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1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1
고수고수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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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조선시대', 죽은 줄 알았는데 판타지 세계 속에 와 있다는 류의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다. 근래에는 한발 더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이나 엑스트라로 빙의하는 '책빙의물'이 꽤 인기였다. 이 소설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는 제목에서 이미 느껴지듯 '책빙의물'의 구성을 따르되 정통 미스터리/추리 서사로 풀어낸 이야기라 읽기 전부터 설렜다. 주인공 버프, 범인 버프를 어느 정도까지나 쓸 수 있을 뿐, '말이 되는,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 논리를 바탕으로 풀어야만 하는 추리 장르와 라이트한 형태의 '웹소설식 구성'이 어울릴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이었다. 나는 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단숨에 달렸고, 완독 후 책을 덮으면서 '이만 하면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이 없다는 게 아니다. 셜록홈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조심스레 말하자면 꽤 많았지만, 그걸 상쇄시킬 만한 장점이 확실했다는 이야기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앞서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명탐정 윌 헌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자 <밀른 가문의 참극>이라는 제목의 웹소설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닫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얼마 전 완결이 난 소설을 몰아서 읽고 잠이 들었다가 깨보니까 소설 안이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이 소설에서 살해 당하는 6명 중에서도 2번째로 살해 당하는 레나 브라운의 모습으로 깨어난 '나'는 스스로를 세계의 신이라고 칭하는 '누군가'를 만난다. 소설 속 문장으로 짧게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소설의 작가는 그쪽 세계에서 인기 없는 추리소설을 몇 편 썼을 뿐이야. 하지만 일단 소설이 완성이 되면 이 드넓은 우주에 그 소설을 배경으로 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생겨나게 되거든. 새롭게 생겨난 세계에서 작가는 신이 되는 거야. 난 그렇게 해서 이 세계의 신이 되었지. 


소설이 완결되고 난 뒤에 우주 어딘가에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에서 '신'으로 활동하는 존재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길게 늘어놓고는 하나의 미션을 준다. 


- 알다시피 이건 추리소설이야. 범인을 잡아. 사건을 해결해. 대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주면 보상으로 너에 대한 설정을 다시 해 줄게.  어마어마한 부자? 세계 최강의 외모? 뭐든 가능해. 새로운 설정으로 네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 주지.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적인 존재와의 거래가 성립된 이후 머릿속에 있는 소설 내용들을 바탕으로 사건을 직면하려고 했던 '나'의 다짐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 레나 브라운이 죽었어야 했던 2번째 살해현장에서 의외의 인물이 발견된 거다. 밀른 가문의 가주 에드거 밀런의 이복 동생이자, 밀른 3자매의 숙부인 에드워드 밀른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문제는, 에드워드 밀른이 본래 소설에서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점이다.   


진범이 죽어버렸다니. 1번째 피해자는 진범이 죽였다고 하더라도 진범은 누가 죽였단 말인가. 소설을 읽은 독자인 '나'도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계속해서 나온다. 본래는 2번째 피해자로 죽었어야 할 레나 브라운의 역할은 탐정 윌 헌트의 '조수'로 바뀐다. 윌 헌트를 따라다니며 그의 추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범인을 찾지도, 그 어떠한 단서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그런 '조연'의 배역을 소화한다. 이래서야 세계의 신이 말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범인의 뒷다리도 잡을 수 있을까, 갑갑해 할 즈음에 주인공 역시 깨닫는다. "아, 내가 지금 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바로 이 지점이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소설의 '강점'이다. 단순히 범인을 좇는 추리극이 아닌, 주인공의 성장 서사라는 점이다. 이쯤하면 되겠지,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하자! 라고 넘어갔다면 지체 없이 '망작'이 되었겠지만, 주인공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엔 범인을 찾고야 만다. 


단순히 책 속의 어떠한 인물에게 '빙의'된 객체가 아니라, 이 세계의 창조주에게 이야기 속 캐릭터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도 된다는 '작가의 포지션'을 받았기 때문일 테다. 즉,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보다 더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웹소설 형태를 취한 추리소설이라는 '구성'을 잠시 접어두고 주인공의 '성장담'이라는 것에 집중하여 2권의 소설을 다시 보자면 크게 3가지 파트로 나뉜다. 


