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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 하진은 중국계 미국작가로 성장기에 문화혁명기를 경험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천안문사태를 접하고 작가생활을 위해 미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영어로 펴낸 첫 장편소설이 바로 <기다림> 이다. 이 책은 중국의 70~80년대를 산 어떤 젊은이들의 18년이라는 기다림 속에 들어 있는 좀 특별한 인생 이야기다.
린은 시골출신으로 중학교때 집을 떠나 공부를 해서 군병원의 군의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27세에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신부의 얼굴 한번 안보고 결혼을 했다. 신부 수위는 글도 모르고 키도 작고 26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심지어 전족까지 했다. 수위는 결혼후 바로 시어머님의 병수발을 하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아버지의 병수발까지 했다. 농사일도 하면서 딸 화를 키우며 살림을 혼자 꾸려 나갔다. 린은 군에서 지내며 생활비를 보내주고 1년에 한번 집에 와서 열흘정도 머물다 가는 게 고작이다. 전형적인 인텔리 린과 시골농민 수위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에게 애정이 없는 린은 병원에서 세련된 현대여성 간호사 우만나를 만난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유부남이기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연인관게를 유지한다. 가령 직장 밖에서는 둘이 만나서도 안 되고 직장 안에서 같이 얘기만 나누는 정도의 생활을 18년씩이나.
린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아내와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해마다 이혼을 시도한다. 그러나 번번이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과 사회적 이목에 신경 쓰다가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18년을 별거끝에 아내의 동의 없이도 볍률적 이혼이 되었고 마침내 역시 18년을 기다려준 연인 우만나와 바로 결혼을 했다.
우만나는 그 긴 세월동안 여러 번 다른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린만한 남자가 없었다. 중간에 나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등 어려운 고비를 넘겨가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린과의 결혼을 맞이했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은 달콤함보다는 힘들기만 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성격차이로 자주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기 바빴다. 더구나 쌍둥이의 출산으로 갑자기 많아진 육아,가사일과 직장생활을 잘해내기에 체력적으로 버겁기만 했다. 만나는 그녀대로 오랜기간 쌓인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과 의부증에 심장병까지 생겼다.
둘은 지쳐만 가고 이러려고 18년이나 기다렸는지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모범적이고 원칙에 충실한 성품의 린은 자신이 만든 결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만나가 심장이 악화되어 1년 정도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받고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한다. 만나도 없이 늙어버린 자신이 쌍둥이를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이럴 때
전처 수위와 딸 화와의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린의 말이라면 거역 한번 안하고 살아온 수위는 지쳐서 찾아온 린의 아픔을 품어주고 만나가 죽은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수위와 화의 따뜻함에 위안 삼으며 린은 다시 생활에 활력을 찾으며 이야기는 끝난다.
이 책을 읽고 세사람의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봤다.
주인공 린은 의미없는 결혼생활에 내 인생을 다 버릴 수 없다며 새삶을 꿈꾸며 인내하며 18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기다린 결과는 기대와는 한참 어긋나고 나이 오십줄이 다되어 섹스와 육아와 아내의 잔소리와 생활고에 피곤했다. 지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만 점점 커졌다. 그가 기다려온 것은 무엇인가! 그는 사랑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닐까? 잘 생기고 지적이며 능력까지 겸비한 린, 젊은 시절을 마음가는대로 사랑하고 즐기지 못하고 참고 기다리고 절제하며 보낸 세월이 안타깝다.
결과적으로 한인간의 인생에 깊이 관여한 사회의 규율이 씁쓸하다. 물론 그런 통제된 환경에서 누구나 그렇게 수긍하며 살진 않는다. 힘든 길을 싫어하고 우유부단하며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는 성격이 만든 결과이다.
만나는 또한 어떠한가. 고아로 가족도 없이 외롭게 자랐는데 유부남을 사랑한 죄값이 너무 크다. 아름답던 청춘기에 모든 욕망을 참고 사회의 눈과 편견과 싸우며 18년을 기다렸다. 참 대단하고 안쓰럽다. 노처녀 히스테리가 생길만도 하다. 어떻게 병이 나지 않겠는가. 기다려온 세월을 다 보상 받기도 전에 결혼생활 몇 년만에 죽는다니 얼마나 억울할까. 만나에게도 연민이 느껴진다.
수위는 무심한 남편에게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자신에게 과분한 남편이라 생각하는지 내색한번 없다. 그저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남편 말이라면 거역 한번 안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주는 우리네 옛엄마들 같다.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고 싶다. 18년 동안 이혼을 요구하는 무심한 남편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그런데 이혼 후에 또 다시 린이 돌아온다는 기대감에 행복해하니 그녀의 긴 기다림에 어떤 열매가 맺히려는지 궁금하다.
기다림 속에는 기다림 후의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의 긴 시간이 마냥 불행한 것만도 아니며 그자체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그 상황에서 허락된 나름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기다림의 시간은 다를지언정 그 기다림 후에는 지금보다 행복할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것은 아닐까? 비록 기다림의 결과가 다소 기대에 어긋날지라도 오늘에 최선을 다하면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시 다른 기다림의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이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하니 이런 기다림의 인생을 살다간 청춘들의 이야기가 싸하게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