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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4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평점 :
두개의 단편과 하나의 장편을 엮은 책이다. 묘사가 상세하고 날카로워서 세련된 느낌을 받았지만, 그만큼 차갑고 작품 전반이 우울하다.
첫 작품인 ‘하모니’는 예민미 넘치는 작품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랄까... 일거수일투족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는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것도 그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고 한다면 더더욱... 안네마리의 혼자만 고결하고, 완전무결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나이브함이 읽을 수록 열받아서 그래 어디까지 가는가 보자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환경과 억압받아왔던 삶이 안쓰럽기도 했다.
가면을 쓰다보면 이게 가면인지 진짜 나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내가 되고 싶은 상과 나를 동일시 해서, 무리하며 그 모습이 나라고 믿어버리는...? 세상의 미학을 쫓는 사람들은 한번쯤 경험해보지 않을까. 탐미주의가 허영과 사치로 매도될때도 있지만, 미학을 따르며 소비하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느낌이 어떨 땐, 참 허무하다.
등장인물 중 꼭 하나는 ‘무기력하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치명적인 하얀 병자’처럼 묘사한다. 마치 장식장의 인형같이 물건처럼 취급되기도 하고, 주변사람들은 그녀를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소유욕을 느끼는데, 인간 본성을 엿볼수 있었다. 성스러움이라는 틀에 가둬놓고, ‘그녀는 그렇게 행동하는게 당연하지’ 하며 서로를 고정관념에 단단히 묶어놓는다. 그녀 탓을 하며, 동시에 차지하고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세기말 몰락의 분위기에 쓰여져서 그런건지,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자기파괴적이다.
📖중요한 건 말투야, 말투. 자기가 그런 말투로 얘기하면, 그러면 자기가 갑자기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아. 아주 낯설어져. 그 말투는 우리가 함께 겪은 것들을 갑자기 모두 지워 버려. 나는 분위기가 편안해지기를, 나란히 앉아 웃으면서 행복해지기를 기대하며 기뻐해. 그런데 자기가 뭔가를 말하는 거야. 그리고 그 말투가 거기 있지. 그러면 곧바로 모든 게 차가워지고 낯설어 지고 곤혹스러워져.
도랄리체는 한스의 말을 긴장해서 듣고 있었다. 이 흥분한 목소리, 폭풍처럼 쏟아지는 말들이 도랄리체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말을 계속해야 했다. "그 말투가 어떤데?" 도랄리체가 물 었다.
"어떻냐고? 어떻냐고?" 한스가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무언가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자기는 접시를 밀어 놓으면서 적의를 가지고 이야기해. '이거, 저는 싫어요. 그런, 그런 말투야. 마치 자기가 나를, 우리가 함께한 그 모든 이야기들을 옆으로 밀어 버리듯이. 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괜찮아, 그게 자기 권리니까. 그렇게 이야기해“📖 ‘파도’ 중 인용
‘하모니’ ‘파도’ ‘무더운 날들’ 제목이 정말 작품을 관통한다. 영화로 제작해도 집중해서 볼 수 있을것같다. 화려한데 정적인 예술영화가 될테니, 개봉된다면 시네마테크같은 곳에서 상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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