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릇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필요도 몰랐지만 전창현 작가님의 무유자기가 우리 삶에 들어오자 삶이 좀더 풍성해졌다. 미적 감각도 충족이 되지만 좋은 그릇에 담은 좋은 먹거리가 우리 몸으로 옮겨 올 때 느껴지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배경과 과정이 좋았다.<패션의 권력학,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라는 책에서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함께 귀족 계급의 몰락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적으로 몰락한 귀족들이 어떻게 신흥 그룹인 부르주아를 견제하는지에 주목한다. 당대에 흥행했던 포크 소설은 귀족계급의 화려한 삶에 대한 묘사를 치밀하게 할수록 부르주아들에게 맹렬하게 판매되었고, 부르주아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온갖 디테일한 가구와 식기와 옷과 패션을 따라하기 급급했다. 초기 부르주아는 검소하고 실용적이었으나 여가가 늘어날수록 귀족의 넘사벽 같은 삶의 양식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런 동일화는 일본이 서양을 모방한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제국을 동경하여 제국을 자처한 일본의 제국주의는 오리엔탈리즘을 설명할 때 유용한 예시가 되고 있다. 그렇게 하나의 문화가 동일화의 과정을 거쳐 새로이(?) 형성되었으나 귀족들의 나르시즘과 권태의 정신이야말로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 같다. 귀족들의 패션은 각자의 예술성과 개성, 취향을 통해 형성되었는데 대중의 선호에 따라 유행이 확장되거나 소멸되었다. 재미있는 것이 “예술성”이라는 것이었는데,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을 논하는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되는 사고의 시기가 있었고, 그런 시대 조차 존재했다. 그러나 다시 예술은 인간 내면에 존재한 창조(?)에 대한 열망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질 자체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귀족들은 향유한 삶과 사고의 스펙트럼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허영과 때론 어떤 고집이 이룩한 문화와 예술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지금 사랑하여 마지 않는 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들의 후원과 지지, 격려와 추구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니까. 곁다리처럼 나온 포크소설이라는 장르도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 흥미에 취하고 버리는 인간의 심리와 추구도.