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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열 시 반 ㅣ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밤 열 시 반>은 여름밤만의 정취, 신선한 바람이나 아름다운 풍광은 없다. 오직 끈적이는 불쾌지수와 멈추지 않고 몰아치는 거센 비, 하룻밤 머물 곳 없는 막막함, 그리고 끝없는 불면과 망상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차가운 술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이 소설의 서늘한 배경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비는 멈출 것 같지 않고, 다음날 해는 떠오를 것 같지 않다. 영원히 끝도 없이 늘어질 것 같은 새벽하늘 아래,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술을 마시는 것뿐,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여름밤 열 시 반>에 펼쳐진다.
마리아와 남편 피에르와 딸, 쥐디트, 그리고 친구 클레르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던 도중, 퍼붓는 비를 피해 하룻밤 묵기로 결정한다. 소설은 마리아가 카페에서 나눈 대화로 시작한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 그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애인마저 죽이고는 사라졌다.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으나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리아는 만사니야를 거푸 주문하며 생각에 빠져든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 피에르와 클레르가 사랑에 빠졌다면, 필시 그들은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고 있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의심 속에서 피에르와 클레르는 이미 각별한 사이로 발전해 있다. 더욱 끈끈하게, 더욱 친밀하게, 더욱 은밀하게....
소설은 시종 마리아의 시선으로 피에르와 클레르의 관계를 세세하게 관찰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리아 혼자만의 상상인지 불분명하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과 서로의 몸을 터치하는 손길, 주고받는 말과 어조, 보이지 않는 행동과 표정까지, 면밀히 살피며 두 사람의 심리와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상과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흡사 마리아는 남편과 친구가 보통 이상의 관계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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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리아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 눈을 내리깔고,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마련된 이 여름밤, 마을이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번개가 그들의 욕망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추어준다. 그들은 여전히 원래의 위치에서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 그의 손은 지금 그녀의 허리를 두른 채 화석처럼 굳어 있다. 한편 그녀, 저기 있는 저 여자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달라붙은 채, 제 입을 그의 입에 대고 열심히 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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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하드보일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여성작가로서 뒤라스의 필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각 장면마다 눈앞에서 펼쳐지며, 소설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고전적이면서 진부한 주제를 낯선 사건과 문장으로 그려낸 점 또한 놀랍다. 마리아의 알코올 중독과 솜뭉치처럼 젖어든 몽롱함과 나른함, 더디게 흘러가지만 기어코 오고야 마는 내일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권태와 허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