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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의 실상 - “반일 종족주의”비판
전용덕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5년 4월
평점 :
학술적으로 뉴라이트는 식민지근대화론과 계보를 같이하고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오스트리아학파와도 학술적인 연결점이 있다. 때문에 자유주의를 연구하는 학자가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것은 조금은 의외인 일이다.
저자는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총독부도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통제적 국가이므로 오스트리아학파적 의미에서 나쁜 정부라는 점을 꼬집고자 한 것 같다, 이러한 비판은 개발독재에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른 저작 <국가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을 쓴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식민지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통계에 대한 인상적 비판을 넘어선 대안적 통계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허수열의 <개발 없는 개발> 이후 계속된 수량적 비판에는 논의가 도달하지 못한 한계가 뚜렷하다. 만약 조선반도의 경제성장률이 과장되었다면 혹은 강점기 한-일간 1인당 소득격차가 과소평가되었다면 그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크고 ‘과학적’인 무기인 통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인데, 저자는 과장, 과소되었을 것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지만 얼만큼인지는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비판이 힘이 약해지는 지점이다.
이외에 일제를 전쟁 사회주의라고 보면서 종래의 (자유의지적) 수출론을 비판하고 식민지라는 체제가 가져오는 구조적 수탈에 관한 주장을 오스트리아학파적 입장에서 논변한다거나, 감시와 공포를 통한 정치적 폭압으로 인해 자유가 박탈된 조선은 근대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거나, 경제규제의 포획이론을 활용하여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공공성을 비판한다거나하는 주장은 기존에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매우 신선하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에 대해 조선이 망해서 국유지가 없는데 이를 몰수했으니 수탈이라는 주장이나,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소위 자주적 근대화(정치적 독립, 공업화, 민주주의)를 일제보다 더욱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if적 가정에 근거한 비판에는 논의의 깊이를 더하지 못하는 피상성이 배어난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면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근대국가적 틀이 확고할 뿐 아니라 군사적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대한제국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체역사소설에 등장하는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개혁을 시도한다고 해도 자주적 근대화가 가능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한 가정을 전제로 일제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현실적으로도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의미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이 있어 이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첫째, 1937년 이후 진전된 공업화와 이에 힘입은 경제성장은 결과적으로 1945년 패전 이후 말그대로 소멸했을 뿐 아니라 ‘전시산업’에 편중된 것으로써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경제성장이 표면적으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시동원체제 아래서 숫자놀음에 불과한 것이지 생활에 소용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여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니므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경제성장의 결과가 일본인과 한반도 한인 사이에 불균등하게 배분되었는데, 이를 식민지근대화론은 중요하게 보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부분을 논증하기 위해서 우편저금 잔고와 공업부문의 민족별 자산 추계를 인용하고 있다. 이는 타당한 주장이고 나도 개인적으로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나, 엄밀하게는 이미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반박된 주장이다. 이미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민족별 불평등을 감안하더라도 일본인의 소득만 증대되고 조선인의 소득은 전혀 증대되지 않았다거나 감소하는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고 기각하였다. 다만 조선인 지주-자본가와 비숙련노동자-소작농의 민족 내부의 계급적 차이까지 고려한 분석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지점에 천착한 추계는 아직 확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셋째, 일본시장과 조선시장은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특히 화폐제도의 분리(즉 조선은행권의 불환성), 노동시장의 제도적 분리(즉 도항허가제와 민족간 차별임금제)를 식민지근대화론이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의 제도적 통합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나, 일본과 조선 사이에 무관세를 통한 자유로운 통상이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본과 노동의 시장이 통합되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시장 통합의 효과는 가져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 전체를 보건데, 저자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가장 타당한 비판은 이우연, 정안기의 징용징병에 자발적 참여에 대한 주장들에 대한 비판(제3장)이다. 자발성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짚고, 나아가 경제적인 의미에서(오스트리아학파적 입장에서 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자발성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타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이 논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 볼만하다.
전체적으로 오스트리아학파의 입장에서 본 식민지근대화론과 비판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