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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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빅터 프랭클 교수의 책을 처음 본 것은 한 3년전 전으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를 읽고 난해해 했었다. 책의 광고 멘트와는 달리... 상당히 많은 문장의 구성이 이론적인 텍스트들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단순 명료한 그런 답을 찾고자 그 책을 펼쳤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뭐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잡았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활을 2부는 그가 주장하는 이론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을 3부는 그 연장선상으로 비극속에서 낙관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와 있었다.
역시 1부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솔제니찐의 <이반~>를 읽을때의 그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묘한 이질감. 레비 선생님의 책을 읽을때도 그랬지만, 그것이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지금에 와서 <이반~>을 다시 읽으면 그때 느꼈던 '재미'가 지금에 와서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의 수용소도 생존률이 50% 미만이라고 모 책에서 읽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의 책이 소설이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것들을 담았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 기법을 이용하여서 그들의 굴절된 부분을 역발상적으로 인지시켜 줌으로서 치료를 하는 예시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나는 그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그냥 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고의 패턴이 생활 습관처럼 배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 뭐 아직 3부까지 읽어본 것이 아니고 그리고 로고테라피 이론의 입문서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떻게 생환했는지가 메인인 책을 봤으니까...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인간은 학살을 자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나 그런 잔혹한 공간에서 숭고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였다. 그래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 그런 사람은 아주 극소수겠지만. 그 공간에서 희망을 보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 진중하게 탐독할 에정임. 뭐 그래서 다른 저작들도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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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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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주요 주제는 '신데렐라 이야기'로 전세계에 전해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좀 변형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남겨진 신화적 잔재들을 조합해서 그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는 즐거움이었다. 이 시리즈를 처음 읽을때 느꼈던 그 부분, 마치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한 페이지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까 종장 전 파트인 인디언들이 번형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우에는 눈물이 나왔다.
저건 분명 파라다이스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들은 박제가 되어가고  있고 그 증거로 그들의 이야기들이 텍스트로 전해지고 있으니까 매우 복잡한 기분. 신화는 구전되는 것이고 그걸 텍스트로 만들고 학문화 한 것들은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낸 사람들이니. 그래도 저렇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른 그들의 문화에 침식되어서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워졌다. 보호구역에서 살아야하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그도 아직도 감옥에서 살고 있고... 그래도 나는 반대편 땅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신화를 읽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신데렐라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서 여러가지로 연결된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왔는데, 일본 만화에 변형되어서 많이 나오던 가구야 공주의 야기도 역시 등장. 그녀의 청혼자들에 요청한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알게되었지만, 역시 불편했었다. 그 이유는 크게 <월광천녀>의 그 시선 때문이기도하고 책의 저자가 이웃나라의 교수라서 인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항상 그들의 신화로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2권을 읽었을때도 '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단군신화'에 대한 부분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지만, 다른 나라의 신화는 다루고 있었지만, 정말 가까운 이웃한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인류학적인 시각으로 다룬 책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우리'라는 말을 정말 혐오하는데도, 불편한 부분은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나도 '우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논리로 '우리'가 없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는 주장에 뭐라고 반박해야할지 모르겠는데도,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우리가 아닌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차별'로 느껴진다. 자신에(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다룬 책을 찾아보겠다는 것)대해서 합리화를 하자면, "그냥 이땅에 오래도록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신화의 원형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정도 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언제 정착했냐는 그 기준으로 '우리' 그리고 '타자'를 나누는 기준은 불편하다. 이 신화가 '우리'의 근원이고 우리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말. 그저 이 땅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과거라고 말해주는 그런 입장을 마주하고 싶다는 것. 민족적(가족적)인 기원이 아니라 단지 그런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불편한 것 이겠지. 나는 당신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당신은 '이타자(외부인)'인가 아니면 우리안의 소수자인가. '국적'적인 부분을 열외로 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나라의 다수가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 국민, 시민)에 대한 기준에는... 그래서 그 신화적 연결성에 대해서 듣는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으려나. 내 안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를 모어를 사용하고 있고 같은 시대적 배경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이기도 하지만, 같은 땅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도 우리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노력중이다. 그건 반드시 그래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그건 길들여지지 않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리 생각해야 하는 것.
그래서 그 기준이 모어를 벗어나서 좀더 자유로워져서 그 기원이 모두 같다는 것까지 연결된다면 자신의 안에서 우리의 기준은 언젠가는 확장될지도 모르겠다.

