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라룸은 몸을 굴려 위를 쳐다보았고, 어둠이 빠르게 탑의 남은 부분을 올라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세상의 가장자리 아래로 넘어가면서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괜찮은 구경거리였지, 안 그런가?" 쿠다가 물었다.
힐라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밤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였다. (p.27, <바빌론의 탑>)
닐은 장인 장모의 주장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믿는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죄인들은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편이 - 정의나 죄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지만 - 아무런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낫지 않을까. (p.344)
이선은 사후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계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라고 설파하지만, 이것을 예로 들어 사람들에게 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설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을 사랑하라고 촉구한다. 이선이 주장하는 것은 오해에 입각해서 신을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고 싶거든, 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의롭지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전한 신앙심을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p.362, <지옥은 신의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