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슬리퍼를 신은 남자
벵상 드 스와르트 지음, 오영민 옮김 / 세계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아내의 슬리퍼를 신은 남자. 제목과 함께 뿌옇게 처리된 인물과 함께 배치된 사물의 몽환적인 분위기의 책 표지는 나를 오해시키기 충분했다. 가정적인 남편 이야기 혹은 주부가 된 남편 이야기로 말이다. 그 동안 접한 몇 안 되는 프랑스 소설의 독특함을 잊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벵상이며 직업은 작가이다. 마치 이 책의 작가와 이름도 동일하여 실제 본인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책을 읽어나갔다. 두드러기로 시작된, 아니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두드러기 후 나 벵상에게 발생한 '그 사건'을 계기로 벵상은 당혹스러움과 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10년 동안 동고동락한 친구 같은 사랑하는 아내 안느와 이니셜로 지칭되는 몇몇 애인을 두며 별 생각 없이 고민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온 벵상에게 '그 사건' 때문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말할 수 없어 고민하고 숨기며 초조해하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직시하게 된다. ‘그 사건’이 벵상에게는 획기적인 삶의 전환점일 것이다.

밝히고 싶지 않고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그 사건이란 하루 아침에 벵상에게 발생한 정말 꿈 같은 일로 남성이란 생물학적 증거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성의 자궁이 생긴 일이다. 눈 뜨고 일어나니 있어야 할 신체의 일부가 없다니,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내게 또 다른 신체의 일부가 생긴다고 상상만해도 이리 끔찍한데 실제로 겪으면 가뜩이나 생각이 많은 내가 얼마나 더 깊이 고민에 빠져들까. 숨기기 위한 거짓말들 속에서 들킬까 불안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뱅상처럼 새롭지만 또 다른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나를 드러낼 용기가 있을까. 모두 나를 떠나가면 어떻하지. 변해버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리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 안느와 오랜 친구 같이 서로를 이해하며 지금껏 가꿔온 다정한 관계를 깨고 싶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특히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참으로 괴로울 것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 이제부터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란 더 쉽지 않을 것이다. 변한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리면 어쩌나.

드디어 자신의 신체의 변화를 고백하고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안느의 반응을 기다리며 뱅상은 최악의 순간까지 상상했을 것이다. 벵상과 안느의 결혼 생활에서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것 보다 약간의 건조함과 익숙함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그런지 뜻밖으로 안느가 남편의 변화를 인정하며 조용히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보듬어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메말라 보이는 그녀 속에 저런 사랑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lle est Moi. 프랑스어 원 제목의 뜻은 그녀는 나이다. 그녀는 또 다른 나 일 수도 아내인 안느일 수도 있다. 자신 안에서 발견한 새로운 그녀를 나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그녀 또한 나 자신의 자체로 받아들인다. 이번에 새로 접한 프랑스 소설 또한 발상의 독특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읽는 내내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되어가는 거지? 벵상이 되어 그의 생각과 감정을 함께 느끼며 이 책이 아니면 접할 수 없을 특별함을 경험했다. 뭔가 생각은 많았는데 여전히 프랑스 소설은 내게 어렵게만 느껴진다. 짙은 안개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그나마 옮긴이의 도움을 받아 살짝 걷힌 안개 속에서 여전히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평범한 책들에 식상해 뭔가 책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은 분에게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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