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 경영에 대한 상황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 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p.67, <대기발령>)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p.137, <현수동 빵집 삼국지>)
"괜찮습니다. 일어나서 계속 읽으세요."
멀리 떨어진 방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 한번의 실수로 지금까지 한 모든 노력이 무너졌음이, 다시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민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고 싶어졌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손을 꼭 쥐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괜찮아요. 일어나서 계속 읽으세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괜찮다고, 아직 기회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p.229, <카메라 테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