틴의 지식과 권위에 대한 교리

새물결플러스의 <칼뱅>은 Warfield의 칼뱅 관련 논문들과 함께 칼뱅주의에 관한 3편의 강연이 부록으로 추가되어 있다. 한 마디로 Warfield의 저술은 계속해서 재구성과 재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독자를 비롯한 신학자나 학생들은 Warfield의 저술이 모두 번역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3대 칼뱅주의 신학자 Warfield의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번 <칼뱅> 이외에 새물결플러스에서 기획하고 있는 Warfield 시리즈를 모두 출판한다면, 비록 완벽한 전집은 아닐지라도 국내 독자들은 그의 신학 저술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Warfield를 위한 가장 훌륭한 가이드로서 Zaspel의 책 역시 작년에 번역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인물을 21세기에 우리가 그렇게 독파할 이유가 있을까? 이 대답을 위해서 <칼뱅> 책 자체를 살펴볼 차례이다.


3. 오늘날의 칼뱅? 오늘날의 워필드?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태동부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칼뱅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해되었다. 그 시대의 해석의 맥락에서 사람들이 칼뱅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은 살아있을 때부터 수많은 오해를 받았다. 오늘날의 칼뱅 이해 역시 과거의 칼뱅 이해에 대한 수많은 교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이르렀다.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저술된 가장 저명한 연구 중 하나로 역사신학자 Richard Muller의 <The Unaccomodated Calvin>를 언급할 만하다. 이 제목은 '맞추어지지 않은 칼뱅'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Warfield 역시 3대 칼뱅주의자에 걸맞게 통찰력 넘치는 칼뱅 해석을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겨놓았다. 먼저 이 저서 <칼뱅>의 특징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Warfield가 칼뱅을 다루는 주요 저서는 물론 <기독교 강요>이다.
2. 그는 <기독교 강요> 1권의 초반부를 차례대로 해설한다. 이 과정에서 칼뱅에 대해 잘못 해석한 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한다.
3. 다음으로 잘 조명되지 않았던 칼뱅의 탁월하고 위대한 특징을 조명한다.
4. 부록으로 실린 칼뱅주의 강연에서 Warfield의 선포는 마치 칼뱅주의 고백서를 외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첫째, 19세기의 칼뱅 이해를 엿볼 수 있다. 그는 1907년에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을 발표했다. Warfield는 홀로 칼뱅을 이해하지 않고, 다른 학자들의 입장과 견해를 폭넓게 활용하고 대응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가 신학자로서 당대의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을 공정하게 다루며, 분명한 근거를 통해서 칼뱅에 관한 오해를 반박하는 솜씨는 책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더불어 칼뱅뿐만 아니라 칼뱅주의자의 저술들도 곳곳에서 인용한다. 이를테면 16세기 네덜란드의 Voetius, 저자와 동시대인 Kuyper와 Bavinck도 여러 차례 이름이 언급된다. 특히 Warfield는 19세기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학자들 중에서는 독자들에게 생경한 이름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칼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Warfield는 꾸준히 본문과 각주에서 나열한다. 이 모든 이해는 한편으로 반대 입장을 논파하기 위한 저자의 진술이기 때문에 파편적이고 부분적이다. 그러나 저자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 독자로서는 과거의 칼뱅 이해를 통해서 현재의 칼뱅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떤 해석은 여전히 유효하고 어떤 해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논파당했다. 칼뱅의 Text는 출판 이후로 고유하게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그 해석은 수세기동안 여러 변천 과정을 거쳤다. 칼뱅을 둘러싼 Con-Text는 15세기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해석 역사를 아우르는 영역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칼뱅 연구나 칼뱅주의 연구는 19세기 칼뱅 이해에서 결코 이탈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Warfield는 널리 알려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것은 두번째 항목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Warfield는 독보적인 칼뱅 해석을 제시했다. 한편으로 “성령 신학자”로서 칼뱅을 재조명했고, 한편으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학자의 반열”에 칼뱅을 세웠다. 전자는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인용했으며, 이 책의 서두와 말미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뱅을 은혜의 신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속죄의 신학자로서 안셀무스와 칭의의 신학자로서 루터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은 매우 공정한 작업이다.” (p.42)

“그러나 신학에 가장 커다란 칼뱅의 공헌은 아마도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를 크게 (또한 최초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p.381)

다음으로 삼위일체 논의는 4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Warfield는 칼뱅을 그리스도교 삼위일체론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반열, 테트툴리아누스나 아타나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버금가는 위치에 세워놓는다. 저자는 칼뱅의 삼위일체에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아우토테오스, autotheos)의 속성’이 제2위에도 해당한다는 해석을 방대하게 논의한다. 오늘날 많은 칼뱅주의자들은 칼뱅의 삼위일체론이 동방 신학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CLC> 4장 참조), Warfield는 칼뱅이 “아타나시우스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동방신학보다는 서방신학에 가깝다"고 평가했다(p.286). 그러나 이런 이견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칼뱅의 삼위일체 저술 목적이다. 