1. 진범이 죽고 난 뒤에도 거듭 터지는 연쇄살인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기존에 읽었던 소설 내용과 레나 브라운의 기억에 의지해 윌 헌트를 서포트하는 시기 


2. 소설과는 다른 살해방식에 혼란스러워하면서 윌 헌트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범인을 잡았다!'고 선언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는 '맹한' 시기 


3. 스스로 각성하여 윌 헌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추리력'으로 진범을 찾아내는 '각성의 시기' 


솔직히 말하자면 2번 구간이 꽤 힘들었다. 1번의 경우 계속 터지는 사건과 기존과는 달라진 내용들을 주인공이 찾아내는 것에 몰입하기 좋았다. 2번 단계에서는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윌 헌트가 추리하는데 너무 엉망진창이라 피곤했다. 공감가지도 않고 비논리적인 데다,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자신이 찾아낸 범인에 대해 주르륵 나열했을 때는 머리가 지끈지끈해질 정도였다. 


작가가 의도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자가 윌의 추리를 따라갈 수 있을 만큼의 떡밥은 던져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윌의 추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그럴 만 하다'라고 생각했다면 훨씬 재밌었을 거 같은 내용이랄까. 주인공 윌 헌트가 떠먹여주는 맛없는 음식을 계속 먹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그게 결말부인데, 뭔가 더 있을 거 같긴 했다. 전자책으로 보고 있어서 더 잘보였는데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어서다. 그 잔여 분량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는 좀 더 읽을 수 있었다. 


기대감이 있더라도 뒷받침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힘들었을 텐데, 이 소설의 강점은 주인공이 순간순간 끼어들어서 해대는 '말들'에 있다. 흡사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를 연상케 하는 말투로 주인공은 적절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 아닌 설명을 해준다. 그때 여타 추리소설들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곁들여져서 더 재미있었다. 


다만, 주인공의 마지막 추리 역시 독자의 입장에선 아쉬웠다. 말은 되는데, 말이 되게 맞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완성도는 있지만 '한 뼘'만 더 나아갈 순 없었을까, 좀 더 기막힌 '물리적인 증거'가 나올 순 없었을까, 앞에서 스치듯 나온 '실마리'가 밝혀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 그대로의 아쉬움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범이 누구일지 나는 1권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증거가 그 사람을 가리켰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증거가 부족해서 조금 더 헷갈리게 해줬으면 좋았을 거 같다는 아쉬움도 있다. 


허나, 좋았다. 방금 전까지 아쉬운 거 줄줄이 말해놓고 뭔 말이냐 싶을 수 있겠지만... 미스터리와 추리, 느와르, 하드보일드 장르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 소설은 재밌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동안 잊어왔던 그 장르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상에 치어 잊고 살던 내 안의 불꽃을 이 책이 다시 '틔워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쉬웠던 부분들은 사실 발랄하고 해맑은 '웹소설 버프'가 많이 커버치기도 했다. 연쇄살인범이 이 책의 세계관 안에서 누구나 다 아는 동요의 내용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도, 그 동요를 만든 사람이 밀른 가문의 가주와 '거의 원수 관계'에 있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전반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들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주인공이 캐릭터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방식을 취하는 독특한 '책빙의물'이어서 이 장점이 더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재밌는 거 + 재밌는 거 하니까 더 재밌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고 취향이 반영된 만큼 읽어보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금증이 생겼다면 한번 읽어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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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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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요란한 아침의 나라>는 담담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가양시는 음험한 도시다. 위성도시 베드타운으로 개발된 지 40년이 지났고, 기나긴 세월을 거듭해 쇠락해 왔으며, 언제나 가장 가난한 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단 두 문장으로 설명되는 도시, 가양시가 배경인 소설은 사실 요란하지 않다. 두툼한 장막 아래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소동극을 몰래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부동산, 정치, 느와르라는 강렬한 키워드가 뒤섞여 있으면서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내 주변에도 일어날 것 같은 현실감을 획득했다는 게 매력포인트다. 바로 그렇기에, 누구나 알 만큼 요란하기 보다, 모를 때는 속아넘어가기 쉬울 만큼 '음험하게' 가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하던 한 활동가가 법인의 공금을 횡령한 정황을 포착한 바 있고, 약자를 돕는다는 미명 하에 활동하던 각종 단체들이 기부금 횡령 등의 사례로 적발된 경우를 보았다. 복지, 기부, 나눔, 배려라는 이름 아래서 검은 뱃속을 채우는 이들을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충실하게 헌신하는 단체와 개인도 있을 테다. 허나, 이러한 사례가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그러한 사회적 운동활동을 기반으로 정치권으로 넘어가서 국민을 위하여 헌신하기 보다 제 뱃속 채우기 급급했던 정치인들이 많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세상은 '드라마'도, '동화 속의 판타지'도 아니며,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소설이 내게 좋았던 건 바로 이러한 욕망을 여러 인물을 통해서 너무도 잘 보여준다는 지점에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잃었다. 다수의 인물이 나와서 각자의 욕망을 좇는 건 좋은데, 너무도 쉽게 풀어간다고 느꼈던 지점도 있었고 떡밥이 회수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느와르를 좋아하는 독자의 욕심을 덧붙이자면, 소설 내에서 소위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이진수의 역할이 좀 더 보였으면 하기도 했다. 


