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 Piece 5
아시하라 히나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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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는 미즈호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저도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번 권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양가감정'에 대해서 다루는 부분이 특히 많았습니다. 양가감정에 대한 부분은 레미의 돌발 행동으로 부각되더군요. 레미는 미즈호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질투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레미 본인의 고백. 그리고 이어지는 레미의 이해하기 힘든 돌발 행동. 레미는 왜 그 남자-나르미의 형을 찾기 위한 연장선인-를 찾으려고 한걸까요? 미즈호는 레미가 어찌하여서 그런 행동을 하게됬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오는 결론은 없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자신은 레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익숙한 패턴으로 자신이 바라보던 면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으니까 관계의 균열에 대해서 느끼기는 보통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즈호는 그런것들로 부터 본인을 굉장히 마비시키고 산다는 느낌이 있던지라, 많은 것들을 마비시켰던 미즈호로서는 레미가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레미가 미즈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일지 조차 가늠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움만 남았었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상대방으로 향하는 애정의 감정이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사람은 크게 같은 방향이지만 조금씩 다르다면 다르고 크게 다르다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  방향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상대방을 비난하여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덮으려고 하는 감정. 그리고 두번째는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어서 상대방으로 부터 자신이 원하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세번째는 그런 현실로 부터 도피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도피하는 방법에서 자신을 비난 하던가 상대방을 비난하는 방법을 선택 할 수도 있지만, 물질로서 그것을 대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것에 대한 감정을 여러가지 양상으로 덮어쓰려고 하는(방어기제)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던가... 그 부분에 대해서 합리화를 하던가... 부인한다던가... 방법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 도피의 배경은 어렵지만 간단한 기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상처 받고 싶지 않다는 것'. '나를 보호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의 '+'의 방향을 말하라면, 비교적 건설적이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파괴적이지 않은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고 고통에 동감하는 방법.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을것 같습니다.
레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었일까요? 분명한건 레미는 전자쪽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기에는 두가지-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양가감정-를 선택했기 때문에 자신의 양극단을 오가는 감정에 굉장히 고통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자신을 향해서 돌아보고 타인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생긴 미즈호를 레미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미즈호의 고백에 나르미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녀의 용기있는 한걸음으로 인해서 그녀 자신이 크나큰 상처를 받는 일이 없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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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야구선수 자와 씨 2
미시마 에리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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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스포츠를 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만화는 거의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여자 아이들은 운동을 하는 주체가 아닌 응원을 하는 주체로만 존재하는 것을 많이 봐왔던 터라서 이런 설정을 가지고 연재가 되는 만화가 있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스포츠보다 이 종목(야구)이더 여자에게는 문호를 개방되지 않았다는 이미지도 있었고, 그리고 유명 작가(H2의 그분)의 격찬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이 만화에 대한 환상을 크게 키웠습니다.
사실 "야구를 하는 여자"는 스포츠에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저로서는 뭐랄까 남자들의 성역에 도전했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여자 사회 야구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일본에는 여자도 프로 야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만화를 통해서 알게되었습니다. 국내의 경우에는 여자 야구 국가 대표 선수들은 세계대회에 나가기 위해서 회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해서 간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분-  야구 스포츠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정말 즐기는 - 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네. 실은 친구중에서 사회인 야구를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도 자와씨처럼 멍도 많이 들고~ 근육통에 시달리고~ 피부도 많이 타지만, 그래도 정말 좋아하면서 야구를 하더군요. 눈 한쪽에 멍이 들었을때는 관두라고 많이 화냈었습니다. 뭐 이제는 그녀가 등이나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안마도 힘내서 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그녀의 등을 발로~ 즐겁게 -ㅍ-;; 여자야구 대회 결승전 시합 전날 집에 놀러와서 다음날 아침에 먹을 김밥도 싸줬습니다. ^^* (결론: 전 그녀의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는 이야기.)

아무튼 이런 저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저는 책을 펼치고 즐겁게 본 부분도 있었지만, 그 부분보다는 실망한 부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 만화는 주인공 자와씨의 활약상을 철저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그려지고 있는데요. 관찰자 시점에서 그려진다는 것은 여러가지 제약이나 편견이 크게 작용 할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이 작품은 그 다수가 가지고 있는 그 편견을 기반으로 관찰자 시점이 그려집니다.
