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뿌리는 바다에 닿고, 바다는 나무를 품는다. 아니, 그 반대다. 나무가 바다를 품고 있다. 나무는 바다보다 크고 넓다. 내 눈앞에는 나무의 길고 깊은 뿌리가 태평양을 헤엄쳐서 브라질이나 인도네시아의 어느 밀림에 닿는 그림이 그려졌다. 나무가 밤마다 한 번씩, 혹은 두 번씩 태평양의 물밑을 오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나무가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만큼 악의적인 편견도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태평양을 건너온 야자나무를 보라. 건너온 나무가 건너가지 못하겠는가. 내 생각은,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데로 귀착했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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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가 자기들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죠. 여기 강사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인 거 눈치채셨습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건 일단 불신하고 보는 세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판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준다 싶은 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아이들이에요.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해야 합니다.(p.24)

뭘 해도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만큼 사람 정신을 좀 먹는 것도 없어. 사람들도 그걸 알아. 어떻게든 그런 의심을 떨쳐버리려 필사적으로 애쓰지. (p.149)

진보 인사들이 비판을 받는 게 뭡니까. ‘매일 남 탓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희 프레임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약한 거고, 구린 거죠. 군대에서 총기사고가 난다,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죽인다, 그러면 이게 뭐 사회구조 탓이고 교육 탓이고 친일파가 나라를 세워서 그렇다는 게 진보 진영 논리잖아요. 그런데 나강 캠패인으로 ‘나는 강하다.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박힌 애들 머릿속에서는 그런 진보적인 사고방식이 대번에 추하고 약한 걸로 여겨지는 거죠. 그 나이 때 애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약해 보이는 거예요.(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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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내고 딸과 둘이 맞은 그해 봄날의 벚꽃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해 5월의 신록 또한 여전히 눈부셨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도 자신이 꽃을 보고 탄성을 지르고 신록에 눈부셔 한다는 사실이 죄를 짓는 것 같으면서도 안심이 되던 것을 윤은 기억한다. (p.47, <오후 다섯시의 흰 달>)

너 업어줬다는 아이는 만나봤어? 내가 얘기한 너와 나의 영화 생각해봤어? 근데, 은주야, 우리가 정말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근데 영화가 뭘까? 영화는 너한테 뭐냐?
경화는 술을 한잔한 것 같았다. (p.134, <은주의 영화>)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꽃들은 혼자서 아름답고 혼자서 슬프다. (p.189,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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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p.18)

내가 뭔가 아름다운 것을 손에 쥐고 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마다 책장에서 한묶음의 종이를••••••• 왠지 모르게 늘 약간 온기가 느껴지는 책 한권을 꺼내 펼쳐드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다. 내 공간을 책으로 채워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성/사람이 뭔가를/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옳다. 사람에게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엔 책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p.206)

이렇게 가정해볼까.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든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 없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상태를 두려워한다. 그가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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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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