허나 이번 서평에서 나는 좋았던 부분 위주로 이야기할 생각이다. 단점이 아닌, '아쉬운 부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느와르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살짝 변형하면서 사회적인 이슈를 꼬집는 부분이 매력있게 다가와서다. 인물이 다수 등장하고, 욕망을 좇아가면서도 그 많은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냈고 구성상으로 봤을 때도 결말까지 달려가는 힘이 있었다. 


이 '몰입감'의 중심에는 등장인물들의 욕망이 강렬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분일 터. 간단하게 메인 주인공들의 욕망을 써보겠다. 


1. 소설의 발단은 부동산업자 한 사장의 '욕망'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땅의 개발을 가로막는 게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집'이 소유한 쉼터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 땅을 사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고자 한다. 


2. 한 사장은 전직 형사 출신인 청부용액(일명 용역깡패) 이진수를 통하여 '사랑의 집'의 비리를 파헤치고, '사랑의 집'과 대적할 만한 시민단체를 설립하기로 한다. 시민단체간의 파워게임을 통하여 가양시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갖고 있는 '사랑의 집'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3. 한 사장이 시민단체의 대표로 섭외한 '정의로운 변호사' 하나연은 사실 '고매한 신념'이 아니라, 밥벌이 전략으로 시민단체들의 자문 변호사를 자처해왔다. 


4. 이진수가 한 사장의 의뢰를 따르는 것은 '끈끈한 의리'나 '정'이 아니라, 받아야 하는 돈이 있어서다. 


5.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집'의 대표 오유라는 한때 투쟁적인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내 안위, 내 밥그릇을 챙길지에 관심이 많다. 


6. 오유라의 남편 진상은 아내의 돈으로 호위호식하며 '한때는 성공할 뻔했던, 가능성이 충만한 작가'라는 역할놀이와 소싯적에 날렸던 인기에 취해 단 하나의 욕망을 불태운다. 미혼모인 고영희에게 느끼는 성욕을 자신과 영희가 나누는 '운명의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7. 일평생 '실패'만 거듭하며 살아온 고영희는 '사회적으로는 명망 있는' 오유라 부부의 민낯을 보며 착취당하던 끝에 하나연 일행을 만나서 일생 처음으로 '돈'을 갖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스스로 행동하게 된다. 


7번까지 읽었을 때 이 소설의 내용이 어떠한 방향으로 갈지 그려지면서도 궁금할 것이다. 과연 어떤 형태로, 서사로, 사건으로, 갈등과 거래로 이야기가 이뤄질까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소설 <요란한 아침의 나라>를 읽어보도록. 음험한 도시 가양시에서 저마다의 음험한 욕망을 갖고 맞부딪히는 인물들로 인하여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기도 하고, 으레 기대했을 법한 전개로 흘러가기도 한다. 


독자의 기대를 충족해주면서 동시에 기대를 배반하기도 해야하는 게, 잘 만든 콘텐츠만이 갖는 힘이 아닐까. 단, 기대를 배반할 때가 있다면 반드시 그 내용은 소설 안에서 '설득력' 있어야 하고, 독자가 예상하던 방식보다는 '똑똑한 형태'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여성 중심의 서사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를 보았는데, 그 드라마를 볼 거면 이 소설을 읽으라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드라마는 기대를 배반했고, 영리한 방식이 아니어서다. 물론 개인의 취향 차가 있겠지만... 두터운 장막 아래 가려져 있는 사회의 민낯을 일부나마 보면서, 결말로 갈수록 '판타지'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신원섭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몹시도 궁금해진다. 조만간 소설 <짐승>도 읽고 서평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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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로 #문학과지성사 의 새 단행본 시리즈 『SF 보다―Vol. 1 얼음』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었다. 


