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청춘문고 15
박혜숙 지음 / 디자인이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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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천천히, 모든 게 모두가 조금만 천천히 가면 좋겠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몇 정거장 전에 내려 걷는 게 좋다. 걷고 뛰는 걸 무척 싫어했는데 버스를 타면 금방 갈 거리도 내려서 걷다 보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된다. 언제 사라져버린 것과 언제 다시 와 있는 것 곧 사라질 것에도 눈을 맞추는 시간들이 대책 없이 애틋할 때가 있다. (p.53)

며칠 전만 해도 못 들은 척하던 할머니가
내가 가는 곳이 멀더냐 묻는 것이
거기 가면 친구도 많고 돈은 많이 들지 않느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보고 싶으면 어쩌냐
묻어둔 말이 들릴 듯 말 듯해서
어쩌면 언제나 먹을 밥처럼 내버려두었다가
언젠가 배 속 허전해오면 부를 이름처럼
빈 공기 들여다보고 서성이겠지, 보고 싶으면
그래도 누구도 몰랐다 한다 (p.56)

어쩌면 나는 그때 꿈이라는 것을 뭐 대단하고 화려하게 걸어놓고 감상할 수 있는 그림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환상 같은 어쩌면 허상 같은 거.
언젠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말하기 좋을 걸 꿈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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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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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갑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고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이제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집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육점을 하려면 근육이 필요하다. 어머니에게는 근육이 있었다. 어머니가 우는 나를 품에 안아주었을 때 나는 그 근육을 느꼈다. (p.166)

"엄마, 그만둬요." 나는 어머니를 다시 불러내려 했다. "방금 기차에서 내리셨잖아요. 안 그래도 다 깨끗해요."
"내가 여기 있고 이 일이 필요하면 내가 하는 거야."
"필요가 없다니까요. 오늘 아침에도 제일 먼저 거기부터 청소 하더라고요."
욕실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일. 어떤 사람들은 일을 갈망한다. 어떤 일이든. 가혹하든 고약하든 상관없다. 자기 삶의 가혹함을 쏟아내고, 마음에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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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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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라룸은 몸을 굴려 위를 쳐다보았고, 어둠이 빠르게 탑의 남은 부분을 올라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세상의 가장자리 아래로 넘어가면서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괜찮은 구경거리였지, 안 그런가?" 쿠다가 물었다.
 힐라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밤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였다. (p.27, <바빌론의 탑>)

닐은 장인 장모의 주장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믿는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죄인들은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편이 - 정의나 죄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지만 - 아무런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낫지 않을까. (p.344)

이선은 사후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계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라고 설파하지만, 이것을 예로 들어 사람들에게 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설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을 사랑하라고 촉구한다. 이선이 주장하는 것은 오해에 입각해서 신을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고 싶거든, 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의롭지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전한 신앙심을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p.362, <지옥은 신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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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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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넷이서 행복해지자며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엾어.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산 걸까.
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p.11)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p.45)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서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p.221)

애쓰지마.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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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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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이국의 호텔] 부분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부분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눈] 전문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나는 춤추는 중]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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