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타당한 통찰이다. 그런데 일단 알게 된다는 것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알기 전과는 나의 의식이 비가역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그래서 ‘아는 만큼 안 보이기‘도 한다.
(p.30)

인간의 뇌가 세상을 이야기로 인식하다 보니,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언어를 창조하고, 언어는 추상적인 의미마저 만들어 내고,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종(種)이 된 것은 아닐까? (p.40)

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를 갖고 주의를 넓게 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이다. 한 발 물러서면 시야가 넓어진다. 그렇게 넓혀 놓은 공간에 경직된 당위를 해제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어서고, 근시안적으로 보면 엉뚱해 보일지 모를 해결책을 찾아내는 창의성도 들어선다. 여유는 세상과 더 잘 지내기 위해 개인들이 애써 확보해야 할 공간이다. 그 여유 공간 속에서 날 선 감정들은 희석된다. 그리고 그 안에 유머가 채워진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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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연민하는 것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연민을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그러나 교활한 수단이라는 걸 당신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타인을 동정한다. 당신이 애처로워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애처로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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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축소하려는 사람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일은 동물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다. (p.50)

어떤 자연사는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언어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저 언어들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은폐한다. 그래서 모든 보호소가 인도적인 장소라고, 모든 유기동물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다고 믿게 만든다.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언어? 아니면 현실? (p.144)

(...) 그래서 농장동물이 당하는 가학 행위에는 침묵하는 반면 개식용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어차피 우리의 일상이 동물의 고통을 전제한다면 고통받는 동물의 종 따위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무엇보다 동물과 관련해 완벽한 실천주의가 되지 못할 바에는 실천주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편이 차라리 일관성 있다는 입장이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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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진수는 사회복지 정책과 소외 계층에 관심이 많았고 비정규직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서도 소리 높여 비판했다. 그렇지만 소정의 삶에 겹겹이 드리워진 가난 앞에서는 자주 당황하고 의아해했다. (...) 그 애에게 가난은 정형화된 개념이라 개별적이고 다양한 궁핍은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난해한 문제와 같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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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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