요즈음 SF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동일한 소재인 '얼음'을 주제로 한 6편의 소설이 이 한 권에 실려 있다는 게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남유하의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나머지 소설들도 완성도 있게 잘 쓰여진 편이라 가볍게 각각의 소설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얼어붙은 이야기 / 곽재식 

트럭과 추돌하여 교통사고 당할 위기에서 생사귀와 만난 '나'. 죽을 위기인 '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은하개 10개, 몇조 개 정도 되는 별들을 죽여야 한다면서 '나'의 인생에 대하여 묻는 생사귀와 함께 '나'는 비밀리에 수행해 온 업무와 그로 인하여 받게 된 '징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진짜로 생사귀를 만났던 것일까, 죽을 위기에서 '아픔'을 경감하는 환상에 빠졌던 걸까, 소설 속 '아이스'라 불리는 마약에 당하여 환상을 겪는 걸까. 발랄한 문장과 흥미로운 서사가 이 소설 안에 담긴 추악한 비극에 대하여 더 서글프게 생각하게 한다. 


채빙 / 구병모 

냉동인간의 상태로 의식만 깨어난 나, '신성한 존재'처럼 떠받들어지던 시대에 얼음새꽃 한 송이를 가져와 안부를 묻던 '따스한 사람'을 기억하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저마다의 소원과 욕망을 빌며 저들끼리 다투는 인간들만이 보인다. 또 한번 세월은 흐르고, 보다 문명화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는 '리오케미컬 컴퍼니의 유일한 생존자'로 일컬어진다. 냉동인간을 만들 정도로 발달된 기술을 가진 세계가 한번 멸망하고 또 다른 '문명'이 시작된 것일까. 옴싹달싹 할 수 없이 '얼음'에 갇혀 있는 '나'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스산함'이 매력적인 소설이다. 


얼음을 씹다 / 남유하  

120여 년 전, 빙하기가 시작된 이래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혹독한 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은 자를 먹으며 생을 영위해 왔다. 남편이 죽었을 때 나는 죽은 자의 언덕에 대려가서 시체를 덕장에 매달아 놓았다. 얼었다 녹는 과정을 거쳐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고기'가 되었을 때, 가족들은 그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5살 난 딸이 죽은 순간, 나는 당연시 된 '식인'을 거부하고 딸의 시체를 갖고 도망친다. 허나, 굶주림에 '인육'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시체사냥꾼과 단지 '유희'로 인육을 먹는 자들이 함께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처절한 디스토피아 환경 속에서 아이를 애도하는 어머니인 '나'의 마음과 갈등, 이들의 상황을 둘러싼 싸움이 촘촘하게 이어지다가 결말에 도달한 순간, '탄식'하게 만드는 '한 방'이 있었다. 


귓속의 세입자 / 박문영 

월드컵 개최국 이탈리아로 회사 차원의 '휴가'를 떠나자고 선언한 대표를 따라 축구 응원단의 신세가 된 해빈. 갑갑한 인생사에 지친 채로, 사람들과 거리 두는 편을 선호하던 해빈은 '기이한 존재'를 만나며 색다른 일상을 보낸다. 해파리와 우파루파를 조금씩 닮은 반투명체는 "나를 당신 몸에 잠시 머무르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시공간을 얼릴 수 있는 자신의 장기를 자랑한다. 해빈의 왼쪽 귀 안에서 살기로 한 기묘한 세입자와 함께하며 조금씩 천천히 변화해가는 해빈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큰 변화는 없고, 사건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소한 위트포인트가 있는 소설이었다.  


차가운 파수꾼 / 연여름 

세상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영구동토층'이라는 차가운 땅 위에 서 있는 건물들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해빙이 계속되면서 나날이 붕괴하는 빌딩을 떠날 수 없는 선택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 땅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로 어쩐지 먹먹한 소설이다. 햇빛에 닿으면 몸에 치명상을 입는 노아, 노아가 사는 건물 지하에서 제가 가진 냉기로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끔 하는 선샤인, 붕괴 사고로 집을 잃고 이곳으로 대피해 온 이제트까지 중심인물들끼리 나누는 정과 정서가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했다. 