스포츠를 하는 주체가 아닌 응원의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이 만화의 이야기 전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을 기반으로 자와씨에 대해서 해석하고 잣대를 적용하고 그리고 멋대로 판단해 버립니다. 야구 배팅센터에 온 그녀와 그녀의 일행들을 보면서 하는 두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즉 '야구를 하는 사람은 남자이고 여자는 응원을 한다'에 대한 것 그리고 '여자는 주체로 있는 것보다 주변인(좋게 말하면 응원하는 주체)으로 남는 것을 선호한다'에 대한 부분이 그들의 단편적인 대화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편견을 향해서 그녀는 '홈런'을 날리죠. 그리고 그 홈런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은 이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는 다들 예상하시는 대로 일것 같아요. 전 이런 전개를 희망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전개안에는 분명하게 한계를 담고 있습니다. 저런 생각이 대부분들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도 대부분 저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또다른 2차적 편견을 심어 줄 수도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그녀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이런것들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서, 그런 의지를 낮추거나 아니면 두려움을 키우는 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건 편견이라기 보다는 환상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좋게 말하면 말이죠. 여자의 육체를 소비하는 이 사회의 매우 구조적이고 일반화되어있는 태도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만화에서는 대부분의 에피소드가(정말 몇개를 제외하고는...) "야구를 하는 그녀"가 아니라 "야구 옷을 입은 그녀"에 대한 묘사가 참 많습니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요. 그녀가 속옷을 입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부분은 함께 야구를 하는 동료도 그리고 그녀를 관찰하는 관찰자분들에게 정말 중요한 주제더군요. 그녀의 몸이 어떤 형태인지에 대한 부분도 그렇구요. 작가분이 여자라던데- 이런 부분을 스토리를 짜고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릴지 참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이 주제에 관련한 에피소드들은 정말... OTL
'여성의 몸은 남성 주체로 의해서 소비되고 그 이미지가 재생산 될때 의미가 있다'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분명 있으시겠지만, 이게 정말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가장 쉬울것 같지만, 사실 가지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이 보통은 ... 그렇게까지인 분들이 아니시더라도 이런 생각이나 시선에 대부분 익숙한편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해도 그런 시선을 받는건 불편하지만, 종종 그런 시선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이 만화가 가진 불편한 부분에 대해서 크게 인지가 없다면, 이런 가치관에 침식당했다는 것에 가까운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거라고 기대를 했던 부분은 '그녀의 노력'에 대한 부분이었었어요. 여자도 남자의 이원적인 구분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향해서 노력하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했었거든요. 물론 그런 기존의 가치관(여자는 응원을 하는 주체)으로 바라보다가 자와씨의 목의 그 선을 보고 ... "정말 야구를 하는 여자아이"라고 알게되는 부분 이런건 아주 나픈편은 아니었어요. 편견이 극복되는 부분이니까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편견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서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패턴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주의가 필요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개인의 차이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그런 부분들을 기대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그런 편견의 확대하는 느낌들이 많아서 보면서 내내 좀...
그녀는 야구를 하는 행위자로서의 주체인지 아니면 소비 당하는 몸으로서의 소비의 주체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작가분은 이런 불편한 다수의 시선인 편견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로 인하여 문제 제기를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받은 느낌은 그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부분이 더 많았다면 불편함 없이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을 즐겁게 봤을테니까요. 전 명백하게 불편했거든요.
별 불편함 없이 보신 분들이 많으시다면... 이게 노림수는 아니고 그냥 작가분도 의식하지 못한 그 기저에서 나올 정도로 저런 사고의 패턴에 대해서 침식이 심하다는 역설적인 증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젠더의 한계'에 대한 부분은 인식하기도 어렵고(특히나 반대 성일 경우에는) 인식한다고 해도 자신과 관련된 부분이나, 아니면 누군가가 말해줘서 아는 경우가 많은것 같아요. 저만 해도 뭐... OTL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미는 있네요. 저처럼 불편해 하는 친구가 저말고 주위에 또 있긴 했었거든요. 한사람 뿐이었지만요. (먼눈) 생각해보니까요. <H2>의 그분의 만화에도 그녀들은 항상 그렇게 소비가 되어왔었네요. 서비스 컷으로. ;;;; 네. 저도 그 패턴을 좋아라 하면서 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참 이쁘네~" 변명을 더해보자면, 그때도 ㅍㅌ를 매번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말 도통 몰랐었습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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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자자 1
타카오 시게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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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골든데이즈> 엔딩을 두고두고 곱씹었습니다만, 그래도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골든데이즈>의 엔딩은 기억 못하는 분이 분명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엔딩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그이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세계2차대전 중의 이탈리아군에 입대하여 지구를 지켰다고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엔딩과 함께 원폭의 참혹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패턴의... 철저하게 피해자 시각으로서의 그들만 그려지고 있던 작품입니다.