“칼뱅은 기독교 교사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순전한 형태로 간직하면서, 양떼를 가르치는 일과 관련해서 자신들의 지혜를 가장 유익한 수준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끈질기게 주장했다."(p.252)

저자의 이 진술은 칼뱅이 “경건에 대한 ... 모든 것들"라고 첨언한 <기독교 강요>의 부제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기독교 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임의로 일부 내용을 제외하거나 첨가할 수 없다. 자신들의 수준에 맞게 모든 성경 진술과 그것에서 도출한 교리를 전해야만 한다. 그 안내자 역할을 시대를 초월하는 수준에서 수행한 위대한 거인이 바로 칼뱅이다. Warfield는 칼뱅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바로 신학자들의 사변과 논쟁이 아니라 양떼에게 성경을 먹이는 것이 <기독교 강요> 전체의 최우선적인 목표였다. 더불어 Warfield는 칼뱅이 삼위일체를 논하는 태도의 뿌리로 다음 두 가지를 선택했다.

“칼뱅은 삼위일체 교리를 표현하면서 오직 성경에만 호소했기 때문에, 현재의 권위나 과거의 기도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성경만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사상의 순수성이다.” (p.259)

여기서 강조점은 바로 칼뱅이 미리 다루었던 성경이다. Warfield의 이 진술은 19세기 유행한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의존한 신학자들의 태도와 정반대의 입장에 칼뱅이 서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전제를 다른 저술 <계시와 영감>에서 더 구체적이고 확장시켜서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4장에서 칼뱅이 주장한 하나님의 제2위의 자존성을 심오하게 변호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 이후 세대의 칼뱅 이해를 아우르면서, 교부들의 저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시에 칼뱅의 삼위일체 논적자인 쿠르투아를 다루면서 칼뱅의 여러 서간문들도 인용하고 해설한다. 이 모든 논의를 여기서 약술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4장의 결론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성자의 존재 근거는 그분 자신에게’ 있다(autotheos)는 것이다. Warfield의 칼뱅 이해는 참으로 유기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답습에 급급한 칼뱅주의자를 넘어선 진정한 칼뱅주의자의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칼뱅이라는 모퉁이돌이 아니라, 성경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반석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다. 이 특징은 다음 교훈과 이어진다.

셋째, 칼뱅주의자의 올바른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칼뱅주의자는 결코 칼뱅에게 맹목적이지 않다. 오늘날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칼뱅주의 저변확대' 같은 단순한 사고와 우격다짐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진정한 칼뱅주의자의 태도는 그렇게 저급한 수준이 아니다. 올바른 칼뱅주의자의 자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두 가지가 돋보인다. 하나는 칼뱅 저술의 올바른 독해(reading)이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할까? Warfield는 거칠고 사나운 칼뱅주의자들이 아니라 섬세하고 박식한 칼뱅주의자의 면모를 도처에서 풍긱고 있다. 전자는 결론만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만, 후자는 기승전결을 모두 논의할 수 있으며 상대방과 대화와 토론할 수 있다. 오늘날 칼뱅주의의 비극 중 하나는 우리가 전자에 속한 투쟁적인 칼뱅주의자의 후예를 종종 마주하지만, Warfield와 같은 후자의 부류는 도무지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날 많은 칼뱅주의자들의 칼뱅 해석을 대단히 지나치거나 대단히 부족한 오해 속에 대부분 머문다. 우리는 그 판단의 기준을 20세기 가장 위대한 칼뱅주의자 중 한 사람인 Warfield의 칼뱅 해석을 통해서 격차를 감지할 수 있다. Warfield라는 칼뱅주의자는 칼뱅을 지나치게 우상화시키지도, 지나치게 격하시키지도 않았다. 교부 역사와 종교개혁사와 당대의 칼뱅 해석을 모두 섭렵하면서, 동시에 칼뱅의 저술과 서신들과 역사를 정리하면서 최대한 공정하게 칼뱅을 바라보려고 애쓴다. 온늘날 일부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Text만, 그것도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하지만, Warfield는 칼뱅의 기독교강요와 서간문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들, 칼뱅의 Con-Text와 교회 역사 및 신학의 Con-Text를 모두 파헤친다. 이로부터 올바른 칼뱅 독해(reading)이 나온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의 겸허한 태도이다. Warfield의 이 태도는 부록으로 수록된 강연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지막 강연에서 Warfield의 웅변적인 선포는 칼뱅주의 고백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자에게도 약점이 없지 않다. 분명히 시대적인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시대적인 한계를 초월한다. 이 초월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분위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송영 혹은 예배의 모습이다. 일부 몰지각한 칼뱅주의자들은 칼뱅을 하나님 위에 모시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칼뱅주의자의 태도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 오늘날 칼뱅주의자의 태도는 Warfield와 비교했을 때 과연 어떠한지 물음이 필요하다.

