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실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가지런히 해주고, 누나보다 한발 늦게 달려온 남자아이까지 두 아이를 한꺼번에 꼬옥 끌어안았다. 유난실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을 갖게 된 슬픔.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을 가져버린 슬픔.

- 희망은 원래 재앙이었다. 전쟁, 질병, 살인 등과 같은 상자에 들어 있던 것.

- 밤바람이 불어왔다.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지만, 밤바람은 조금 시원해진 느낌이다. 낮이 밤으로 변하는 것처럼 여름이 가을로 변하는 것도 특정할 수 없다. 슬금슬금 그렇게 되다가 어느 날 ‘아, 여름이 지나갔구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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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에트는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빠는 참 좋은 아버지가 될 텐데! 결혼하지 않고 뭘 기다리는 거야?"
"많은 일을 잊어버리기를."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금방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거야?"
"절대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지."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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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p.51)

오랜만에 한가했던 일요일 오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인디언 식으로 그들의 이름을 지어보자고. 아이는 재미있어하며 자신의 이름을 ‘반짝이는 숲‘이라고 지은 뒤, 여자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치 가장 정확한 작명이라는 듯 단호하게.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응?
그게 엄마 이름이야.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았다. (p.100)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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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씨가 녹슨 기타를 들고 커튼 뒤에서 걸어나왔다
친구들이여, 녹슨 씨는 일평생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말을 바꿨다
제군들이여, 그러나 녹슨 씨는 선생도 장군도 아니었다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너희들이여, 이곳은 너무 고요해서 소란하고 나는 귀를 잃었소
그러니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내가 내뱉는 소리마저 듣지 못하오 이렇게 기쁠 데가
녹슨 씨는 청중들 앞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생애 첫 연주를 시작했다 <녹슨 씨의 녹슨 기타>부분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별 시대의 아움>부분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발 없는 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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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난 로봇들이 무서웠어요.

도민 왜지?

헬레나 그들이 우릴 미워하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알퀴스트 이미 벌어졌죠, 그 일은.

헬레나 그래서 난 생각했죠... 만약 로봇들이 우리와 같아져서 우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릴 그토록 미워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그들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처럼 된다면요!

도민 아, 헬레나!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돌덩이를 인간으로 변신시켜보라구. 그러면 그들은 우릴 돌로 쳐서 죽일거야!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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