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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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보르헤스의 이번 인터뷰 대담집은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읽을 수록 그 탁월한 대화의 흐름과 깊이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온갖 종류의 주제를 가지고 이 언어학자이자 소설가, 시인, 학자, 혹은 그저 단순히 책을 무척 사랑하는 독자로서

긴 세월을 견뎌내고 이겨내오면서 천성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얻게 된 삶의 지혜와 해박한 지식이

두 사람 혹은 세사람, 군중들과의 대화를 통해 읽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미 너무나 오래 살았기에, 죽어서 자신의 존재도 잊히고 자기가 쓴 책들도 사라지는 것이 희망이라고 표력할 정도로

겸손한고 겸허한 모습, 군중들과의 대화가 아닌 바로 당신과 1:1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모습 또한 소탈하기 그지 없다


말년에는 시력을 잃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문학과 시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리고 그가 얼마나 문학을, 특히 영어라는 언어를 사랑하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 강렬하게 와 닿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나에게는 쉽지가 않아 늘 마음으로만 염원해 왔던 중에,

이 인터뷰집과 함께 민음사에서 나온 <픽션들>을 함께 읽었더니 인터뷰 중에 그의 소설 이야기가 간혹 나올 때마다

주의 깊게 읽을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픽션들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한 뼘 더 가깝게 그의 목소리와 영혼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펼쳐 보기를 추천한다.


첫 페이지 첫 줄만 읽어도 이미 당신은 보르헤스라는 인물에게 매료되고 말 것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까울 만큼 재밌고도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p.60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에든 다른 누군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누군가로 바뀌면 우린 그 사실을 알지 못해요.

예를 들어, 어느 순간에 나는 당신으로 바뀔 거예요. 당신은 나로 바뀔 것이고요. 그러나 그런 변화가 끝난 뒤엔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바뀐 걸 알지 못하는 거예요. 우린 늘 바뀌어요. 우리는 달에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달에 사는 사람이 되면 '그'의 과거를 지닌, 그의 기억을 지닌, 그의 두려움과 희망 같은 것을 지닌

달에 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지요."




p.73


"아니에요. 바보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런 일은 인간 경험의 한 부분이에요. 내 말은 사랑하는데 사랑을 받지는 못하는 상황,

그게 모든 삶의 일부라는 뜻이에요. 안 그래요? 당신이 내게 와서 "나는 아무개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가 날 거부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누구나 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누구나 퇴짜를 맞고 퇴짜를 놓지요. 그 두가지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쉽게 눈에 띄어요

누군가는 거부하고 또 거부당하지요.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나요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이네가 말했듯이 우린 매우 상심하게 되죠"



p.74


반스톤 - 간혹 상심에 빠졌을 때, 난 죽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고 싶다는 신호였을 뿐이라는 걸 나는 알았어요


보르헤스 - 나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언제나 그걸 미뤄두었지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왜 걱정을 해야 해?

자살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말이야. 그와 동시에 난 한 번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걸 사용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반스톤 - 당신은 내 질문에 대답한거나 다름 없어요. 자살을 생각한 것은 살고 싶다는 신호였을 뿐이라느나 걸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종종 마음에 품었던 자살 충동조차도 더 충만하게, 더 잘 살고 싶다는 필사적인 바람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보르헤스 - 자살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자살했다는 걸 알고 나서 남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것만 떠올려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복수심 때문에 자살을 하지요.

화가 나서 자살을 해요. 자살은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누군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

이건 대단히 잘못된 일이지요.


반스톤 - 자살은 주로 젊은이의 연애 이야기예요. 젊은 사람들이 간혹 들어서는 그릇된 문이지요. 그렇다면 그 역은 어떨까요?

살고자 하는 열정은 왜 있는 걸까요? 그 열정이 왜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기도 하는 걸까요?

살고자 하는 그 격렬한 열정은 왜 있는 걸까요?


보르헤스 - 그걸 답할 수 있다면 난 우주의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난 그럴 수 없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 실패했으니까요.

나는 자살한 사람들을 많이 알아요. 내 친구들 중 많은 이가 자살했지요. 사실 우리 나라 문학가 사이엥서 자살은 꽤 흔한 편이에요

아마 미국보다 많을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려는 갈망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갈망에서 자살을 했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경우 그게 자살의 동기예요.





p.89


불행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도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고 싶군요.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많은 재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불행, 고독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작가가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에요. 악몽도 도구예요. 내 소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악몽이 내게 준 거예요.

나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악몽을 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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