네번째 교훈은 독자들에게 주어진 어떤 숙제에 가깝다. Warfield의 신학은 왜 계승되지 못했을까? Warfield가 1세기 전에 ‘오늘날 칼뱅의 의미’를 질문했다면, 우리는 ‘오늘날 Warfield의 의미’를 질문해볼 수 있다. 사실 Warfield 신학의 계승, 바꾸어 말해서 Old Princeton Theology이나 그 계승의 문제는 George Marsden, Mark Noll, David Wells 등의 여러 학자들이 이미 통찰력 있는 연구를 남겨놓았다. 여기서는 한 설교자를 언급하고 싶다. 웨스트민스터채플의 D.Martyn Lloyd-jones는 30대에 사역차 미국과 캐나다 방문했을 때, Warfield의 방대하고 심오한 신학을 접하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Lloyd-jones가 정식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느 설교자보다 신학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기반에는 청교도 유산 못지 않게 강조해야 할 인물이 Warfield이다. 이 증거는 <교리 강좌> 시리즈나 여러 설교에서 Warfield 읽기를 권하고 추천하는 언급 속에 잘 남아있다. Warfield는 칼뱅 이외에 수많은 신학 저술들을 남겼으며, 그 안에는 교부들의 유산까지 아우르고 있다(특히 Tertulian와 Augustine에 대한 방대한 논문들이 있다). 오늘날 칼뱅주의자들 중에서 Warfield 만큼 교부들에 해박한 신학자는 여전히 발견하기 어렵다.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의 저자 David Gordon은 오늘날 설교자들의 수준이 1세기 전에 비하면 유년생의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그만큼 우리는 기본적인 독해력과 사고력의 상실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다. Warfield 신학의 계승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학자들이 연구한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Warfield 신학의 깊고 심오한 사상이나 정신의 탁월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수준 낮은 현실에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 결론이다. '오늘날 Warfield의 의미’와 관련해서 우리는 <칼뱅>을 통해서 칼뱅에 대한 올바른 독해력을 배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독자들은 저자에게 동시에 저자가 가리키는 칼뱅에게 새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질문을 던져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대답을 주셨고 주시고 주실 것이다. 나는 오늘날 칼뱅주의를 "죽이는 것은 문자요” 칼뱅주의를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생각한다. 칼뱅이라는 위대한 악보를 펼쳐놓았지만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고 아름답게 연주하지도 못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칼뱅주의자를 자처하는 나팔수들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나팔수를 원하신다. 칼뱅주의자의 종착점은 결코 칼뱅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Warfield의 선포로 글을 매듭 지으려고 한다. 100여년 전에 Warfield의 깊은 가슴에서 울려퍼진 영광의 호소가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도 메아리치기를 바란다.

“칼뱅주의를 짓누르는 더 중대한 질문이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받으시는가?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열정 속에 감정이 고양되고 수고가 집약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에서 시작하고, 그 비전을 중심에 두며, 그 비전으로 끝난다.” (p.364)



덧글:
칼뱅의 별명: 비난만 일삼는 인간(The Accusative Case, p.18)

Warfield의 지적과 달리, 저 별명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633년 칼뱅을 싫어한 Jacques Le Vasseur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수세기 동안 떠돌아다닌 잘못된 정보는 Abel Lefranc와 Emilé Doumergue에 의해서 비로소 교정되었다. John Thomas McNeill에 따르면, 칼뱅의 친척 올리베땅의 별명은 "The Ablative Case"였다. 라틴어 한글 문법서에서는 보통 “5격” 혹은 "탈격"이라고 번역하는데, 별명이 붙은 이유가 흥미롭다. 올리베땅은 수업이 끝나면 학생 가운을 벗어던지는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라틴어에서 “탈격”은 대상에서 떨어져나가는 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베땅의 모습에서 학생들이 그 별명을 지어준 것은 적절했다. 칼뱅의 "The Accusative Case"는 올리베땅의 별명에서 착안되었을 것이다. 이 별명은 1세기 이후에 생성되었지만, 이미 Beza는 칼뱅이 주변 학우들의 악행을 비난하던 학생이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칼뱅이 학창시절에 비난을 얼마나 일삼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비난만 일삼는 인간'이 아니라 문법용어 "대격"에 해당한다. 아마도 칼뱅의 까다로운 성미를 조롱하는 별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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