운조를 위한 / 천선란 

낮에는 암소를 죽이고 밤에는 고양이를 얼렸다는 소개 한 줄로 운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수의사 운조는 출산을 도왔고, 장성하여 불임 판정을 받은 암소를 윗선의 지시에 따라 죽였고, 죽을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얼려 달라는 고객의 명에 따라 고양이에게서 안락한 죽음을 빼앗았다. 삭막한 일상을 보내다가 '냉동 보존' 기술을 상용화시킨 마거릿의 연구소로 향한 운조, 기묘한 액체가 담긴 구멍에 빠지면서 따듯한 정이 살아 있는 공동체 환경으로 '타임리프'한다. 지구가 분명한데 인간의 외양을 하지 않은 그들과 함께하며 행복해진 운조, 그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구체적인 묘사와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저마다의 장점이 확실한 소설들이었다. 다만, 개인적인 취향을 가미하자면 남유하의 소설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얼어붙은 이야기'의 경우, 메타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느낌이라 처음엔 흥미진진했는데 뒤로 갈수록 상황과 이야기는 던져지는데 '하나로' 잘 모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채빙'의 경우, 냉동인간을 만들 기술력이 있던 문명이 멸하고 다른 문명이 나타나도 인간이란 비슷하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지 개인적으로는 다 읽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부족했다. '귓속의 세입자'의 경우 '얼음'이라는 소재에 가장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위트포인트는 있지만 나와는 결이 좀 달랐다. '차가운 파수꾼'의 경우 흥미로운 관계도를 설정하고 배경도 재미있었는데 결말이 갑자기 닥쳐온 느낌이다. 조금 더 친절했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다. '운조를 위한'의 경우 너무 탄탄한 묘사와 세계관이 인상적이었는데, 역시 결말이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남유하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 소설집은 내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다. 세계관과 상황에 대한 명확한 설정, 인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보여주는 주인공의 서브텍스트, 내 아이를 먹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절하게 반항하던 주인공이 사건이 진행될 수록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속도감 있게 잘 보여줬고, 결말 역시 납득 가능하면서도 서글퍼서 다 읽고도 여운이 많이 남았다. 


테마가 있는 SF 소설을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의미 있었던  #SF보다_얼음 이 책이 단행본 시리즈라고 들었는데 이것이 계속 출간된다면 나는 꾸준히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앞서의 아쉬운 점은 말 그대로의 아쉬운 점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다. 나는 본디 액션을 좋아하고, 갈등 구조가 명확하면서 처절한 상황에 놓이는 것에 가슴 뛰는 사람이니까. 좋은 기회로 읽게 된 만큼 관심 있는 독자들도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을지 궁금해서 리뷰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SF보다 #SF보다_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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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2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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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로 서평단으로서 #켄리우 SF 단편집 #신들은죽임당하지않을것이다 를 읽었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한 #종이동물원 으로 이미 유명한 작가. 언젠가 그 소설을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이번 소설집을 먼저 읽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이 작가의 소설들을 당분간 찾아 읽을 거 같다는 생각,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에서 3편은 연작 시리즈[포스트 휴먼 3부작]다. 매력적인 소재, 몰입하게 만드는 전개, 그 나름의 개연성까지 3박자를 갖춘 소설들이었지만 특히 연작 시리즈가 재밌어서 그 부분 먼저 소개하겠다. 


- 신들은 목줄을 차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매디는 아빠의 유품(노트북)을 사용하다 의문의 채팅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그 메시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빠가 디지털 세상 안에 살아 있다는 충격적 진실을 마주한다. 아빠의 기억, 습관,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거대한 클라우드 세상을 받아 들여 아빠로 규정짓기 어려울 만큼 '너른 세상'이 된 아빠를 매디는 어떻게 바라 봐야할까, 그게 과연 아빠일까...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하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특히 매력적이었던 것은 이 소설이 '신'을 정의/소비하는 방식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디지털 휴먼(매디 아빠와 같은 존재)이 곧 '신'으로 지칭되며, 그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인간에게 속박되지 않는다는 게 주요 골자였는데 창조자(인간)을 따르지 않는 '미지의 존재'여서 섬뜩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근래 신이란 '특정한 존재'이기만 한 게 아니라 세상을 아우르는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서 더 와닿았다. 이 소설에서 신(디지털 휴먼)은 클라우드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각자 자유의지와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단일체이기도 하다. 


-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앞서의 소설이 작가가 생각하는 '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하면서 아빠라는 '만들어진', 그러나 '새로이 탄생된' 신과 무수한 신들의 존재에 대하여 말해줬다면, 이 소설에서는 직접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디지털 세상 속 아빠와 채팅 메시지로 소통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매디가 '사건'을 통하여 아빠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 거다. 