그 이외에 기억에 남던 신화적 잔재는 예전에 모 방송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특이한 행동에 대해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신화적 해석을 알려주고 있었다. 콩과 제비집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알고...  방송에서도 이런 부분을 다루어 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뭐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대한 부분은 공포니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좀 서글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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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수놓이는 소리 2
진 토리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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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베스트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감히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세계관이나 주장이 있는 이야기거 얼마나 될까요? 긴 토리코씨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계의 균열에 대해서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이런 부분을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팬레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일족의 아이들이 최후의 날을 피해서 살아남기를 택했지만, 그들은 멸종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고 단지 그것을 지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대 새인간이라는 설정이지만, 그건 인간대 자연이라는 설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은 문명화 된 인간과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갈려는 소수민족.
헬로가 택한 선택과 리틀 울프가 택한 선택 둘 중에서 정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은 어떤것일지 아직까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일족의 예언자 조차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2권의 마지막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의미가 공존을 의미하는 것인지 변절(주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는 것을 상대 입장에서는 변절이라고 하니까 변절이라고 했습니다만, 변절도 먼가 괴리감이 느껴지는데 달리 생각나는 단어가 없네요. -_ㅜ)을 의미하는 것 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자연(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자연과 평화적 공존)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면 그들이 그들로서 남아있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 한지 아니면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멸하는 것이... 그건 그들 자신의 선택이니까 제 삼자적 입장에서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이 끝까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들의 세성을 지켜가다가 그것들을 계속 소소하게라도 이어나갈 수 있는 내일이 왔스면 좋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럴리가 만무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상상속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그 세계조차 절망스럽다면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워요.
만화를 보는 목적은 즐거움과 현실도피인데 그곳에서 현실을 보게된다면 그건... 그렇다고해서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먼 균열(주인공만 예외인 설정)을 보는 것도 괴롭지만, 적당한 노선에서 타협점을 찾아서 희망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별로 그렇게 될것 같지는 않지만요.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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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운즈 -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텔아비브 젊은이들의 자화상
루트 모단 지음, 김정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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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에서 처음 나온(소인이 알기로는) 그래픽 노블. 분쟁 지역인 이스라엘에서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입니다. 전체적인 느낌이라면 이 나라에서 우리(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들이 북의 도발에 대해서 대부분 전쟁의 위기로 인지하지 않는 부분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방송에서는 폭탄테러로 인해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사람들의 뉴스가 끊이지 않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매우 무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사는 공간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부분은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차별을 가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태도에 화를 내는 여주인공 덕분에 알게되었습니다. 죽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하하. -_-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극화에 가까운 그림체에는 그렇게 끌리지 않았지만, 배경과 색에 대한 묘사가 매우 인상적 이었습니다. 비슷한 느낌이라면... 올드독(정우열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색감이요. 그리고 선을 이용해서 구분하는 감각도.
읽으면서 분쟁에 대한 느낌(혹은 감각)에 더 접근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코비의 아버지 때문인거 같기도하고...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저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뭔가 불편한 감각도 있었고... 그건 아마 제가 반대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지금의 사태를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힘을 쓰는 그 나라 사람들의 젊은이들은 어떠한 생각들을 하고 그런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 피해자 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반성이 있으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이 그럴 턱이 없을텐데 말이에요.
뭐 별로 교훈적인 것들을 바란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인지는 언급될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없었고 그냥 전쟁 가운데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그 부분에 대해서 마주쳐도 무감각한 느낌이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엄청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두번째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별로 손이 갈 것 같지는 않았어요. <페르세폴리스> 같은 반전(2권에서 유학가서 찌질한(?) 삶을 살며 인종차별을 실감했던 부분)을 기대 했지만, 그런것도 없었거든요. 뭐 그렇다는 이야기. 내돈 내놔라!! 솔직히 좀 많이 낚인 기분을 지울 수는 없네요. 배경으로 저를 위로하려고 해도... 이책은 인터넷 서점도 아니고 도매에서도 산게 아니라 그냥 정가서점에서 낚여서 산거라사요. 우후후후후ㅜ후후ㅜ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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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 퍼니 학원 앨리스 16
타치바나 히구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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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더 버닝했던 작품. 이번에 기회가 생겨서 원작을 다시 볼 일이 생겨서 천천히 읽었다. 솔직한 평을 말하자면... 컷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서 잘 읽히지 않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뭔지는 계속 궁금해 했었는데 뒷 부분에 가면서 그걸 알게되어서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라기 보다는 죄책감이 줄었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 심정이었다. 사실 이 만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은 백천사 라인의 유명한 12지를 소재로한 모 작품이랑도 비슷한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뭐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가 내린 결론.
