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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기울기가 있는 공정한 세상
y=ax+b (a=0 상수 함수, a>0 or a <0 일차 함수)
* 기울기가 있는 세상에서 보이는 일차함수의 공정성 *
누군가가 보기엔 평등으로 만연한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기울어진 불리한 세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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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대한 단순한 염려와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강한 희망은 토론 동아리 9명의 치열했던 투표를 가볍게 마무리 짓게 했다. 모순을 넘치게 끌어안은듯한 제목과 마주했고 그 순간의 호기심은 가뿐히 모두의 표를 얻기에 충분했다.
책과 만날 토론의 시간을 기다렸다. 일 주, 또 이 주 때로는 3주 후에 만날 모두와의 열띤 토론과 나눌 마음이 설렘으로 다가왔다. 특별히 이번 책으로 생긴 호기로움은 멤버들을 만날 체감의 시간을 앞당겼다.
오늘 다시 찾아온 설렘은 내겐 선물이었다. 두 손 가득 선물을 안고 떨리는 심장으로 그(녀)들을 만나러 간다. 힘차게~~
📚 📖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내가 보고 있는 세상과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에 대해 어느 쪽으로 먼저 들어가서 평등을 들여다봐야 할지 고민했다. 마침내 한숨을 뱉어낸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시선을 맘에 담고서 먼저 적어도 내가 이루고 있고, 속한 세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모순이 만연해 있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고 보이는 온통 모순이 가득한 그곳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곳에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누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타자들과 내가 있다. 여기서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받을 수 있는 많은 혜택을 말한다. 그곳에 속해 있는 나와 타자들은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가진 자가 자신이 가졌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며, 그냥 존재함으로 소유하거나 스며듦으로 만연해 있는 것들이다. 비단, 이런 풍조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라 상징되는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아주 보편적인 우리 의식 자체가 그렇게 흘러왔다. 나 역시 한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이주 노동자들이나 이방인이라 불리는 그들과는 달리 한국 안에서의 여러 특권을 안고 태어났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어느새 내 것이 되어 받은. 사회적 대접이나 시선, 그 사람들의 태도 외에도 한국인이라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자국민들에게 맞게 조성되어 있는 사회, 문화, 편의 시설 모두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토론에 모인 우리조차도 모두가 깨닫기 이전에 당연히 누리는 특권이었다
다른 한 가지 예로 장애인들에 비해서 비 장애인으로서의 특권 또한 전혀 인식 없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 하나만 보더라도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 등 많은 것을 계산해서 그들에게 많은 관리비나 더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책에서는 꼬집는다.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저절로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그것들이 진정한 특권임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평등이나 불평등이란 말이 전달하듯 단어가 주는 불평등은 편하지 않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작가는 그것은 특권에서도 같은 경우라고 얘기한다.
우리의 삶은 누구보다 나에게, 때로는 나보다 그 누군가에게 조금 더 쉬운 삶이 가끔은 더 어려운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자신의 위치만 바뀌면 되는 것일까. 도서관에 모인 우리는 각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조금씩 바꿔보고 가끔 각도를 바꾼다면 얼마든지 달라지고 다른 모습으로 비치리라 생각을 나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목에서부터 모순된 사회, 생각과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근거 없이 막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통계와 사례를 들어서 차분히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차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가 가해하는 입장에 되기도 하고 반대의 입장인 내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는 누구나가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불평등과 차별 등의 유사 단어들이 강하게 와닿고 실질적인 현실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도 모르고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사회 곳곳에서 개선의 시도를 보이는 경우 고개를 갸웃하며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 생각이 반감으로 이어져 긍정적 변화의 입장에서 속도를 더디게 한다고 생각했다.