<같이자자>의 주인공은 '우사미 이치코' 15살의 소녀로 이야기의 시작은 이치코의 가출로 시작됩니다. 뭔가로 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도망치듯이 집을 나온 그녀. 몇일동안 거리를 방황한 탓인지, 아니면 잘못 넘어진 탓이 더 큰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정신을 놓아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대려 온 탈을 쓰고 있는 소년(?) 키도 코하루. 그녀를 주어온 코하루가 살고 있는 집의 가족 구성원은 좀 특이했습니다. 집주인인 후지히로 나오야, 그리고 그의 이복 여동생인 하루카, 하루카의 소꼽친구인 코하루, 그리고 이혼해서 아이와 함께 이 집에 살게된 타케루. 보통의 가족 구성원과는 어딘가 좀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이치코는 기절했다가 깨서 자신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는 하루카를 보고 깜짝 놀라서 뛰어 나오다가 타케루를 마주치게 됩니다. 타케루로 부터 코하루가 자신을 간호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보통 그나이의 아이와 달리 어른스러운 이치코. 특이한 구성원인 그들의 사는 집에서 그녀는 바로 어른스러운 역할을 스스로 떠밎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당황하는 그들(집주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그녀. 그리고 그들이 집안일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쌓인 빨래까지 하려고 합니다.
빨래 더미에서 '아이의 양말'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그녀를 보고, 코하루는 이치코가 뭔가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의 불안을 잠식을 멈추어 줍니다. 불안해하는 이치코에게 함께 자자고 말하는 코하루, 이치코는 그의 호의를 다르게 해석하고 당황했지만 그의 호의가 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마워 합니다.

꿈속에서 이치코는 언니로 부터 심한 비난과 부정의 말들을 듣고 괴로워 하던 중 코하루가 그녀를 그 꿈에서 부터 깨워서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코하루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포에 대해서 고백하는 이치코. 이치코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데, 그 날 그녀는 학교에 늦어서 급하게 집을 나서다가 그만 자신의 조카를 발로 차고 말은 사실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언니와 형부는 그녀에게 전혀 비난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언니와 형부는 그녀를 매우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조카(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에 대한 타케루의 질문에 그녀는 화제를 돌려 그녀는 그녀가 언니와 형부와 살게된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주제에 대해서 그녀는 명확히 회피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모님 두분은 모두 어릴때 돌아가셨고, 할머니 마져 돌아가셔서 그녀의 가족은 언니 그리고 형부 조카가 유일한 가족이라는 이야기...
'이치코를 믿는다'는 언니와 형부를 의심하게 된다는 그녀. 아이가 보이지 않게 된 이유를 물아보는 나오야. 아이가 제일 불쌍한데 가해자인 당신이 왜 우느냐고 말하는 하루카. 조카가 죽은게 아닌데 뭘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느냐고 말하는 코하루. 아이를 두려워 하는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아이에게 소리가 나는 신을 신긴 타케루.
코하루는 그녀에게 입주 도우미 제안을 합니다. 코하루의 제안에 찬성을 하는 사람은 타케루와 나오야. 그리고 하루카는 "재정신이야?"라고 반응합니다. 이치코도 아이가 있는데 이 집에서 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련 그녀들에게 아이의 아빠인 타케루는 "홀로 밖에 내몰린 이치코보다는 우리가 더 안전하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과의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녀의 죄에 대해서 어떤 결판을 내릴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하루카. 과연 그것이 그녀(이치코)의 죄일까요?
