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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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날씨가 흐려서 강의를 들으러 갈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마음 굳게 먹고 갔지요. 나이든 교수님이 뭐라고뭐라고 하시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구요. 다만 흐린 날이면 따뜻한 우유에다 카카오 가루를 타 마시면서 이불 밑에 앉아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나 보았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뜨거운 나일 강변에서 펼쳐지는 살인 사건이나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벌어지는 살인. 살인이 벌어져도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고 다만 포와르와 함께 범인을 쫓으면 되는 세계, 악과 선이 분명해서 어느 누구를 향해 "저, 나쁜 놈!" 이라고 막 말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달콤한 카카오를 마시는 저의 작은 소망에 충실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저는 날씨가 흐리면 하지요. (p.74)

우리는 하이델베르크라는 이 나라의 오래된 성이 있는 작은 도시로 소풍을 갔다. 성 위에 올라 우리는 네카강도 보고 성도 보고 단풍도 보고 그랬다. 이 나라 풍광에 대해 불평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무심코 그랬다. "단풍은 역시 내장산이 최고야." 다들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다들 웃었다. (p.78)

날씨가 꽃 필 만큼 좋다가 갑자기 꽃 질 만큼 사나워질 때 동백은 꽃비를 나무 그늘 아래로 뿌린다. 동백은 지는 꽃이 아니다. 동백은 저를 제 그늘로 던지는 꽃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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