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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오늘의 젊은 문학 5
문지혁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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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깔끔하고 우아한, 그런 단편들이다"라는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문지혁 작가의 단편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감을 안고 읽었다. 총 8편의 단편들이 이끄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간들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이어져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무수한 사건들의 확률 속에서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247)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아놓고 보니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재난'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묶인다. 나는 재난과 재난 이후의 삶에 관해, 상처와 폐허와 트라우마에 관해, 우리가 스러지고 다시 일어선 곳에 관해,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두서없고 더듬거리고 때로는 말문이 막혀 한숨만 내뱉는다 하더라도. 이 소설 역시 그러한 더듬거림의 한 형태이자 기록일 것이다.



『다이버』는 읽는 내내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폭수』의 수학자처럼, 『다이버』의 주인공도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이다. 통합 세기 219년, 여객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바람에 참변을 당했고 끝내 딸의 시신을 찾지 못한다. 결국 직접 다이빙을 하자는 결론에 도달한 유족들은 바다로 잠수한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하나 둘 다이빙도 포기하고 돌아갈 즈음, 끝내 혼자만 남겨진 남자는 두려운 물길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 곁에 남기로 결심하며 바다로 뛰어든다. '지금 가고 있어'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그에 반해 『폭수』의 수학자는 아들을 떠나보낸 후, 호수를 향해 쿼터 동전을 던지기 시작한다. 물론,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왜 쿼터를 던지냐는 질문에 수학자는 '특이점'에 대해 설명한다. 어느 순간 특이점에 도달하게 되면 에너지 밀도가 급격히 높아져 폭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쿼터를 던지면 호수의 물이 폭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런 일이 언제든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그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하는 수학자는 비극이라는 불행이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을 거꾸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종 침착하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수학자의 태도는 묘하게 감동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106) 나는 나무 아래 서서 한동안 호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불규칙한 물결의 반짝임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문이나 나의 불확실한 미래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반복됐다. 영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 광경은 묘하게 감동적인 데가 있어서, 나는 인터뷰고 뭐고 그냥 여기 어디 벤치에 앉아 해가 다 저물 때까지 호수를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종이책이 금지되고 모든 지식과 정보가 넷을 통해 유통되는 통합 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재』와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는 독립된 단편이면서 연결된 서사의 흐름 안에 있다. 불행은 언제나 패턴이 깨지는 순간 찾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아가던 『서재』의 주인공 영은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57) 아이. 우리의 아이. 생각의 바다 위에서 나는 곧 태어날 생명이 기다리는 해안가로 휩쓸려간다. 나의 패턴을 깨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낯선 존재에게,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는 영이 남긴 책의 빈 페이지를 그의 딸인 윤채가 이어서 채우기 시작한다. 두 단편은 미래를 배경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의 소재를 가지고 흡입력 있는 장르적 매력을 뽐낸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책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또 하나의 역사라는 것을.

(93) 빈칸이 줄어든다. 아빠의 책을 앞쪽에서부터 다시 읽는다. 아빠가 겪었던 일들이 자세하게 적힌 그 글에는 아빠가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적어도 읽는 동안 나는 아빠가 된 것만 같다. 사람들은 그래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겪지 않은 일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읽는 동안만큼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마지막에 적힌 아빠의 글에서 전에는 지나쳤던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한다. '부디 우리가 서로에게 서로의 다음 페이지가 되기를.' 아빠는 언젠가 내가 이 책을 읽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저 '우리'가 만약 아빠와 나라면. 내가 아빠의 다음 페이지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까?

이 단편집에서 가장 궁금했던 단편은 역시나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였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바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 의문은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시작은 경쾌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던지고 있는 이 소설은 읽고 나서도 지나간 역사의 현장을 회상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재난을 우리는 함께 겪고 감내해야 했으며,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부터, 911 테러,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까지, 수차례 목도하며 지나쳤던 재난을 아우르며, 그 비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셈이다.