그건 분명 실수이지 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의 시시비비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조카가 죽은 것도 아니고 심각한 장애를 얻은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었습니다. 15살 짜리 아이. 그 15살 짜리 아이는 정말 심각하게 두사람(언니와 형부)에게 자신은 자신의 조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그 어려움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볍게 무시되었을 따름이죠. 그집에서 그대로 그 네사람이 생활했다는 것이 모든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녀는 그녀의 조카가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가 뭔가를 회피또는 마비하고 싶다는 것을 조카를 통해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녀가 심리적으로 고통스럽다는 상황을 그녀의 증상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분명 자신의 여동생이 필요했겠지요. 자신의 역활(가사노동을 해야하는 주체로서의 역활이자 의무)을 넘기기 위한 존재. 전 그렇게 비춰지더군요. 성인인 당신이 해야하는 가사노동의 무거움을 동생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_-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스러운 아이. 어른스러운 아이는 어른스러워서 어른스러운 아이가 된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서 어른스러운 아이로 길러집니다. 어른스러운 아이를 만드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분명 그녀의 언니임이 분명합니다. 집안일을 거의 못하는 이 집의 구성원들을 보면서 언니를 떠올린 그녀. 그녀는 분명 그집에서 가사노동의 전반적인 부분을 그녀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간단한 가사노동부터 음식을 만드는 일, 그리고 아픈 사람을 시중드는 일도 매우 익숙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이를 발로 찼을때 그녀의 언니가 맨처음 보인 반응은 증오심을 담은 표정이었다고 그녀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오로지 슬픈 눈으로 ... 그녀는 형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도 형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형부는 언니를 좋아하고 있었구요. 형부의 고백을 받은 언니는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언니에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며 언니에게 형부의 프로포즈를 받아라고 권합니다. 모든것이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는 이치코. 그녀의 생각은 매우 사고의 비약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조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조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집에서 그녀의 위치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일겁니다. 처음에는 언니나 또는 형부에 대한 애정으로 그런 전환증상이 왔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과거 회상 장면을 보니 그녀는 형부도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형부와 함께 사는것을 선택할 정도로 언니의 애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언니를 통해서 자신의 확인받고 싶은 아이. 아직 많은 애정이 필요하고 자신의 애정의 한방향의 소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두려워 하는 아이. 그게 15살 소녀 이치코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그집에 이치코가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언니는 그녀를 데리러 왔지만, 정작 그녀에게 필요한 지지가 필요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던 언니. 그리고 형부. 게다가 그 형부는 그녀에게 소중한 처재지만, 지금은 두럽다는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아. 전 그 장면을 보고 정말 빡쳤습니다. 분.명.히 성인인 두사람은 아이인 자신의 동생이자 처제인 그녀에게 분명히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투사를 하고 싶으면 자기를 나름 나이스하게 방어하는 성인에게 하세요. ㄱ- 정 하고 싶거든 말이죠.
그녀는 그녀의 어려움에 대해서 두사람에게 분명히 호소했고, 그 호소에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았던건 그들이었습니다. 그걸 책임이라는 것으로 치환한다면 누구의 책임이 더 클까요? 아이가 클까요? 아니면 성인인 두사람이 더 클까요? ^_^

언니네 부부가 다녀하고 괴로워하는 이치코에게 그들은 근처 공원으로 소풍을 가기를 제안합니다. 놀러가서도 근처에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 그냥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치코. 그러다가 그녀는 강둑아래로 내려가서 유리조각들을 줍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가장 중요한것을 말해주는 코하루. 코하루가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 하는 그녀의 모습 말고 그녀에게는 다른 모습도 있다고 긍정해준 탓일까요? 그녀는 그때부터 다시 아이를 보게 됩니다.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이치코가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위해를 가할리가 만무하다는 말. 그 중요한 말은 왜 그녀의 언니는 말하지 못했을까요? 코하루보다 더 오래 그녀를 보왔던건 그녀의 가족일텐데 말이에요.

그날밤 그녀는 언니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죄'에 대한 내용과 '속죄'에 대한 내용. 그리고 그녀의 문자에 대한 언니의 답장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언니도 같이 속죄할 방법을 찾을께. 네 죄책감은 내 것이도 하니까."  헐헐헐헐헐헐허렇러헐허러헐헐 -_-  미친겁니까?
언니는 저의 예상대로 너와 나 구분이 없는 사람이시더군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으니 자신이 해야할 짐(가사노동)에 대해서 너에게 쉽게 전가하는 것이 가능했겠죠. 그게 죈가요? 세상에는 죄와 그리고 그 반대의 극단에 있는것 뿐인가봐요. 그건 죄라고 명명해야 할 것이 아니죠. 그건 분명한 '우연한 실수'지요. 우연한 실수에 '죄'라는 텍스트를 부과한 것은 언니. 그리고 언니의 투사된 감정의 에너지 덕분에 더더욱~ 지나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 이치코.
동생이 자신이 행동한 것보다 지나친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그 죄의식을을 단 한점의 의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죄의식을 더 키워주는 것이 올바른 성인이자 언니이자 보호자의 모습인걸까요?