'앨리스 학원'라는 이질적인 공간은 학생들을 '선택받은 존재'로 느끼도록 가르치는 것이지만, 사실 그들의 입장이 아닌 선택받지 않은 존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을 격리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 그 학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어린아이들을 사회에서부터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었다. 위험분자는 격리시켜야 하는 건가.
부모를 만나기 힘든 환경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국가가 관리하는 시스템일텐데. 그렇다면 결론은 앨리스를 가지고 태어난 자녀가 있는 부모를 제외한 대다수가 이 어이없는 시스템에 동조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때도 그건 분명히 눈앞에 펼쳐져있는 현실이었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격리되어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누가 결정했는가? 그들이 정말 소중한 존재라면 그들을 체제 유지를 위한 소모적인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그들을 체제내에서 함께 공조할 수 있는 여러가지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국가로서 시민에게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 아닌가. 국가(사회)는 소수자의 입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앨리스 학원이라는 시스템(국가 혹은 사회)는 앨리스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위헙하는 요소들로 부터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말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최강(?)의 시스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교장 개인을 위한... 초등부 교장이 뭔 권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보기에는 그냥 찌질한 어린이로 보이니까 말이다.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주 유아적인 발상인 애정결핍 애쉑기말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아이들에 대한 보상은 성인인 내가 봐도 너무나 가혹한 처사이고,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돌아가는 시스템이 참으로 어이가 없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 느낌인데, 뭐 이게 현실과는 크게 간극이 없게 느껴저서... 푸하하하. 그냥 웃어봤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지배입장인, 군림하는)이 아이라는 것이 실소를 머금게 한다고 해야하나. 이건 풍자 코드인가 개그 코드인가? 그치만, 그네들의 만화에서 이런 설정은 매우 비일비재한 관계로 말이다. 별로 언급해야 할 가치도 못느끼겠다. 그들의 교육시스템은 사회시스템의 축소판이라서 사회에서 큰 일(?)을 하실 분들은 종종 교육시스템 안에서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기를 요구받으니까 말이다. 선거에서 각종 비열한 수가 판치는 것은 매우 비일비재한 일이고, 선거를 통해서 군림하는 존재가 되면 어른들에게 그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는 공간. 학교라는 공간은 그런 공간으로 그려질 때가 참 많았다. 아 이런거 볼때마다 정말 짜증난다.
나는 일본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게 어느정도의 과장이 있다고해도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이타자의 입장에서 그것에 대해서 극대화하는 환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실과는 간극이 있다고해도... 대다수의 매체에서 그런것들을 그려진다면, 그게 과연 현실과 간극이 있다는 걸까? 그건 현실이 아니라도 그들의 환상이나 이상 아니면 노골적이지 않은 은유적인 방법으로 그려지는 분명한 현실일테니 말이다.

반 앨리스 단체에서도 앨리스를 가진 그들을 시스템을 위해서 소비되는 말로 여겨지고 앨리스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감정이나 입장은 단 한번도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뭘 위한 이상인가? 앨리스 학교에 반대하는 단체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앨리스 학원의 비인간적인 가혹한 처사에 분노해서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
시스템은 결국 어디를 가던 똑같다는 말로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고등부의 교장과 그의 생각을 지지하는 선생과 학생부 임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과연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이상을 내세울 것인가. 그들은 사회와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그들은 좀더 덜 완고하게 그들을 말로 사용할 것인가. 뭐 이런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 불편한 점의 정점에 있는 것은 그들이 초등학생 이라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중학생만 되어도 이런 죄책감을 덜 들텐데 말이다. 얼마나 가혹한가. 아이들에게. 어짜피 시스템은 나이와 대상을 불문하고 침범하는이지만, 그래도 그 자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싸우는(혹자는 투쟁하는) 그들이 어린 아이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불행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뭐 가급적 그런건 보고 싶지 않은 관계로... 괴롭다.
작가는 그들이 어린이기 때문에 더 희망적이고 대안을 바라본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저런 공간에서 살아남아서 멀쩡한(?) 성인이 되는 건 아마 정말 자존감이 정말 강한 존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이가 스스로 스스로의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다. 천연으로 반짝이는 아이더라도 그 공간에서 어느정도 살아가다보면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고 자신을 잃어버릴텐데.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답답해진다.
나츠메와 루카삐약은 천연의 보석을 만나서 과연 다행일까? 현실이 아니니까 그들이 모두 함께 나락에서 사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저들의 세계관의 현실을 보면 별로 그럴거 같지도 않은거 같아서 짜증난다. 묘하게가 아니라 정말 현실감이 있으니까. 어떤 부분은 극대로 확장한 영역도 있지만... -_- 그래서 끝까지 지켜봐줄 예정이다. -_-++ 그전에 애니메이션 다음시즌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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