토론에서 나는 잠시 개그의 소재로 주로 쓰이는 조롱이 들어가 있는 표현의 관점으로 들어가 우월성 이론에 접근해 보고자 했다. 요즘은 유머러스한 사람이 매력적이고 그래서인지 그들은 일반적인 현실, 그리고 실생활을 담고 있는 일차원적 개그에서 무한 매력을 발산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주로 보여주는 개그의 행태를 말했다. 개그의 주 소재들은 인종이 다른 타국 사람들, 마름을 평범함으로 볼 때는 뚱뚱한 사람들, 외모에 대한 강한 비화 등 많은 내용들에서 즐기고 웃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결코 웃으며 넘어갈 수 없는 내용들도 더러 있다고. 나의 경우처럼 실제 생활에서도 혹자는 웃자고 얘기한 건데 죽자고 덤비면 어쩌자는 건지라며 어이없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 또한 입장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생각한다.
✏️📏📝
일차함수(y=ax+b, 단 a는 0이 아니다)로 보이는 세상은 과연 공정할까? 사실 상수함수(y=a, 단 a는 상수)는 어떤 자극이나 태도, 환경에서도 한결같이 같은 값을 유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상수함수의 한결같은 값이 대단히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다르게 보면 아주 비극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수 함수로 보는 일정한 세상은 변함없는 각도에서 한결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변하지 않는 각도에서는 오류를 범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충분하다.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오류이다.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그것을 인식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식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예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상수 함수는 상수의 값에 따라서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또는 조금 낮은 위치에서 변함없는 시선으로 사회 주변과 지구를 보고 있어야 한다. 물론, 알고 있는 일차 함수의 세상에서는 더 많은 시행착오가 있다. 기울기에 따라서 그 시각이나 받아들이는 부분이 극대화되거나 좀 더 완만하다는 차이가 있고 다만 기울기가 있기 때문에 세상과 사회의 문제들을 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기울기가 있는 세상에서도 문제점은 당연히 있다. 세상을 공정함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기울어진 공정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이끌어 가는 주체에 따라 공정하기도 하고 이미 공정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나 역시 한 걸음 떨어져 공정하다 말하는 기울어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한숨에서 멤버 모두 기울기가 있는 공정한 세상에 대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거라 느껴졌다. 누구는 기울기를 가진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소극적 사회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어릴 적 자신은 소외된 계층에서 살고 있었지만 어린 자신의 시선에서는 인지하지 못할 만큼 공정한 세상을 살았다고 기억했다. 어느 날 그 세상이 무엇보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를 경험하며 표면은 단단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지금의 세상에서 차별과 그 차별 곁에 머무르며 주변을 이해하는 방법을 단순함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단순한 방식은 어떻게 나아가는 것을 말할까? 우리가 쓰는 많은 단어들은 그 속에 항상 상대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순과 차별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때론 가해자, 가끔 피해자가 되기도 해 왔다. 마치 현실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아직 공정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 공존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조차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일까.
토론을 마무리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가려져 있는, 불균형 불평등을 깨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우리부터 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다. 그들이 말한 평등과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치 선량한 모습을 하고 태연히 숨죽이며 나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 차별들을 조금씩이라도 해결해 나가는 시작이 될 것이라 믿는다. 서로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설렘으로 준비를 했다. 토론 중 가끔은 미소 짓는 입과 광기 어린 눈빛이 작가가 던진 메시지에 대한 멤버들의 고민과 생각을 더 크고 깊게 만들었다. 부정과 긍정, 직선과 곡선의 다양성을 품은 토론 모임은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믿음으로 마무리 짓는다. 다음 열정을 남기며 마무리 인사를 나눈다. 일정이 바빠 뛰어가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토론 모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긴 시간 마음 고백을 한 나는 처음부터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답답해했고 토론 이후 뭔가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던 그들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젠 좀 안정적인지. 위로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나 자신이 정작 위안을 받았다. 색깔이 너무나 강하고 분명한 그녀들의 조화로움을 생각하자 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나누었던 그 시간 생각과 눈빛과 마음을 떠올리며 가슴에 담았다. 정신없었던 하루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작가가 전한 메시지가 이런 것일까.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 '토론'의 위로를 경계에 올려두고서 모임의 에너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것에서 내가 놓치고 우리가 가볍게 지나쳤던 것들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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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기가 있는 공정한 세상을 꿈꾸며. 상수함수의 세상은 극단적 수용이나 거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