그녀의 그런 어려운 부분을 자각하고 그 어둠에 더 심하게 빠지려고 하면 손을 잡아주고 다른 방향을 보여주는 코하루에 대해서 아이를 키우는 타케루는 코하루에 대해서 "욕망에 충실한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는 이치코처럼 금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네. 금욕을 아는 '사람'이군요. '아이'가 아니구요. ^^

이 만화는 굉장히 큰 균열을 가지고 있는 만화였습니다. 특히 이치코의 언니와 형부 그리고 타케루씨를 보면서 그런것을 크게 느꼈습니다. 뭐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으나 결코 제가 납득하는 방식의 전개는 없을것 같습니다. 전작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듯이 이번도 역시 저에게 그런 좌절을 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사실 전작에서는 피해자 구조인 그들에 대해서만 바라봤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틀이 굉장히 균열이 많은 모양이었던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개인의 감정의 어떻게 전개되는 방식이었는지로만 중심으로요. ㄱ- 여러모로 우울하네요. 참고로 제목에서 말하는 '성인아이'란... -_- 저에게는 그녀의 언니에요. 성인이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아이니까요. 투사하고 책임 전가하고 어린 동생에게 의지하고... 심지어 그걸 의식조차 못하고;; 우어어어 최악이다!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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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노래한다 7
타카야 나츠키 글.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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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데가 그런 모습으로 힘들게 일어나려고 하는 그 이유를 알게되는 권이었습니다. 아 보면서 정말 진심으로 카나데의 부모에게 분노가 치밀더군요. 누구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이 아닌 이야기에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보는 이유가 뭐냐고. 저 아이의 이야기는 이야기속의 이야기지만, 분명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저자인 타카야 나츠키씨에 대해서 그 양반의 그런 여러가지 패턴에 대해서 자가 복제 성향이 강하다던가 아니면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뭐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반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는 이 양반이 평생을 걸처 작품에 나타나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굉장히 힘들고 고된 작업이니까요. 극복이라는 말은 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건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들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 이외에 달리 뭐가 있을까요? 저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그려나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품의 캐릭터들을 보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에 대해서는조금씩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내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지 보여주는 것 그자체가 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선가 그런 상황으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힘을 줄수 있으니까요. 분명 그녀의 메세지는 그 누군가에게 도달하리라고 믿습니다. 
카나데에게 저는 앨리스 밀러 여사님이 자신의 수많은 책에서 했던 이야기인 "부모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동이 해야할 일 또는 의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칼 로저스에 의하면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는 긍정적 존중에 '가치'라는 어른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붙으면서 인간(유기체)의 '실현 경향성'에 '왜곡'이 일어나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군요. 부모가 만들어낸 혹자는 심어버린 이상적인 자기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형성된 현실적 자기와 충돌하여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의 충돌에 의해서 그 개인은 많은 문제로 버거워 한다고... 
카나데가 앞으로 나감에 있어서 그 부모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그런 배경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그를 잡고 늘어질지 아무도 모르겠죠. 그 자신도 모르고, 그 부모도 모르고... 그래도 그는 용기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함께 나아갈 사람도 있으니까 결코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그런것들이 극복된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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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수놓이는 소리 4 - 완결
진 토리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결권이에요. 우리의 현실과 아주 부합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를 넘어가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초월적인 이상이나 꿈은 없었어요. 엔딩조차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종의 개체로서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되어 구원 받은 - 구원이라는 단어가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환경에 의해서 보통(보통이라고 정의되기도 애매하지만)의 혹자는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인간의 따스함을 알게 된 부분- 존재는 체리이더군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건 역시 만들어진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세상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전 그런걸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요.
그는 인간으로서 고독한 삶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삶의 고독했던 그에게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는 오직 아저씨 뿐 이었지만, 아저씨의 마음에는 체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존재들이 있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보는 걸 그는 괴로워하더군요. 마음속에는 하나의 존재만 있어야 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로 보여졌습니다.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분노와 자신이 그런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리고 그 분노를 그들의 대표적 존재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체리는 보는 눈이 있는것 같습니다. 아저씨나-, 족장님이나- 모두 그런 그의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으니까요. 살아있는 존재로서 고독하게 살아왔던 그의 삶을 그는 그것을 지나치게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며 정면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괴로움도... 그의 분노도... 포장이나 확대도 없이 그저 그것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인간으로서 고독했던 그에게 빛은 내려왔습니다. 아저씨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싶다고 말했고, 구스타가 그에게 왔고 그리고 그녀가 그를 향해서 날아왔습니다. 자신의 고독과 그 두려움을 알아주는 그녀가 그에게 왔습니다. 구스타와 함께... 그리고 구스타는 아저씨에게 그가 결코 고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다시 그들을 향해서 갑니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요.