(247) 극동 아시아에서 온 21세기 유학생에게 18세기의 미국독립전쟁 유적지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사고, 재난,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고 또 기억되는가? 이 소설은 그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하나의 장소 위에 서로 다른 역사,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이야기가 겹치는 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은 소설가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200년 전 전쟁의 배경이 된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두 사람이 함께 건너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가 겪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부터, 911 테러를 거쳐 '아야'가 보고 들은 동일본 대지진까지, 두 사람은 우연히 살아남았고,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운명이라는 확률은 지독한 구석이 있다. (211)"지금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다.".... 말 그대로 "언제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전 세계인들에게 그 비극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단지 끔찍한 재난의 일부로만 여기고 잊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우리라고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당분간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다리 위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글쓰기처럼 작가도 다리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는 것도 인생의 확률에 의문을 품고 여러 종류의 경우의 수를 지켜보는 과정이 아닐까. 잊지 않는다는 것,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189) 확률에 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포트 리의 카페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 그것이 아야일 확률. 내가 이 시간 이곳에 오게 될 확률과 아야가 내가 오기 전이나 떠난 후에 오지 않고 정확하게 주문하고 있는 시간에 올 확률. 눈이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볼 확률. 내가 다리에 가자고 말할 확률과 아야가 그것을 수락할 확률. 아야와 내가 각각 도쿄와 서울에서 태어날 확률. 30여 년 뒤 뉴욕에서 만날 확률. 하나의 다리가 지어지거나 무너질 확률.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 모든 종류의 경우의 수. 그러니까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하나의 사건에 이르러 지금 마주 보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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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오늘의 젊은 문학 5
문지혁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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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사건들의 확률 속에서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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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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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의 기준은 없다.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겐 열린 질문과 논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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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열 시 반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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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감과 긴장감으로 무장된 <여름밤 열 시 반>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각적이며 시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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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열 시 반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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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밤 열 시 반>은 여름밤만의 정취, 신선한 바람이나 아름다운 풍광은 없다. 오직 끈적이는 불쾌지수와 멈추지 않고 몰아치는 거센 비, 하룻밤 머물 곳 없는 막막함, 그리고 끝없는 불면과 망상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차가운 술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이 소설의 서늘한 배경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비는 멈출 것 같지 않고, 다음날 해는 떠오를 것 같지 않다. 영원히 끝도 없이 늘어질 것 같은 새벽하늘 아래,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술을 마시는 것뿐,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여름밤 열 시 반>에 펼쳐진다. 


마리아와 남편 피에르와 딸, 쥐디트, 그리고 친구 클레르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던 도중, 퍼붓는 비를 피해 하룻밤 묵기로 결정한다. 소설은 마리아가 카페에서 나눈 대화로 시작한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 그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애인마저 죽이고는 사라졌다.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으나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리아는 만사니야를 거푸 주문하며 생각에 빠져든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 피에르와 클레르가 사랑에 빠졌다면, 필시 그들은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고 있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의심 속에서 피에르와 클레르는 이미 각별한 사이로 발전해 있다. 더욱 끈끈하게, 더욱 친밀하게, 더욱 은밀하게....


소설은 시종 마리아의 시선으로 피에르와 클레르의 관계를 세세하게 관찰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리아 혼자만의 상상인지 불분명하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과 서로의 몸을 터치하는 손길, 주고받는 말과 어조, 보이지 않는 행동과 표정까지, 면밀히 살피며 두 사람의 심리와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상과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흡사 마리아는 남편과 친구가 보통 이상의 관계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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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리아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 눈을 내리깔고,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마련된 이 여름밤, 마을이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번개가 그들의 욕망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추어준다. 그들은 여전히 원래의 위치에서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 그의 손은 지금 그녀의 허리를 두른 채 화석처럼 굳어 있다. 한편 그녀, 저기 있는 저 여자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달라붙은 채, 제 입을 그의 입에 대고 열심히 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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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하드보일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여성작가로서 뒤라스의 필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각 장면마다 눈앞에서 펼쳐지며, 소설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고전적이면서 진부한 주제를 낯선 사건과 문장으로 그려낸 점 또한 놀랍다. 마리아의 알코올 중독과 솜뭉치처럼 젖어든 몽롱함과 나른함, 더디게 흘러가지만 기어코 오고야 마는 내일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권태와 허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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