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피구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p.175)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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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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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과 같았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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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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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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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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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 경영에 대한 상황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 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p.67, <대기발령>)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p.137, <현수동 빵집 삼국지>)

"괜찮습니다. 일어나서 계속 읽으세요."
멀리 떨어진 방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 한번의 실수로 지금까지 한 모든 노력이 무너졌음이, 다시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민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고 싶어졌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손을 꼭 쥐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괜찮아요. 일어나서 계속 읽으세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괜찮다고, 아직 기회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p.229, <카메라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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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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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날씨가 흐려서 강의를 들으러 갈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마음 굳게 먹고 갔지요. 나이든 교수님이 뭐라고뭐라고 하시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구요. 다만 흐린 날이면 따뜻한 우유에다 카카오 가루를 타 마시면서 이불 밑에 앉아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나 보았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뜨거운 나일 강변에서 펼쳐지는 살인 사건이나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벌어지는 살인. 살인이 벌어져도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고 다만 포와르와 함께 범인을 쫓으면 되는 세계, 악과 선이 분명해서 어느 누구를 향해 "저, 나쁜 놈!" 이라고 막 말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달콤한 카카오를 마시는 저의 작은 소망에 충실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저는 날씨가 흐리면 하지요. (p.74)

우리는 하이델베르크라는 이 나라의 오래된 성이 있는 작은 도시로 소풍을 갔다. 성 위에 올라 우리는 네카강도 보고 성도 보고 단풍도 보고 그랬다. 이 나라 풍광에 대해 불평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무심코 그랬다. "단풍은 역시 내장산이 최고야." 다들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다들 웃었다. (p.78)

날씨가 꽃 필 만큼 좋다가 갑자기 꽃 질 만큼 사나워질 때 동백은 꽃비를 나무 그늘 아래로 뿌린다. 동백은 지는 꽃이 아니다. 동백은 저를 제 그늘로 던지는 꽃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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