종으로서 멸망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그 위기에서도 헬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그 상황을 포지티브한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재앙을 생각하며 두려워 하며 이런 비통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그의 소중한 친구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인 리버는 그들에게 그들이 종으로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절멸의 위기는 그들을 살짝 빗겨간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혼은 소중한 존재인 폭스를 가슴에 묻게됩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끝에서 그 위기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가 자신을 희생해서 교환한 그 노력은 어딘가에 있는 소수민들의 힘이 되어주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사실 저는 '냉정하게'라고 적고싶습니다) 보여주더군요.
리버는 예언자의 마지막 힘을 쓰면서 인간이 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취사선택안에서 그들의 버리고 가야 했던 것들을 보고...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슬퍼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드가 리버가 이해한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했고 그가 그들을 위해서 대안을 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인간-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지켜주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 재현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가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수정해서 앞으로 나아갈지는 인간으로서 그들-그와 그외의 인간들-의 전망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것이 참혹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한편으로 종으로서 고독하지 않았다고 예언한 리버의 예언은 그들의 종은 공룡에서 새라는 존재로 이어저 내려오고 있고... 어딘가에는 다른 새종족을 찾아서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부락을 이루고 다시 그들의 깃털을 기르고 살아가는 그들을 예견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는 로드와 등가교환법칙에 의해서 소수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대안 혹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장치 아니면 예비책을 마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일족들이 그 오지에서 살아남아서 개체성을 이어간다면 그들은 이전에 그들이 생각했던 그런 온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고유성을 어느정도는 놓아두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구전되는 방식이던지 아니면 그들의 신화로 남아있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자는 그들의 생활 습관에 일부로 남아 있는 방식이겠지요.
그런식으로도 다른 개체의 문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종으로서의 몰락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고 몹시 슬퍼졌습니다.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들은 그들로서 이전의 방식으로는 그대로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다시 인간의 존재 - 스스로가 완벽한 혹자는 중심인 문명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 에 의해서 그들은 세상에 재발견 되는 날이 필연적으로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철저하게 박물관화가 이루어지며 유린당하고 그리고 그들-인간-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소비되겠지요. 오늘날의 많은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그러듯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로가 의미가 있다면 있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원형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박탈감은 분명 평생 담고 살아갈것 같습니다.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고... 그리고 새로운 답을 찾아서 떠나는 형국으로 말이에요. 세상에 나오는 길을 선택하고 그리고 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아가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좀더 형평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영역의 대안들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에 속해있지 않아도 인간으로서의 개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들 스스로의 경향성을 지원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고유성에 대해서 서로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면요. 양극단을 오고가는 이 세계의 주축이 되는 이 세계관은 어떻게 해야지 극복이 가능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전 좀 네가티브한 면이 있어서 '살아있다'라는 것 만으로 충족되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살아있다'라는 그 텍스트는 여러방향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숨을 쉬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개체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받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양극단을 오가는 논리로 비난받고 결박당하는 일이 없어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온전하게 인간으로서 개체로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더라도... 살아있다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한겁니다. 지금의 이 논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공존 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는 환상... 그 환상은 지금의 저를 서있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에요.
사실 마지막에 잭이 우는 장면에서... 그가 모두에게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이야기로만 받아들여 지고 그리고 그들의 살아가기 위한 경향성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나름의 필터링으로 걸러내서 듣는 현실이 그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그에게는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실이고 그의 소중한 마음인데 그것이 그냥 그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이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면을 볼려고 애쓰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부던히도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위에서 말하는 그 이상이라면, 그들에게는 잭이 말해주는 이야기 - 잭에게는 사실 - 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두에서 잭이 했던 걱정은 그냥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적인 걱정일 뿐. 그런 일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잭의 최악의 상황이 온게 아니라서 다행일지... 아닐지. 나탈리가 그가 말한 진실을 진실이 아닌 그녀를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인간에게는 멋진 방어기제가 있어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 것 같아요. 그들(조인)은 이것을 알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잔혹한 공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한 충족조건이죠. 어떤이는 '낭만'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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