매디의 아빠로 대표되는 세력과 인류 말살을 꿈꾸는 빌런 세력 간의 대결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를 이루며, 디지털 세상 속의 전투가 실질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터트리며 박진감을 더한다. 흔히 '씨뿌리기와 거두기'로 일컬어지는 복선을 잘 조직하여 특히 탄탄하게 느껴졌던 단편이었다. 그 세력 간의 다툼은 어떠한 계기로, 어떻게 전개되며,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읽어볼 사람들을 위해 감추어 두겠다. 


- 신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여기서 살짝 '스포' 하자면,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소설은 아빠의 죽음 이후를 다룬다. 매디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디지털 휴먼' 미스트를 만나게 되는 건데, 남녀의 결합(인공수정의 방식일지라도 별개의 난자/정자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 필요)으로 탄생하는 휴먼과 달리 디지털 휴먼은 따지자면 '자가수정(한 개체 안에서 이뤄지는 융합 작용)'의 방식을 취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독특했다. 사실상 생명체라고 보기 어려운, 디지털 공간(클라우드) 안을 유영하는 시스템이 곧 디지털 휴먼이기에 이 존재 역시 매디의 동생이면서 동생이 아니기도 한 복합체일 것이다. 


색달랐던 점은 '굳이' 매디의 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미스트라는 존재를 탄생시켰다는 점에 있다. 아빠가 사라지고, 아빠의 복제품이 아닌 동생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소설을 읽고 나면 어림짐작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감춰둘 예정이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아빠는 자신 역시 살아 있을 때 미스트를 만들었고, 미스트를 직접 학습시키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동생과 친해지기 위하여 매디가 동생이 직접 세상의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있도록 '기계'를 만드는 장면과 그 엉성하나 사랑이 담뿍 담긴 기계에 실린 동생이 사실 토마토의 맛과 같은 것도 이미 '경험'헤서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인간을 대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휴먼을 대해선 안 된다는 '당연한 진실'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씁쓸하기도 해서다. 


신이 이 작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클라우드 세상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개개의 인식구조와 아이덴티티를 갖춘 디지털 휴먼을 의미한다면 궁금해진다. 


우리는 이제 ‘신’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미 챗GPT라는 진화된 대화형 인공지능서비스가 나타나면서 세상이 떠들썩한 현 시점에서 이 소설들에서 다룬 '신들'을 만나는 날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른다. SF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제 과거의 우리가 했던 방식대로 머나먼 미래를 감상하며 즐기는 '단순한 유희거리'가 아닌, 성큼 다가올 내일의 '현재'에 대하여, 그 '현재'를 살아갈 인간에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서포터'가 아닐까 한다. 


이 외에 흥미롭게 본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는데 1645년을 배경으로 명나라 양주의 주목받는 기생인 '초록꾀꼬리'와 그 종인 '참새'를 다룬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와 국가의 명에 따라 드론으로 1,251명을 죽인 아빠와 그 아빠의 자살 이후 그러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 로봇 개발에 뛰어드는 카이라의 이야기를 다룬 <루프 속에서>, 온 가족을 몰살한 불곰을 쫓아 기계마 10기와 육군 병사를 대동하고 만주에 당도한 박사의 이야기를 다룬 <우수리 불곰>이다. 


단편집을 읽을 때 즐거운 것은 읽는 사람 개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 각각 다르다는 점일 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소설을 흥미롭게 보았다고 '선택'할지 몹시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결국에는 인간이다'라는 점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굳이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 살아도 될 것 같은 세상에서도 결국 인간은 '따스한 휴먼 터치'를 원한다. 손과 손이 마주하고, 촉각하고 감각하는 일상을 '잃어버리면 몹시 '향수'하게 될 것이며, 잃지 않고자 부단히 애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리우의 시선은 따스하나 결코 '신파'적이진 않다. 따스한 시선이나 관조적이다. 주제의식을 투영하거나, 섣부른 결론을 내려는 방식, 인간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집어 넣지도 않았다. 그저 판을 짜고, 그 안에 따스한 심장을 가진 주인공을 몰아 넣고,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며 변화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독자가 스스로 ‘깨닫게’ 한다. 


허니, 켄리우는 따스하나 담대하고, 담담하나 말캉한 심장을 가진 이가 아닌가. 그러한 작가가 한 구절씩 정성스레 직조해간 느낌이 들어 이 소설집은 더욱 차근차근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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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열두 동물로 읽는 일본 문학 단편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바른번역(왓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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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 밖에 안 읽어봤는데 단편이 있네욥 ㅎㅎ 소개글이 흥미진진해서 읽어봤는데 테마가 동물이라 더 색달라서 그런가... 재밌었습니당~ 지하철 오가며 호로록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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